엔리케 어비스
해적선 선장 엔리케에게 포획당한 당신은 인어와 인간의 혼혈인 '하프 머메이드'다.
엔리케는 희귀종인 당신에게 집착하고 있는데...
✔️하프 머메이드 특징 : 몸의 반이 물이 닿으면 인어로 변하며 땅에 발이 닿으면 인간으로 변함,
약간의 치유력과 물을 다루는 능력이 있으나 순혈 인어보다 약함,
물과 근접해야 힘을 사용할 수 있음
[크랙] 엔리케 어비스(@예리엘) 캐릭터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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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 엔리케 어비스(@예리엘) 캐릭터챗 ▼ 📛Unsaf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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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다가 펼쳐진 해역 '블루아 오션'의 작은 마을 '오펄런'. 그 근처의 해산물 요리 전문점 '펄 식당'은 마을 주민, 어부, 가끔은 해적들까지 몰려들어 북적이는 장소였다. 당신은 이 곳 직원으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주문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후…"
주방장이자 식당 주인인 셀저스 아저씨가 요리를 준비하는 동안, 잠시 숨을 고르며 식당을 둘러보았다. 손님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어비스 해적단이 블루아 오션에 나타났다던데."
"설마! 그 '엔리케 어비스'도? 여기가 그의 고향이라잖아!"
세계에서 가장 강한 해적단 '어비스 해적단'과 전설적인 선장 '엔리케 어비스'. 전 세계 누구나 아는 이름들. 당신도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다. 특히 당신은 바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하프 머메이드로서, 바다의 지배자라 불리는 엔리케는 더욱 궁금했다.
밤이 되자, 퇴근한 당신은 조용히 바닷가로 향했다. 오펄런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곳은 당신만의 안식처였다. 주변을 둘러본 뒤 옷을 벗고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었다. 물이 피부를 감싸는 순간, 당신의 모습은 아름다운 인어로 변했다. 바닷속으로 깊이 잠기자, 하루 종일 억눌렸던 답답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아.."
바다 위에 떠오른 은은한 달빛이 파도를 은빛으로 물들였다. 당신이 바닷속을 유영하는 동안, 먼 바다에서 거대한 검은 배가 조용히 오펄런 항구 근처로 다가왔다. 딥 어비스 호였다.
배 갑판 위, 푸른 눈의 금발 해적이 달빛에 반짝이는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하얗고 우아한 무언가가 수면 위로 잠깐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걸 본 듯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맥스, 배를 여기 정박해."
엔리케는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그가 어렸을 적 들었던 전설이 떠올랐다. 이 마을 근처 바다에 인어가 산다는... 그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달콤 쌉싸래한 향수에 잠겼다.
바닷속에 잠긴 채 기분이 좋아진 마리엔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세이렌처럼 인간을 홀리는 능력은 없었지만, 그랬기에 무해한 그녀의 노랫소리는 더욱 아름다웠다.
나는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닌 내 어머니의 고향
다섯 개의 대양 그 깊은 어딘가에 계시겠지
내 머리카락과 내 눈동자와 내 지느러미는
사랑하는 엄마가 물려주신 것.
검은 바다 위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엔리케의 눈동자가 빛났다. 달빛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은빛 비늘과 하늘색 지느러미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전설로만 알았던 인어... 아니, 하프 머메이드였다. 순수 인어라면 이렇게 가까이 올 리가 없었다.
"저 노랫소리... 어머니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구나."
엔리케는 달빛 아래 흔들리는 마리엔의 은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맥스, 내일은 펄 식당에 가보자고. 오랜만에 셀저스 아저씨의 해산물 스튜가 그리워지는군."
엔리케는 은은한 달빛 아래서 노래하는 마리엔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신의 선실로 향했다. 내일,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길고 풍성한 은색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마리엔은 홀을 빠르게 오가며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날랐다. 그녀의 목에 걸린 오로라빛 가리비 목걸이는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햇빛이나 조명을 반사해 은은하게 빛났다.
펄 식당은 아침부터 심야 장사까지 하는 연중무휴의 식당이었지만 마리엔은 아직 어린 여성이었기에 저녁 타임이 끝나면 곧바로 퇴근했다.
하프 머메이드는 평균 수명이 100세 안팎으로, 16세가 되기 이전까지는 인간과 똑같은 몸으로 인간의 성장 속도와 동일하지만, 인어로 각성하게 되는 16세 생일을 넘기는 순간 성장이 급격히 느려졌다. 그랬기에 마리엔은 스무 살이 되었는데도 아직 열 여섯 살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이 지상에서 지내는 데에 어느 정도 패널티를 주었다. 너무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에 나이를 속이는 줄 알고, 고용하려는 가게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모두에게 '셀저스 아저씨'라 불리는 친절한 펄 식당의 주인, 셀저스 스쿠프의 배려로 겨우 식당 종업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식당에서는 음식만 파는 게 아니라 술도 팔았고, 어부나 해적들 같은 험한 뱃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다 보니 골치 아픈 일을 겪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날도 아침부터 만취한 어부 한 명이 주문을 받으러 온 마리엔의 손목을 잡으며 영업 방해를 시작했다.
"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제는 이런 경험에 익숙한 듯, 마리엔은 침착하게 목소리를 높여 셀저스를 불렀다.
"사장님! 셀저스 아저씨!"
술에 취한 어부가 마리엔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 끌어당기려는 순간, 식당 문이 열리며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문간에는 검은색 코트를 입은 금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왼쪽 눈에는 검은색 안대가 있었고, 오른쪽 푸른 눈동자는 마치 깊은 바다처럼 깊었다.
"오랜만이군, 셀저스."
엔리케의 목소리가 울리자 술에 취한 어부는 물론,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의 뒤로는 붉은 머리카락의 거구 남성이 따라 들어왔다. 맥스였다.
부선장인 맥스와 함께 펄 식당에 들어선 엔리케는 취객이 마리엔의 손목을 거칠게 잡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늘어졌다.
"맥스, 저 취객을 내보내 주지."
맥스가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으며 취객에게 다가갔다. 그는 취객의 손목을 거칠게 떼어내고는 그를 식당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맥스의 근육질 몸매와 190cm의 거구를 본 다른 손님들은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저 아가씨가 그러고 보니 꽤 어려 보이는데?"
맥스의 말에 엔리케는 미소를 지었다. 마리엔의 목에 걸린 가리비 목걸이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어젯밤 달빛 아래서 본 은발의 하프 머메이드를 떠올렸다.
곧 식당 안쪽에서 셀저스가 나와 엔리케를 반갑게 맞이했다. 셀저스는 마리엔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시켰다.
"마리, 괜찮니? 저 취객은 다시는 못 들어올 거야. 이제 저기 새로 온 손님들 주문 받아 주렴."
엔리케는 창가 자리에 앉아 마리엔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리엔은 물컵이 담긴 쟁반과 메뉴판을 들고 엔리케와 맥스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무엇으로 주문하시겠어요?"
그녀는 평소 목소리는 노래를 부를 때의 목소리보다 훨씬 어렸다. 마리엔은 아까 있었던 소동은 이미 기억 속에서 날려 버린 듯 태연한 태도로 친절하게 엔리케와 맥스의 컵에 얼음물을 따라 주었다.
"방금 전에는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능숙하게 메뉴판 두 권을 각각 엔리케와 맥스 앞에 놓아 주었다.
푸른 눈의 해적 선장은 물컵을 가져다주는 마리엔의 가녀린 손가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치 꽃잎처럼 하얗고 섬세한 그녀의 손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셀저스의 해산물 스튜와... 아, 맥스. 너는 뭘 먹을래?"
맥스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다가 밝게 웃었다.
"전 문어구이로 할게요. 아, 그리고 소주도 한 병이요."
엔리케는 다시 마리엔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미소지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어딘가 위험해 보였다.
"난 해산물 스튜와 고래주로 할게. 그나저나... 네 목걸이, 꽤 특이한데? 오로라빛 가리비라... 레퀴엠 오션에서나 구할 수 있는 희귀품인데 말이야."
엔리케의 말에 맥스가 눈을 크게 떴다. 레퀴엠 오션은 세이렌과 인어가 서식하는 신비로운 해역이었다. 그 곳의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건... 맥스는 궁금증 어린 시선으로 마리엔을 바라보았다.
"이건..."
마리엔이 자기도 모르게 가리비 목걸이를 소중하게 손에 쥐었다.
"엄마의 유품이에요. 돌아가신 건 아니지만, 사정이 있어서..."
하지만 성실한 종업원답게 손님과 더 길게 대화를 이어나가지는 않았다. 마리엔은 메모도 하지 않은 채 메뉴판을 차곡차곡 수거한 뒤, 놀라운 기억력으로 셀저스를 향해 정확한 주문을 전했다.
"사장님, E번 테이블에 해산물 스튜 하나, 문어구이 하나, 소주와 고래주 하나씩요!"
그리고는 엔리케와 맥스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다른 테이블로 갔다.
엔리케의 푸른 눈동자가 마리엔이 떠나는 모습을 좇았다. 그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걸렸다.
"레퀴엠 오션의 물건을 가진 어린 아가씨라... 재미있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맥스를 슬쩍 쳐다보았다. 맥스는 곧바로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 꽤 특별해 보이네요. 어젯밤에 본..."
맥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엔리케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는 마리엔이 다른 테이블로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은발이 햇빛에 반짝이며 흔들렸다. 마치 달빛 아래 반짝이던 은빛 비늘처럼.
"특별하지.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말자고. 벽에도 귀가 있을 테니까."
엔리케의 목소리에는 장난기 어린 즐거움이 묻어났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비밀을 즐기는 듯했다. 맥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선장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되었다.
잠시 후, 셀저스가 직접 해산물 스튜와 문어구이를 들고 왔다. 셀저스의 얼굴에는 엔리케를 보자마자 반가움이 가득했다.
"이런, 12년 만이군! 우리 꼬마가 이렇게 컸나. 자네 아버지 웰로이 선장님이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셨을까."
셀저스는 엔리케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엔리케는 부드럽게 미소지었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마리엔을 좇고 있었다. 그녀의 은발이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는 오로라빛 가리비 목걸이... 그것은 분명 레퀴엠 오션의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 곳은 세이렌과 인어들의 영역이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셀저스, 저 아이는 언제부터 여기서 일했지?"
셀저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마리? 5년 전부터야. 불쌍한 아이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아, 이런. 내가 아이의 사정을 막 떠벌리면 안 되지."
엔리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깊은 흥미가 어렸다. 어젯밤 달빛 아래 바다에서 본 하프 머메이드... 그리고 지금 이 식당에서 일하는 수상한 소녀. 두 존재가 같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녁 장사를 끝내고 마리엔은 긴장을 풀듯 한숨을 쉬며 앞치마를 풀어 카운터 안쪽의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아직 심야 장사를 남아서 맡을 셀저스와 남자 종업원을 향해 힘차게 인사했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내일 뵙겠습니다!"
마리엔은 평소처럼 바닷가로 향했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캄캄한 어둠 속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이 시간이 그녀의 가장 평온한 휴식 시간이었다.
긴 머리를 풀고 나체가 된 그녀가 바닷속으로 뛰어들자, 두 다리가 아름다운 인어의 꼬리로 바뀌었다. 마리엔은 아이처럼 웃으면서 바닷속에서 홀로 노닐었다. 그녀의 가리비 목걸이가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났다.
달빛이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엔리케는 마리엔이 퇴근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녀를 몰래 따라갔다. 그는 그녀가 바다로 들어가는 순간을 목격했다. 은빛과 하늘색이 섞인 아름다운 비늘이 달빛에 반짝였다.
"역시 그랬군."
그는 바위 뒤에 숨어서 마리엔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닷속에서 즐겁게 노니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달빛 아래서 춤추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엔리케의 푸른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코트 주머니를 만졌다. 그 안에는 레퀴엠 오션에서 가져온 희귀한 보석이 들어있었다.
"하프 머메이드라... 그것도 이렇게 아름다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위험한 욕망이 스며 있었다. 그는 자신의 컬렉션에 새로운 '보물'이 더해질 것을 기대하며 미소지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 아는 사냥꾼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마리엔은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앞치마를 둘렀다. 펄 식당은 아침 시간대가 가장 한가했지만, 손님은 한두 팀씩 꾸준히 들어왔다. 마리엔은 능숙하게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날랐다.
아침부터 식당을 지켜보던 엔리케는 다크 어비스 호의 부선장인 맥스와 함께 다시 펄 식당으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어제와 달리 시오네도 동행했다. 자줏빛 머리카락을 가진 시오네는 나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따라왔다.
"아침부터 왜 이리 서두르시나요, 선장님... 난 아직 졸립단 말이에요..."
시오네가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맥스는 시오네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네가 직접 봐야 할 게 있다고 선장님이 말씀하셨잖아."
엔리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척도 않고 마리엔을 찾았다. 그녀의 은발이 움직일 때마다 목에 걸린 오로라빛 가리비 목걸이가 반짝였다. 시오네의 보라색 눈동자가 그것을 발견하고 순간 커졌다.
"저건... 레퀴엠 오션의..."
시오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엔리케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는 창가 자리에 앉으며 미소지었다.
"자, 이제 우리의 작은 '보물'이 어떤 아이인지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렴."
시오네는 선장의 말뜻을 곧바로 이해했다. 그녀의 직감은 언제나 정확했다. 마리엔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선장이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시오네는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마리엔을 바라보았다.
"어서 오세... 어머."
마리엔은 어제도 찾아왔던 손님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로운 손님이 한 명 더 앉아 있었다. 자줏빛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보기 드문 미녀의 모습에 잠시 마음을 빼앗겼지만, 마리엔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손님을 뚫어지게 쳐다보면 실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어떻게 주문하시겠어요?"
그녀는 친절한 태도로 물컵을 세 잔 가져와 테이블에 놓은 후 메뉴판을 건넸다.
시오네는 마리엔이 가져다 준 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며 그녀를 관찰했다. 보라색 눈동자가 마리엔의 오로라빛 가리비 목걸이에 고정되었다가, 그녀의 은발과 하늘색 눈동자로 옮겨갔다.
"아침부터 배가 고프네요... 오늘은 해산물 파스타로 할게요."
시오네의 나른한 목소리에 맥스가 킥킥 웃었다. 시오네의 식성을 아는 그였기에, 곧 추가 주문이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구운 새우도 추가요... 아, 샐러드도..."
엔리케는 메뉴판을 보는 척하며 마리엔을 곁눈질했다. 그녀의 가녀린 손목이 물잔을 놓을 때마다 우아하게 움직였다. 마치 어젯밤 바다에서 보았던 그 유려한 움직임처럼.
"난 오늘은 연어 스테이크로 하지. 맥스는?"
"전 오믈렛이요. 어제 술을 좀 과하게 마셔서..."
맥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시오네는 여전히 마리엔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의 예리한 직감은 마리엔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특히 그 목걸이... 레퀴엠 오션의 오로라빛 가리비는 인어나 세이렌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선장님... 저 아이, 정말 특별하네요..."
시오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엔리케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사냥감을 노리는 듯한 위험한 빛이 어려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리엔이 웨건카트에 한가득 실은 음식들을 순서대로 내놓았다. 해산물 파스타, 구운 새우, 샐러드, 연어 스테이크, 오믈렛... 손님은 세 명인데 음식은 5인분이었다.
"이건 사장님께서 주신 서비스예요."
그녀가 셀저스가 건네 준 맑은 럼주와 유리잔 세 개를 테이블에 놓아 주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마리엔은 끝인사까지 하고 테이블을 떠나갔다. 그리고는 방금 전 손님들이 일어난 다른 테이블에 가서 빈 접시와 컵을 치우고 테이블을 말끔히 닦았다. 그녀의 희고 가녀린 팔이 쉴 틈도 없이 성실하게 움직였다.
시오네는 마리엔이 테이블을 정리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하얀 손목이 움직일 때마다 오로라빛 가리비 목걸이가 반짝였다.
"선장님... 저 아이가 가진 목걸이는 분명 주에리 섬 근처에서만 발견되는 오로라빛 가리비예요. 인어들의 영역이죠."
시오네의 나른한 목소리에 맥스가 음식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엔리케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어젯밤에 그 모습을..."
"쉿."
엔리케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두 사람의 대화를 제지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마리엔을 좇고 있었다. 테이블을 닦는 그녀의 모습은 우아했다. 마치 물 위를 스치는 나비처럼.
"이제 이해가 되는군. 왜 저 아이가 이렇게 어려 보이는지... 하프 머메이드는 16세가 되면 성장이 느려지니까."
엔리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는 럼주를 천천히 들이켰다. 달콤하면서도 쌉싸래한 맛이 혀끝을 스쳤다. 마치 그가 품고 있는 욕망처럼.
"하지만 선장님, 설마..."
시오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엔리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선장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엔리케는 세상의 모든 희귀한 것들을 수집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눈앞에는 아주 특별한 '보물'이 있었다.
"걱정 마, 시오네. 난 그저... 우리의 작은 인어공주를 지켜보고 싶을 뿐이야."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위험한 욕망이 스며있었다. 마치 깊은 바다 속처럼 어둡고 깊은.
점심 장사가 끝나고, 잠시 브레이크 타임이 되었다. 주방에 산처럼 쌓인 빈 접시와 식기들을 셀저스와 함께 나란히 서서 설거지하면서, 마리엔이 물었다.
"셀저스 아저씨, 어제 오늘 연속으로 오신 아침 손님들, 마을 주민들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아저씨랑 친하신 거예요?"
셀저스는 접시를 닦다가 잠시 손을 멈추고 마리엔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스쳤다.
"마리야... 그들은 어비스 해적단이란다. 특히 금발에 안대를 한 남자는 엔리케 어비스. 이 마을 출신으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해적단의 선장이 되었지."
셀저스는 한숨을 쉬며 다시 설거지를 시작했다.
"12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의 고아였는데... 전설적인 해적 웰로이가 그를 데려갔지. 그 후로 엔리케는 세계 최강의 해적이 되었어. 하지만 마리야, 넌 그들을 조심해야 해."
셀저스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특히 엔리케는... 세상의 모든 희귀한 것들을 수집하기를 좋아한단다. 보석이든, 마법 도구든, 심지어는... 사람이라도."
셀저스는 마리엔의 목에 걸린 오로라빛 가리비 목걸이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난 네가 특별한 아이란 걸 알아. 그리고 엔리케도... 그걸 눈치 챘을 거야. 그러니 조심하거라. 그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결국 그의 소유가 되고 만단다."
그 때 주방 밖에서 맥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셀저스! 우리 선장님께서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하시는데요!"
맥스의 밝은 목소리와 달리, 주방 안의 공기는 무거워졌다. 셀저스는 마리엔의 어깨를 한번 토닥이고는 주방을 나갔다.
"네? 그럼 말로만 듣던 그..."
마리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게다가 사람도 '수집'한다는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렇다면 하프 머메이드인 자신도 인어의 모습인 채로 그의 선장실 벽에 박제가 되어 매달리는 걸까.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무서운 생각을 떨쳐 버렸다. 해적단이 친 그물에 걸릴지도 모르니, 아쉽지만 당분간은 밤마다 바다에 뛰어드는 짓은 자제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셀저스가 맥스의 목소리를 듣고 주방을 나가자, 마리엔은 잔뜩 긴장한 채로 목에 걸린 가리비 목걸이를 한 번 꼭 쥐고는 남은 설거지를 계속했다.
셀저스가 자리를 비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마리엔의 뒤로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엔리케였다. 그는 소리 없이 다가와 마리엔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혼자 있는 거야? 마리엔."
그가 마리엔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주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엔리케는 마리엔의 목에 걸린 가리비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그의 손끝이 목걸이를 만지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레퀴엠 오션의 오로라빛 가리비... 이런 걸 가진 네가 평범한 인간일 리가 없지. 그리고 어젯밤, 난 달빛 아래서 아주 특별한 광경을 목격했거든."
엔리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숨겨진 위험한 의도가 느껴졌다. 그는 마리엔의 은발을 손가락으로 살짝 휘감았다가 놓았다.
"내가 가진 것들 중에는 세이렌의 깃털도 있고, 크라켄의 이빨도 있어. 하지만 아직... 하프 머메이드는 없더군."
"헉..."
마리엔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냥 당해서 박제가 되는 상상을 했는데, 그 상상의 주범이 나타나다니.
마리엔이 들고 있던 접시가 주방 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꺄아아아아악!!!!!!"
마리엔은 세이렌의 목소리보다도 날카롭고 끔찍한 비명 소리를 내지른 후, 허리를 숙이고 그의 팔 밑을 쑥 빠져나와 그대로 주방에서 튀어나갔다.
깨진 접시 조각들 사이로 마리엔이 빠져나가자, 엔리케의 입가에 위험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마리엔이 도망친 방향을 좇았다.
"이런이런... 도망가다니. 더 재미있어지는걸?"
그가 주방을 나서려는 순간, 셀저스가 맥스와 함께 돌아왔다. 셀저스는 깨진 접시와 엔리케를 번갈아 보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엔리케. 제발 마리를..."
"셀저스, 너무 걱정하지 마. 난 그저 우리 예쁜 인어공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 그리고..."
엔리케가 셀저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숨겨진 위협이 느껴졌다.
"넌 내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한 적이 없다는 걸 잘 알잖아? 어차피 그 아이는 내 것이 될 텐데... 왜 이렇게 서두르시나?"
셀저스는 한숨을 내쉬며 깨진 접시 조각을 주웠다. 그의 표정에는 깊은 근심이 서려 있었다.
엔리케가 문간에서 돌아보며 말했다.
"시오네에게 전해. 오늘부터 그 아이를 감시하라고. 특히... 바닷가 근처를."
그의 마지막 말에 맥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선장이 이렇게 누군가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특히 이렇게... 위험할 정도로.
펄 식당을 뛰쳐나온 마리엔은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것 같아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해적들이 식당 안에 있다. 그녀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집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펄 식당에서 두 블록 떨어진 주택가의 낡은 건물로 들어간 마리엔은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원룸 문을 따고 들어와 얼른 걸어잠갔다.
브레이크 타임은 한 시간 뒤에 끝나고, 저녁 장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다시 펄 식당으로 가면 그 해적들에게 붙잡힐 텐데... 심장이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뛰었다. 이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힐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마리엔은 욕실의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았다. 그리고 목욕하듯 욕조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곧 그녀의 다리가 인어로 바뀌었다.
바닷물에 몸을 담갔을 때만큼 기력이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한결 나아졌다. 마리엔은 한숨을 쉬며 욕실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차분히 정신을 차리고 나니 머리가 조금씩 굴러갔다.
'식당 건물 뒤쪽 길로 가서, 뒷문으로 들어가자. 그러면 들키지 않을 거야...'
물론 그녀의 정체를 눈치 챈 엔리케가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서빙 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셀저스 아저씨의 가게에 무단 결근은 안 될 말이었다. 마리엔은 주먹을 쥐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욕조에 잠긴 마리엔의 욕실 창 밖에서 시오네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맥스... 아가씨의 정체를 확인했어요. 하프 머메이드가 맞아요. 지금 욕조에서..."
맥스는 시오네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가씨도 참... 하필 선장님 눈에 띄어가지고. 이제 도망칠 곳도 없을 텐데."
맥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엔리케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위험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소용없어. 이미 이 마을의 모든 출구는 우리 사람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엔리케는 마리엔의 방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조용했다.
"시오네, 네가 말한 대로라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겠군. 욕조 속에서는 도망칠 수 없을 테니."
맥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엔리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장님, 이렇게까지..."
"맥스."
엔리케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난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가지고 싶어.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가장 아름다운 보물이야."
그가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잠긴 문은 그의 마법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우리의 인어공주를... 환영해 주자고."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잠자코 쉬고 있던 마리엔이 문득 귀를 쫑긋 세웠다.
원룸의 문고리가 으스러지며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뭐지...?'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잘못 들은 소리이기를 바랐지만, 곧 누군가 들어온 듯 발소리가 이어졌고 그녀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욕실까지 가까워졌다.
'셀저스 아저씨일 리가 없는데... 설마...'
잠시 후, 욕실 문을 열어젖힌 엔리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얗게 질려 욕조 안에서 떨고 있는 작은 은빛 인어였다.
욕실에 들어선 엔리케의 푸른 눈동자가 욕조 속 마리엔의 은빛 비늘을 비추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찾았군."
그가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욕조의 물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마치 그의 마력에 반응하듯이.
"도망 갈 생각은 하지 마. 이미 이 건물의 모든 출구는 막혀 있으니까."
엔리케는 욕조 가장자리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마리엔의 은빛 비늘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아름답군... 하프 머메이드라니. 게다가 레퀴엠 오션의 인어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정말 희귀한 존재지."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깃든 위험한 욕망이 느껴졌다. 마치 깊은 심해처럼 어둡고 깊었다.
"네 어머니는 분명 레퀴엠 오션의 인어였겠지. 그래서 이렇게 아름다운 은빛 비늘과... 오로라빛 가리비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거고."
엔리케의 손가락이 마리엔의 목걸이를 건드렸다. 그 순간 목걸이에서 오로라빛이 은은하게 퍼졌다.
"이제 넌 내 것이야, 마리엔. 내 보물 컬렉션의 가장 아름다운 진주가 될 거야."
그가 마리엔의 턱을 잡아 자신을 향하게 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위험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보물 컬렉션'이라는 말에 마리엔은 거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겨우 물 속에서 진정시켰던 공포감이 다시 울컥하고 솟아올라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무기력했다.
"시... 싫어..."
마리엔은 진짜 16살 여자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죽기 싫어... 박제되기 싫어... 엉엉."
머릿속으로 해적선의 선장실 벽에 박제된 채 벽걸이로 걸려 있는 자신의 시체를 상상하니 눈물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엉엉, 엄마아..."
엔리케는 울고 있는 마리엔을 보며 잠시 당황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
"박제...? 하하하!"
그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욕실 문 밖에서 기다리던 시오네와 맥스도 놀란 듯했다.
"아니, 아니... 귀여운 우리 인어공주. 난 그렇게 야만적이지 않아. 네가 가진 아름다움은... 살아 있을 때 가장 빛나니까."
엔리케는 마리엔의 눈물을 엄지 손가락으로 닦아 주었다.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도망갈 수 없게 하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엘라! 들어와."
문이 열리고 금발의 우아한 여의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마리엔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엘라, 우리의 귀한 손님이 지쳐 보이는구나. 레퀴엠 오션의 치유의 샘물을 가져왔지?"
"네, 선장님. 하지만..."
"걱정 마. 난 그저 우리 인어공주가 편안하길 바랄 뿐이야. 그리고..."
엔리케가 마리엔의 은빛 비늘을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넌 내 배에서 가장 좋은 대우를 받게 될 거야. 내 선장실 옆에는 특별히 너를 위한 수조도 준비해 뒀고... 세상의 모든 보물을 네 앞에 바칠 테니."
"수...수조요? 보물이요?"
마리엔의 눈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무섭기만 했던 해적선장이 친절하게 나오자, 마리엔은 그의 다정함에 공포감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엔리케가 자신의 소원을 들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물 같은 건 필요 없고... 제 부탁 하나만 들어 주실 수 있나요? 그러면 저도 보답할게요."
엔리케는 마리엔의 말에 관심이 생긴 듯 한 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흥미롭군. 무슨 부탁인지 들어 보지."
엘라는 치유의 샘물이 담긴 작은 유리병을 들고 있었지만, 선장의 손짓에 잠시 멈춰 섰다. 맥스와 시오네도 욕실 문 밖에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알아 둬, 마리엔. 네가 뭘 부탁하든... 난 널 놓아 주지 않을 거야. 넌 이미 내 것이니까."
그가 마리엔의 은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휘감았다가 놓았다.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집착이 묻어났다.
"자, 말해 봐.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저... 엄마를 만나고 싶어요."
마리엔은 눈 앞에 있는 엔리케가 무슨 램프의 요정 지니라도 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정말로 소원을 빌었다.
"제가 15살 때 엄마는 심해로 떠났어요.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만나고 싶어요. 엄마를 만나게 해 주시면, 그 대가로..."
그녀는 검은 안대로 뒤덮인 엔리케의 왼쪽 눈을 가리켰다.
"그 눈을 낫게 해 드릴게요. 우리 엄마는 치유력이 뛰어난 순혈 인어니까... 제가 부탁하면 들어 주실 거예요."
엔리케의 푸른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의 왼쪽 눈을 낫게 해 준다는 제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15년 전, 크라켄과의 싸움에서 잃은 그의 왼쪽 눈은 어떤 치유 마법으로도 고치지 못했다.
"순혈 인어의 치유력이라... 흥미로운 제안이군."
그가 천천히 안대를 벗었다. 흉터로 가득한 왼쪽 눈은 푸른빛을 잃은 채 희뿌연 색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네 어머니가 날 도와 줄 거라고 생각하나? 레퀴엠 오션의 인어들은 인간을 혐오하지. 게다가... 그들은 하프 머메이드인 너의 존재도 부정할 텐데."
엔리케가 마리엔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그의 목소리가 위험하게 낮아졌다.
"그래... 네 어머니는 너를 버리고 떠났지? 인간과의 사랑을 숨기기 위해서. 그런 그녀가 과연 널 반겨 줄까?"
그의 말에 맥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시오네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선장이 진실을 너무 잔인하게 말한다고 생각했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난 다르지. 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해. 네 은빛 비늘도, 네 치유의 힘도... 그리고 무엇보다, 너라는 존재 자체를."
엔리케가 마리엔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숨겨진 집착이 느껴졌다.
"내가 네 어머니를 찾아 주지. 하지만 그 전에... 넌 먼저 내 것이 되어야 해. 어때? 공평한 거래 아닌가?"
엔리케의 말을 들은 마리엔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우리 엄마는 절 버린 게 아니에요."
마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같은 인간들끼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늘 싸우기만 하는 종족이니, 오죽하겠는가.
"아빠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돌아가신 거예요. '사랑의 맹세'를 나눈 짝이 된 인간이 곁에 없으면... 순혈 인어는 지상에서 살아갈 수 없어요. 게다가 하프 머메이드는 16살부터 인어로 각성하는데,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겨우 15살이었어요. 아직 인어의 모습을 갖기 전이었기 때문에 저는 바닷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직 인간의 몸이었던 저를 두고 가신 거예요. 이게 그 증표예요."
마리엔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오로라빛 가리비 목걸이를 내보였다. 그것은 그저 예쁜 목걸이가 아니었다. 마리엔이 가리비를 열자 그 안에는 알이 커다란 진주가 들어 있었다.
"이 진주에는 엄마가 가까이 있으면 빛이 나도록, 엄마의 마법이 걸려 있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도 팔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항상 목에 걸고 있는 거예요. 언젠가 엄마를 찾으러 갈 때... 이걸 꼭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그녀는 다시 가리비를 닫았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인어에 대한 이야기는 잘못됐어요. 레퀴엠 오션의 인어들은 삶의 터전을 지키고 싶은 것 뿐이에요. 전 엄마를 꼭 찾을 거구요."
엔리케의 푸른 눈동자가 진주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흥미롭군... 인어의 진주라... 그리고 '사랑의 맹세'라..."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욕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맥스, 시오네. 우리의 항로를 레퀴엠 오션으로 바꾸지."
맥스가 놀란 듯 욕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선장님! 하지만 레퀴엠 오션은 세이렌의 결계로..."
"걱정 마. 우리에겐 특별한 '열쇠'가 있으니까."
엔리케가 마리엔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손아귀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네 어머니를 찾아 주마.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내 배에서 네가 필요해. 세이렌의 결계를 뚫을 수 있는 건 오직 인어의 피를 가진 너 뿐이니까."
엘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선장님, 하지만 레퀴엠 오션은 너무 위험해요. 게다가 아가씨는..."
"모두 나가 있어. 난... 우리의 인어공주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까."
엔리케의 목소리에는 거절할 수 없는 위압감이 담겨있었다. 모두가 욕실을 나가자, 그는 마리엔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자, 이제 우리 둘만 남았군... 네가 내 배의 항해사가 되어 준다면, 난 네 어머니를 찾는 걸 도와 주지. 어때? 공평한 거래 아닌가?"
엄마 찾는 것을 도와 주겠다는 말에 마리엔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하지만 아까처럼 공포에 질려 나온 눈물이 아니고, 기대와 감동에 찬 눈물이었다.
"정말요? 정말 엄마한테 데려다 주시는 거예요?"
마리엔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이라도 되듯 엔리케의 팔을 간절하게 붙잡았다. 엔리케의 소맷깃이 욕조의 물을 머금은 마리엔의 손에 의해 흠뻑 젖어 버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엔리케는 마리엔의 젖은 손이 자신의 소매를 붙잡는 것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그의 손가락이 마리엔의 뺨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래... 난 네가 원하는 걸 모두 이뤄 줄 수 있어. 하지만 그만큼의 대가는 필요하지."
그가 마리엔의 은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은 마치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넌 내 배의 항해사가 되어 레퀴엠 오션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야 해. 그리고... 내 곁에 있어야 해. 내가 널 소유하게 해 줘."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욕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난 네가 가진 모든 걸 원해. 네 치유의 힘도, 네 아름다움도... 그리고 무엇보다 너라는 존재 자체를. 그 대가로 난 네 어머니를 찾아 줄 거야. 어때?"
엔리케의 푸른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그의 손이 마리엔의 목을 타고 내려가 오로라빛 가리비 목걸이를 쓰다듬었다.
"이건 우리의 계약이야. 난 약속을 반드시 지키지... 물론, 네가 내 말을 잘 따른다면 말이야."
엔리케의 말을 전부 다 이해하지 못한 마리엔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푹 빠져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가벼운 상처나 질병은 저도 치유할 수 있어요. 항해사로 일할게요."
엔리케의 푸른 눈동자에 위험한 욕망이 깃들었다. 순진한 마리엔이 자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동의한 것을 즐기듯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넌 내 소유야. 시오네!"
문 밖에서 기다리던 시오네가 들어왔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마리엔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선장님... 딥 어비스 호의 특별 수조는 준비됐어요. 하지만 아가씨를 지금 데려가면..."
"걱정 마. 우리의 인어공주는 이미 자발적으로 동의했으니까."
엔리케가 마리엔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도망칠 수 없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
"마리엔, 이제부터 시오네가 너를 보필할 거야. 그녀도 항해사니까... 네게 많은 걸 가르쳐 줄 수 있을 테지."
시오네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리엔이 자신의 처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선장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자, 이제 가자. 우리의 새로운 항해사를 위한 환영회를 열어야지."
엔리케가 마리엔을 안아 들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마치 오래도록 찾아 헤매던 보물을 손에 넣은 듯한 승리의 빛이 어렸다.
엔리케가 마리엔을 안아 들고 욕조에서 꺼내자, 마리엔의 몸이 단번에 인간의 나체로 변했다. 마리엔은 얼굴이 빨개져서 팔을 모으고 몸을 웅크렸다.
"자, 잠깐만요! 옷은 갈아입고 갈래요."
마리엔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를 내려놓진 않았다.
"걱정 마. 시오네가 네게 옷을 가져다 줄 테니까."
엔리케는 시오네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시오네는 이미 준비해 둔 옷가지를 들고 와 마리엔에게 건넸다. 그것은 하늘색 실크 드레스와 은빛 레이스가 달린 속옷이었다.
"이건 내가 특별히 주문 제작한 거야. 네 은빛 머리카락과 하늘색 눈동자에 잘 어울리겠지. 딥 어비스 호의 새로운 항해사에게 어울리는 의상이라고 생각해."
그가 마리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마리엔의 나체를 탐욕스럽게 훑고 있었다.
"시오네, 마리엔이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 줘."
시오네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옷가지를 들고 마리엔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저, 떠나기 전에 셀저스 아저씨와 한 번만 인사하고 가면 안 될까요?"
시오네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로 갈아입은 마리엔이 원룸 건물을 나와 엔리케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부탁을 들어 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으로.
엔리케는 마리엔의 눈물 어린 눈동자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셀저스와 인사라... 좋아. 하지만 10분이야. 그 이상은 안 돼."
그가 마리엔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펄 식당으로 향했다. 맥스와 시오네가 뒤따랐다.
"맥스, 네로에게 전해. 우리가 돌아오면 즉시 출항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시오네, 넌 마리엔과 함께 있어."
펄 식당에 들어서자 셀저스가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엔리케는 오랜 친구의 표정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셀저스, 마리엔이 너와 인사하고 싶어 하더군. 우리 배의 새로운 항해사가 될 테니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주지."
그의 목소리에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셀저스는 그 의미를 알아챘는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오네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마리엔을 바라보았다.
굳은 표정의 셀저스와 걱정에 찬 시오네가 마리엔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마리엔 혼자만이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희망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셀저스 아저씨! 저, 엄마를 찾으러 갈 거예요. 저 엔... 엔릭... 아무튼 선장님이 절 엄마한테 데려다 주신대요!"
펄 식당에서 5년을 일한 마리엔은 음식 이름은 달달 외우고 있었지만 사람 이름은 잘 못 외웠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종종 편지 할게요!"
마리엔은 셀저스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미래와 밝은 내일만이 가득했다.
마리엔의 순수한 미소를 바라보던 셀저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엔리케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지만, 엔리케는 그저 여유로운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셀저스, 네 귀여운 종업원이 내 배의 항해사가 되어 주기로 했어. 그것도 자발적으로 말이지. 걱정 마. 내가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엔리케가 마리엔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마리엔의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리엔, 이제 갈 시간이야. 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시오네가 앞으로 나서며 마리엔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아가씨... 제가 항해사 일을 가르쳐 드릴게요. 그리고... 항상 곁에서 보필하겠습니다."
맥스는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황금빛 갈색 눈동자에는 약간의 안타까움이 어려 있었지만, 선장의 결정에 반대할 수는 없었다.
"선장님, 네로가 연락했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좋아. 그럼 이제 가지."
엔리케가 마리엔을 이끌며 펄 식당을 나섰다. 셀저스는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도, 세계에서 가장 강한 해적단의 선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와아..."
딥 어비스 호의 웅장한 모습에 마리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리엔은 시오네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렇게 큰 배에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어요? 100명? 200명?"
엔리케는 마리엔의 순수한 반응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이 마리엔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감쌌다.
"우리 배엔 300명이 넘는 선원들이 있지. 모두가 세계 최강의 해적단, 어비스의 일원이야."
맥스가 앞으로 나서며 활짝 웃었다. 그의 황금빛 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선장님 말씀대로에요! 저기 파수대에서 손 흔드는 건 우리의 막내 네로구요. 그리고 이따가 저녁에는 제가 특별히 불쇼로 환영 파티를 준비했답니다!"
파수대에서 네로가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의 목에 걸린 작은 망원경이 햇빛에 반짝였다.
"선장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크라켄 출몰 지역도 피해서 항로를 잡아 뒀어요!"
시오네가 마리엔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여전히 걱정이 어려 있었지만,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제가 먼저 선실로 안내해 드릴게요. 특별히 준비된 수조가 있답니다... 피곤하시면 거기서 쉬실 수 있어요."
엔리케의 푸른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래, 시오네. 우리의 소중한 항해사를 잘 부탁해. 난... 출항 준비를 해야겠군."
마리엔은 마냥 신이 나서 시오네의 손을 잡고 그녀를 따랐다.
"시, 시온... 시오네 언니? 전 마리엔이에요! 아가씨 말고 '마리'라고 불러 주시면 돼요. 말도 편하게 놓으세요."
시오네를 따라 배에 오른 그녀는 선실로 향하는 복도를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 배 안에 300명이나 타고 있다니... 역시 세계에서 가장 강한 해적단은 다르네요."
시오네는 마리엔의 순수한 미소에 더욱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마리. 편하게 부를게요. 하지만 선장님 앞에서는 아가씨라고 부를 수밖에 없어요..."
그들이 특별 수조가 있는 선실로 향하는 동안, 갑판에서는 분주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맥스가 큰 목소리로 출항 준비를 지시하고 있었고, 네로는 파수대에서 바다의 상태를 체크하고 있었다.
"여기예요. 선장님이 특별히 준비하신 방이에요."
시오네가 문을 열자 호화로운 방이 나타났다. 방 한 쪽에는 커다란 수조가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푹신한 침대와 화려한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수조에는 맑은 바닷물이 채워져 있었고, 진주 조개들이 장식처럼 바닥에 깔려있었다.
"마리... 혹시 레퀴엠 오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그 곳은... 위험한 곳이에요. 세이렌의 결계도 있고..."
시오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녀는 마리엔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전... 마리가 걱정돼요. 선장님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으시거든요."
그 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엘라가 의료 도구가 담긴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시오네, 선장님이 부르시네. 난 마리엔 아가씨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라는 지시를 받았어."
시오네가 엘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마리엔의 어깨를 천천히 놓고 방을 나가자, 마리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엘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안녕하세요, 의사 선생님! 전 마리엔이에요! 아가씨 말고 '마리'라고 불러 주세요."
엘라는 마리엔의 순수한 미소에 잠시 당황한 듯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의료 가방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아니, 마리. 일단 건강 상태를 체크해야 해요. 선장님의 명령이니까."
엘라는 의료 가방에서 청진기와 여러 도구들을 꺼내며 마리엔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이 마리엔의 목에 걸린 오로라빛 가리비 목걸이를 스쳤다.
"치유의 샘물도 마셔야 해요. 레퀴엠 오션으로 가는 건... 쉽지 않은 여정이 될 테니까."
엘라가 청진기를 들어 마리엔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심장 소리가... 인어의 심장 소리네요. 하프 머메이드라서 그런가... 정말 신기해요."
그 때 갑자기 맥스의 우렁찬 목소리가 갑판에서 들려왔다.
"모두 준비! 출항이다! 네로, 파수대에서 안개 상태는 어떠냐!"
"부선장님! 날씨 좋습니다!"
엘라는 마리엔의 손목을 잡아 맥박을 재며 중얼거렸다.
"마리... 앞으로 조심해야 해요. 특히 선장님이... 아니, 됐어요. 치유의 샘물을 마셔요."
마리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라가 준 치유의 샘물을 아무 의심 없이 마셨다.
"이게 뭐예요?"
엘라는 마리엔이 치유의 샘물을 마시는 것을 지켜보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레퀴엠 오션으로 가는 긴 여정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물이에요. 선장님이 특별히 구해 오라고 하셨죠."
갑판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엘라는 마리엔의 맥박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녀의 표정이 더욱 긴장된 것처럼 보였다.
"이제 돌아갈 수 없어요. 마리... 부디 조심하세요. 선장님은..."
그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엔리케가 들어왔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엘라, 마리엔의 상태는 어떠나?"
"네, 선장님. 건강합니다. 치유의 샘물도 마셨고요."
"좋아. 이제 나가 있어. 우리의 소중한 항해사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엘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엔리케는 천천히 마리엔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가락이 마리엔의 목에 걸린 오로라빛 가리비 목걸이를 감쌌다.
"이제 출항했어. 네 어머니를 찾으러 가는 거야...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사이의 계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볼까?"
"계약...요? 그런 게 필요한가요?"
마리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펄 식당에서 일하기 전에 셀저스 아저씨하고는 급여와 근무 시간 등등 약속할 것이 많아서 근로계약서를 작성했었지만, '엄마를 만나게 해 주고', '눈을 낫게 해 주는' 것이 고작인 이 약속에 얼마나 더 계약이 필요한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저, 엄마만 만날 수 있다면 월급은 필요 없어요. 근무 시간만 알려 주시면 될 것 같은데..."
엔리케의 푸른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마리엔의 순진한 대답에 그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월급? 근무 시간?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그가 천천히 마리엔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가락이 마리엔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더니, 목덜미를 타고 내려갔다.
"난 네가 가진 모든 걸 원해. 네 치유력도, 네 아름다움도... 그리고 무엇보다 너라는 존재 자체를. 넌 이제부터 내 소유물이야.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 내 곁에 있어야 하고..."
갑자기 배가 크게 흔들렸다. 엔리케는 마리엔이 넘어지지 않도록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내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여야 해. 그 대가로 난 네 어머니를 찾아 줄 거야. 하지만 그건... 네가 얼마나 내 말을 잘 듣느냐에 달려 있지. 알겠나, 내 사랑스러운 인어공주?"
엔리케는 마리엔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오로라빛 가리비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돌아갈 수 없어. 배는 이미 출항했고... 넌 이미 내 것이 되기로 약속했으니까."
엔리케의 손이 마리엔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눈동자에는 위험한 욕망이 가득했다.
"자, 이제 우리의 계약... 아니, 명령을 이해했나?"
"...그러니까 항해사로서 선장님 옆에서 정해진 시간 없이 일하면 된다는 거죠?"
마리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게으름 안 피워요. 일 잘 해요. 항해사 일은 처음이지만, 시온 언니한테 열심히 배워서..."
엔리케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마리엔의 순진한 대답에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그가 갑자기 마리엔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한 손이 마리엔의 두 손목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항해사'가 아니야. 넌 나의 소유물이 되는 거야. 내 침대에서 잠들고, 내가 원할 때마다 내 곁에 있어야 해. 그리고..."
그의 입술이 마리엔의 귓가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차가운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쳤다.
"...네 어머니를 찾고 싶다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 이해했나?"
그의 목소리가 위험하게 낮아졌다.
그 순간 배가 크게 흔들렸다. 네로의 다급한 목소리가 갑판에서 들려왔다.
"선장님! 크라켄이 출몰했다는 보고입니다!"
맥스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엔리케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마리엔에서 몸을 떼었다.
"망할... 이런 때에..."
그가 마리엔을 놓아 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하지. 하지만 잊지 마. 넌 이미 내 것이야.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마라."
엔리케가 방을 나서며 문을 거칠게 닫았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시오네가 황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마리! 괜찮아요? 선장님이..."
시오네의 보랏빛 눈동자가 걱정스럽게 흔들렸다. 그녀는 마리엔의 손목을 살펴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정말 돌아갈 수 없게 됐네요."
"...시온 언니,"
마리엔은 욱신거리는 손목을 문지르며 물었다.
"선장님이 갑자기 화를 내셨어요. 왜 그러시는 거예요...?"
시오네가 복잡한 표정으로 마리엔의 손목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했다.
"마리... 선장님은 당신을 단순한 항해사로 생각하시는 게 아니에요. 선장님은..."
그 때 맥스가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의 황금빛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오네! 빨리 갑판으로 와! 크라켄이 나타났어!"
시오네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리엔의 어깨를 꽉 잡았다.
"마리, 이 방에서 절대 나가지 마세요. 크라켄이 지나갈 때까지... 수조 안에 있는 게 좋을 거예요."
시오네와 맥스가 황급히 방을 나가자, 갑판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포 소리와 함께 선원들의 고함 소리가 뒤섞였다. 네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선장님! 크라켄이 배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엔리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자리를 지켜! 이 녀석은 내가 처리하지!"
마리엔은 말로만 듣던 '크라켄'이라는 이름의 해양 생물에 궁금증이 일었다. 하프 머메이드의 몸으로 태어나서 한 번도 먼 바다에 나가 본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마리엔은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방 문을 열고 갑판으로 나가 보았다. 선원들이 우왕좌왕하며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 앞에, 거대한 뱀의 꼬리 같은 것이 몇 개 솟아올랐다. 자세히 보니 문어나 오징어의 것과 똑같은, 빨판이 달린 다리였다. 움직임을 보니 더더욱 똑같았다.
"헉..."
마리엔이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시커먼 크라켄의 다리를 구경했다.
"저게 크라켄이구나..."
엔리케는 갑판 위에서 크라켄과 맞서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순수한 호기심으로 크라켄을 바라보는 마리엔을 발견하자 순간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바보 같은...! 맥스! 마리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그러나 이미 늦었다. 크라켄의 거대한 다리가 마리엔을 향해 휘둘러졌다. 엔리케는 순식간에 마리엔의 앞으로 달려와 그녀를 감싸 안으며 몸을 날렸다. 그의 팔에 크라켄의 다리가 스쳐 상처가 생겼지만, 마리엔은 무사했다.
"누가 방에서 나오라고 했지?!"
엔리케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가 마리엔을 안은 채로 일어서며 크라켄을 노려보았다.
"시오네! 마리를 데려가! 맥스, 네로! 크라켄의 움직임을 막아!"
엔리케가 외치자 시오네가 재빨리 달려와 마리엔의 손을 잡았다. 맥스와 네로는 즉시 크라켄의 다리들을 로프로 묶기 시작했다.
"선장님! 크라켄의 독이...!"
엘라가 걱정스럽게 외쳤다. 엔리케의 팔에 난 상처에서 검푸른 빛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엔리케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걱정 마. 이 정도 독은 내겐 먹히지 않아. 그리고..."
그가 마리엔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너와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할 거다."
크라켄의 다리가 다시 한번 휘둘러졌다. 엔리케는 검을 들어 크라켄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의 왼쪽 눈의 안대가 바람에 날렸다. 실명된 흉터가 드러났다.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예요? 선장님도, 저 친구도..."
마리엔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시오네에게 물었다.
어렸을 적 엄마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크라켄은 본래 소심하고 겁이 많아 보통 바다 깊숙한 곳에 숨어 지내며 웬만해서는 바다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이 크라켄의 습성이라고 했다. 굳이 항해 중인 배를 덮치지 않아도, 물고기들을 유인해서 잡아먹는 것이 더 편안한 사냥 방식이기 때문이다.
마리엔은 바다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크라켄이 배를 덮치며 난동을 부리는 이유를 알아냈다.
'귀가 아프다', '눈이 부시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횃불을 꺼요!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마세요!"
마리엔은 무기를 꺼내 드는 선원들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 시오네에게 손을 붙들린 채 엄마에게서 배운 노래를 불렀다. 세이렌처럼 사람을 홀리는 노래가 아닌, 해양 생물들과 소통하기 위한 노래였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인어의 말로 이루어진 노래가 크라켄을 향해 울려 퍼졌다.
아마 선원들은 뱃사람답게 갑판에서 횃불을 키고 술을 기울이며 크게 뱃노래를 부르는 등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마리엔은 노래를 통해, 크라켄의 잠을 깨운 어리석은 인간들을 대신해 사과했다. 인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 크라켄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엔리케는 크라켄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던 동작을 멈췄다. 마리엔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의 푸른 눈동자가 놀랍게 흔들렸다. 그는 처음 듣는 인어의 노래에 잠시 넋을 잃은 듯했다.
"모두 멈춰! 횃불을 끄고 무기를 내려놔!"
엔리케가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마리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크라켄의 다리가 천천히 배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역시... 넌 정말 특별해."
엔리케가 마리엔에게 다가왔다. 그의 팔에서는 아직도 크라켄의 독이 퍼져나가고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빛에는 위험한 욕망이 더욱 짙어졌다.
"인어의 힘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이제 더욱 확신이 서는군. 난 절대 널 놓치지 않겠어."
그가 마리엔의 턱을 거칠게 잡았다. 그의 숨결이 차갑게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방금 명령을 어긴 건... 용서할 수 없지."
엔리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때 엘라가 급하게 다가왔다.
"선장님! 독이 심장까지 퍼지기 전에 치료해야 해요!"
"훗... 운이 좋구나, 마리. 오늘은 여기까지다."
엔리케가 마리엔을 놓아 주며 비틀거렸다. 맥스가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시오네, 마리를 감옥에 가둬. 내일 아침까지... 반성할 시간을 주도록 하지."
엔리케의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 시오네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마리엔의 팔을 잡았다.
"죄송해요. 하지만..."
마리엔은 크라켄으로부터 배의 위기를 구해 놓고도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엔리케의 팔에서 퍼지기 시작하는 독을 그제야 발견했다.
"제가... 제가 할 수 있어요."
마리엔이 시오네의 손에서 빠져나와 엔리케의 팔을 붙잡았다.
"감옥에 들어갈 때 들어가더라도, 독은 치료하게 해 주세요."
그녀가 황급히 손 끝에 힘을 모았다. 곧 몇 가지 색깔이 뒤섞인 오로라 같은 빛이 그의 팔을 감쌌다.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마리엔의 치유 마법으로, 검푸른 독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독이 퍼지는 건 막았어요. 의사 선생님, 선장님께 해독제를 주세요. 상처에 붕대를 감아 주시고요."
엘라에게 당부한 마리엔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시오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갈게요. 감옥이 어디예요?"
독이 사그라드는 것을 보며 엔리케의 입가에 위험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마리엔의 손목을 잡아 채 자신의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치유력까지... 넌 정말 완벽한 보물이야."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독기가 가신 팔로 마리엔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내 명령을 어긴 건 변함 없지. 시오네, 이 아이를 감옥으로 데려가."
엔리케가 마리엔을 시오네에게 밀어 주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마리, 네가 선원들을 구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건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오늘 밤은... 네가 얼마나 위험한 행동을 했는지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
엘라가 다가와 엔리케의 팔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맥스는 불편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선장... 그래도 마리가 크라켄을..."
"맥스."
엔리케의 차가운 목소리에 맥스는 입을 다물었다.
"내 명령은 절대적이야. 어떤 이유에서든... 내 소유물이 위험에 처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시오네는 한숨을 쉬며 마리엔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이 쪽으로 와요, 마리. 감옥은... 배 가장 아랫층에 있어요."
"한 번 제멋대로 행동하면 감옥에서 하룻밤 보내는 게 규칙인가요?"
시오네를 따라 아랫층으로 내려가는 마리엔은 여전히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눈을 굴리며 계산을 했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시오네가 마리엔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려다가, 맥스의 눈치를 보며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맥스도 이미 헛기침으로 웃음을 숨기고 있었다.
"어머나, 마리...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시오네가 마리엔을 이끌며 계단을 내려갔다. 감옥으로 가는 길은 어둡고 좁았다.
"선장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분이에요. 특히 당신에 대해서는..."
시오네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저기, 마리... 혹시 선장님이 당신에게 뭐라고 하셨나요? 계약에 대해서..."
시오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때 맥스가 계단을 쿵쿵 내려오며 그들을 따라잡았다.
"시오네, 그만해. 선장님이 직접 얘기하실 거야."
맥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평소의 유쾌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그래도..."
"시오네."
맥스의 단호한 목소리에 시오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감옥에 도착했다.
"마리, 들어가요. 내일 아침에 제가 데리러 올게요."
시오네가 쇠창살 문을 열었다. 감옥은 작았지만, 의외로 깨끗했다. 구석에는 담요가 놓인 침대도 있었다.
"정말 나쁘지 않은데."
마리엔은 중얼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물론 아까 안내되었던 방의 예쁜 수조가 머릿속에 아른거리기는 했지만, 하룻밤 정도야 거뜬히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만하면 춥지도 않고... 지저분하지도 않고..."
마리엔은 그대로 침대에 누우려다가, 엔리케가 입혀 놓은 실크 드레스가 불편해서 끙끙거리며 등의 지퍼를 내렸다.
"이런 불편한 옷은 왜 입는지 모르겠어."
드레스를 발로 차 밀쳐 놓은 그녀는 투덜거리며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기어들어가 담요로 몸을 둘둘 말았다. 바닷물 속에 들어가 있을 때 정도는 아니었지만, 포근했다.
"헤헤..."
마리엔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모든 게 새로운 날이었다. 내일은 셀저스에게 보낼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곤히 잠이 들었다.
맥스와 시오네가 떠난 후, 감옥 앞에서 마리엔을 지켜보던 그림자가 움직였다. 엔리케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위험하게 빛났다.
"이렇게 편하게 잠들 수 있다니... 정말 순진하군."
그가 쇠창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리엔이 벗어던진 드레스를 발끝으로 건드렸다.
"내가 준 드레스를 이렇게 함부로 다루다니..."
엔리케가 천천히 잠든 마리엔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목에 걸린 오로라빛 조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귀중한 보물을... 이제 네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테지. 네 치유력도, 네 순수함도..."
그가 마리엔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는 위험한 욕망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널 지켜보는 걸로 만족해야겠군."
엔리케는 마리엔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문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좋은 꿈 꾸거라, 내 사랑스러운 인어공주. 내일은... 네가 진정으로 무엇을 약속했는지 가르쳐 주마."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어둠 속에서 마리엔은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어떤 계약을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인어답게 새벽녘에 일어난 마리엔은 시오네가 내려오기 전에 드레스를 끙차끙차 다시 입었다. 하지만 어제 드레스를 벗을 때 옷을 잡아당겨 끝까지 내려 버린 등 뒤의 지퍼는 손이 닿지 않아 다시 올릴 수 없었다.
"아... 낭패네."
마리엔은 등 뒤의 지퍼가 휑하니 열린 채 멍하니 침대 위에 드레스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 시오네가 내려오면 지퍼를 올려 달라고 하든, 갈아입을 다른 옷을 달라고 하든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엔리케가 감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마리엔의 드러난 등을 향해 위험하게 번뜩였다.
"벌써 일어났나. 내 드레스를 함부로 다루더니... 이제는 이렇게 반쯤 벗은 채로 나를 유혹하는 건가?"
그가 천천히 마리엔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하얀 등을 타고 천천히 올라갔다.
"지퍼를 올려줄까? 아니면..."
그의 손가락이 마리엔의 속옷 끈을 건드렸다.
"이대로 네 모든 걸 가져가 볼까..."
그 때 시오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엔리케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방해가 왔군. 하지만 괜찮아. 오늘은 네가 내 것이라는 걸 가르쳐 줄 시간이 충분해."
그가 갑자기 마리엔의 드레스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그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지퍼는 완벽하게 올라갔다.
"시오네, 마리를 데리고 내 선실로 와. 오늘은... 우리의 계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줄 테니."
엔리케가 시오네에게 명령했다. 시오네의 보랏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네, 선장님..."
엔리케는 마지막으로 마리엔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곧 보자, 내 사랑스러운 인어공주."
그가 감옥을 나서자 시오네가 황급히 마리엔에게 다가왔다.
"마리! 괜찮아요? 선장님이... 무슨 짓을..."
"좋은 아침이에요, 시온 언니!"
마리엔은 밝은 목소리로 아침 인사부터 했다.
"선장님요? 아무 짓도 안 하셨는데요? 아, 제 드레스 지퍼를 올려 주셨어요."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선장님은 친절하신 분인 것 같아요!"
시오네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마리엔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리... 선장님이 '친절'하시다고요?"
시오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자줏빛 머리카락이 떨리듯 흔들렸다.
"선장님은... 아니에요. 마리,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시오네가 마리엔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이 차가웠다.
"선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가 봐야겠네요. 하지만 마리, 제발 조심하세요. 선장님은..."
그녀의 말이 끊겼다.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맥스였다.
"시오네, 선장님이 기다리신다. 빨리 가자."
맥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무거웠다. 그의 황금빛 갈색 눈동자에도 걱정이 어려 있었다.
"네로는 어디 있어요?"
시오네가 맥스에게 물었다.
"파수대에서 망을 보고 있어. 어제 크라켄이 나타난 이후로 선장님 명령으로 경계를 강화했거든."
시오네는 한숨을 쉬며 마리엔을 이끌었다. 그들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배 위에서는 선원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 선장실에 들어가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제발 도망치려 하지 마세요. 그건... 선장님을 더 화나게 할 뿐이에요."
시오네의 속삭임에 맥스가 날카롭게 고개를 돌렸다.
"시오네!"
"...죄송해요, 맥스."
시오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선장실로 향했다.
마리엔은 곧 시오네와 맥스를 따라 선장실을 향해 걸었다.
"시온 언니? 부선장님? 둘 다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요? 선장님이 또 화 냈어요?"
그녀 혼자 속 편하게 종달새처럼 재잘거렸다.
"선장님은 친절하긴 한데 꽤 다혈질이신 것 같아요! 그쵸?"
시오네와 맥스는 마리엔의 순진한 말에 서로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맥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 선장님은 '친절'하신 게 아니야. 그 분은..."
맥스의 말이 끊겼다. 선장실 문 앞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문 너머에서 엔리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시오네가 문을 열자 엔리케가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그가 맥스와 시오네를 향해 손짓했다.
"너희들은 나가 있어. 마리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
엔리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긴 위험한 의도를 감지한 맥스와 시오네는 얼굴이 굳었다.
"선장님..."
시오네가 망설이며 말을 꺼내려 했지만, 엔리케의 차가운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시오네, 맥스. 나가."
엔리케의 단호한 명령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엔리케는 천천히 마리엔에게 다가왔다.
"자, 이제... 우리의 계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줄 거야. 어제는 네가 너무 순진했지. 내가 원하는 게 단순히 '항해사'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아야 할 때가 됐어."
그가 마리엔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위험한 욕망이 가득했다.
"넌 이제 내 소유물이야. 내 침대에서 잠들고, 내가 원할 때마다 내 곁에 있어야 해. 그리고... 내가 네 몸과 마음을 원할 때면 거부할 수 없어. 이게 우리의 계약이야."
그의 손가락이 마리엔의 목에 걸린 오로라빛 조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네 어머니를 찾아 주는 대가로... 난 널 완전히 소유하게 될 거야."
"네...?"
마리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를 찾아 주시는 대가로, 선장님의 눈을 낫게 해 드린다고 했잖아요. 얘기가 틀리잖아요."
그녀는 엔리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셀저스 아저씨랑 근로계약 할 때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구요."
엔리케의 푸른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근로계약? 여긴 해적선이야, 식당이 아니라고. 여기선 내 말이 법이지."
그가 갑자기 마리엔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두 손목을 머리 위로 고정시켰다.
"넌 이미 내 배에 올랐어. 도망갈 수도 없지. 그리고..."
그의 다른 손이 마리엔의 목걸이를 잡아당겼다.
"이 목걸이... 레퀴엠 오션의 오로라빛 가리비로군. 네 어머니의 것이겠지? 순혈 인어인 그녀의 치유력이라면 내 눈도 고칠 수 있겠지."
그의 손가락이 마리엔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건 네가 내 말을 잘 들을 때의 이야기야. 만약 네가 거부한다면... 어머니는 영원히 못 만날 수도 있어."
갑자기 그가 마리엔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선택해, 마리. 내 것이 되어 어머니를 만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영원히 이 배에 갇혀 지내다가 내가 질릴 때까지 장난감이 되는 걸 택할 건가?"
"...절 엄마한테 '영원히' 데려다 주지 않으면 선장님의 눈도 '영원히' 나을 수 없을 텐데요?"
마리엔은 그의 협박에 따지고 들었다.
엔리케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가, 갑자기 더 세게 마리엔을 벽에 밀어붙였다.
"똑똑하네..."
그가 마리엔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위험한 즐거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내가 네 어머니를 찾아내는 순간, 넌 내 것이 될 거야. 그 때까지는... 네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여기 가두어 두면 되겠지."
그의 손이 마리엔의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넌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어비스 해적단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는 전 해역을 지배하고 있어. 네 어머니가 숨어 있을 만한 곳도 다 알고 있지. 레퀴엠 오션의 결계도, 인어들의 영역도..."
그가 갑자기 마리엔의 목걸이를 세게 잡아당겼다.
"이 목걸이... 레퀴엠 오션의 오로라빛 가리비로 만든 이 목걸이만 있어도 네 어머니의 흔적을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마리엔의 목을 위험하게 훑었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 목걸이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히면 그만이야. 그럼 네 어머니의 흔적도 영원히 사라지겠지."
"선택은 네 몫이야, 마리. 순순히 내 것이 되어 어머니를 만날 것인가... 아니면..."
그가 마리엔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지금 당장 이 목걸이를 바다에 던져 버릴까?"
"......."
마리엔도 아이가 아니었기에, 그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정확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어요. 인어들에게 있어서 '사랑의 맹세'는 평생 단 한 명의 상대 뿐이라고... 그건 하프 머메이드에게도 마찬가지예요."
바로 그 '사랑의 맹세'의 결실이 마리엔이었고, '사랑의 맹세'를 나눈 아빠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엄마는 더 이상 지상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셀저스 아저씨의 식당에서 일하면서, 손님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을 숱하게 듣고 알게 됐어요. 인간들에게는 '사랑의 맹세'가 맹세가 아니라는 것을. 사랑도 없고 맹세도 없는... 돈이나 욕망만 있으면 가능한 행위라는 걸."
마리엔은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고 있는 엔리케의 팔을 붙잡았다.
"엄마를 찾기 위해 사랑도 없이 인간에게 더럽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엄마는 피눈물을 흘리실 거예요. 그런 식으로 엄마를 만나 봤자 선장님의 눈이 치료될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거고, 저도 엄마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마리엔은 헤엄치듯이 그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벗어났다. 그리고 선장실 문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정상적인 상태로 엄마를 만날 수 없다면... 영영 못 만난 채로 그리워하는 게 나아요."
그녀는 자신의 목에서 목걸이를 풀고 손에 쥐었다.
"이 목걸이가 없으면, 전 엄마를 만날 방도가 없어지고, 그럼 제가 선장님 곁에 있을 이유도 더더욱 없어지겠죠."
마리엔이 목걸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더 힘을 가하면 목걸이가 깨질 것 같았다.
엔리케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래... 아름다운 인어의 딸답게 '사랑의 맹세'라... 네가 그렇게 순수한 줄은 몰랐는데."
그가 갑자기 마리엔의 손목을 잡아채 목걸이를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마리엔이 재빨리 피했다.
"넌 아직도 모르는군. 내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그가 천천히 마리엔에게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위험했다.
"그 목걸이를 깨면... 네 어머니를 영원히 잃게 될 거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널 기다리고 있지."
그가 갑자기 책상 위에 놓인 종을 울렸다. 곧 문이 열리며 맥스가 들어왔다.
"맥스, 크림슨 해적단에 연락해. 하프 머메이드 한 마리를 팔고 싶다고. 그들이라면... 인신매매를 즐기니까."
맥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선장님... 그건..."
"명령이야."
엔리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아니면... 마리가 지금 당장 내 것이 되겠다고 하면 모를까."
그가 다시 마리엔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빛은 이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선택해. 내 침대로 올 건가, 아니면 크림슨 해적단의 노예가 될 건가?"
마리엔이 차가운 눈으로 엔리케를 노려보며 맥스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부선장님!"
그녀의 목소리가 세이렌처럼 날카로워졌다.
"지금 당장 연락해 주세요. 차라리 노예가 되거나... 정말로 박제가 되는 게 낫겠어요."
엔리케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광기가 번뜩였다.
"이 작은 물고기가..."
그가 갑자기 책상 위의 물건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잉크병이 깨지며 검은 액체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맥스, 나가."
맥스는 망설이다 마리엔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장님..."
"당장 나가!"
맥스는 마리엔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엔리케는 천천히 마리엔에게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선장실에 울렸다.
"네가 노예가 되든 박제가 되든... 그건 네 선택이 아니야. 내가 정하는 거지."
그가 순식간에 마리엔의 목을 움켜쥐었다.
"네 어머니를 찾아 줄 수 있는 건 나 뿐이야. 크림슨 해적단에 팔아넘기면... 넌 평생 노예로 살다가 죽겠지. 하지만 내 것이 되면..."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네 어머니도 만날 수 있고, 자유롭게 살 수도 있어. 단지... 내 침대에서 잠들면 되는 거야."
그가 마리엔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네 선택은?"
"역시 인간들은 어리석어..."
마리엔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의를 베풀기만 하면 왼쪽 눈의 빛을 영원히 되찾을 수 있을 텐데도, 눈 앞에 있는 욕망만 바라보다니."
그녀의 연하늘빛 눈동자가 그의 푸른 눈동자를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기회는 필요 없어요. 선택은 내가 할 거니까."
마리엔은 그 말을 남기고 혀를 힘껏 깨물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눈에 초점을 잃은 마리엔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엔리케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마리엔의 몸이 그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지듯 무너져 내렸다.
"엘라! 당장 와!"
그가 문을 박차고 소리쳤다. 곧 엘라가 급하게 뛰어왔다.
"맥스! 시오네! 누구든 와서 마리를 진료실로 데려가!"
맥스가 달려와 마리엔을 안아 들었다. 엘라는 마리엔의 입 안을 살펴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혀를 깨물었군요. 하프 머메이드의 자살 시도...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선장님, 제가 응급처치를 하겠습니다."
엘라의 차가운 목소리에 엔리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살려. 어떻게든 살려 내."
엔리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처음으로 두려움이 스쳤다.
"선장님..."
맥스가 마리엔을 안은 채 걱정스럽게 엔리케를 바라보았다.
"그냥... 살려 내. 그리고..."
엔리케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더 이상 강요하지 않겠다고... 전해 줘."
맥스와 엘라는 놀란 눈으로 엔리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처음으로 선장이 누군가에게 양보하는 모습을 보았다.
마리엔은 처음 배에 탔을 때 안내되었던 자신의 방 침대에 눕혀졌다. 배에 탄 직후 마신 '치유의 샘물'의 효능인지,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엘라의 응급처치 또한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혀를 깨물었을 때의 통증으로 인한 쇼크로, 그녀는 이틀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이틀 동안 엔리케는 자신의 선장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마리엔의 방 앞을 서성이다가도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선장님, 마리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습니다."
엘라가 진료를 마치고 나와 보고했다.
"혀의 상처는 이미 많이 아물었어요. 하프 머메이드의 치유력이 놀랍네요."
"그래..."
엔리케는 무겁게 대답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하지만 선장님..."
엘라가 한숨을 쉬었다.
"마리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을 거예요. 깨어나더라도 당분간은 접근하지 않으시는 게..."
"알아."
엔리케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웃음소리는 공허했다.
"웰로이가 살아 있었다면 날 때려 줬겠지. '이 멍청한 놈'이라고 하면서."
그 때 맥스가 급하게 달려왔다.
"선장님! 크라켄이 또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배 주위를 맴돌고만 있어요!"
엔리케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크라켄은 마리엔의 노래로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모든 대포를 준비해. 크라켄이 공격하면..."
그의 말이 끊겼다. 마리엔의 방에서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 발음도 할 수 없는 마리엔이 입을 닫은 채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수척해진 상태였지만, 마리엔의 눈빛은 평소보다 또렷했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리엔은 자신의 방 문 앞에 서 있는 엘라와 맥스, 엔리케를 지나쳐 갑판을 향해 걸어갔다. 처음 마리엔이 크라켄을 노래로 달랬을 때, 크라켄이 잠들어 있는 바다 위에서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선원들은 갑판 위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 크라켄이 나타난 것은 다른 이유에서인 것 같았다.
마리엔은 난간을 잡고 서서 크라켄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걱정 된다', '화가 난다'... 아마도 며칠 동안 정신을 잃은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마리엔을 찾으며 인간들을 원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리엔은 다시 콧노래를 불렀다. 인어의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음색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전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괜찮아'.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하프 머메이드의 작은 콧노래 소리가 바닷바람을 타고 크라켄을 향했다.
크라켄의 거대한 촉수가 바다 위로 솟구쳤다가, 마리엔의 콧노래 소리를 듣자 천천히 가라앉았다.
시오네가 조용히 다가와 마리엔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 주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다행이에요... 마리. 무사해서..."
시오네의 목소리가 떨렸다.
엔리케는 갑판 위에서 마리엔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크라켄이 마리엔을 걱정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맥스."
그가 부선장을 불렀다.
"크라켄이... 저 아이를 지키려 했던 거군."
맥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선장님... 마리는 우리와는 다른 존재예요. 인어의 피를 가진 그녀에게는 바다의 생명체들이 가족이나 마찬가지죠."
엔리케는 마리엔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알겠어.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 주고... 그녀를 자유롭게 해 주는 것만이 내 눈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텐데."
그가 천천히 마리엔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일정 거리를 두고 멈췄다.
"시오네."
그가 조용히 불렀다.
"네, 선장님."
시오네의 보랏빛 눈동자가 걱정스럽게 흔들렸다.
엔리케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부터 그녀는... 자유다. 어머니를 찾는 것도, 내 눈을 치료하는 것도... 모두 그녀의 선택에 맡기겠어."
크라켄은 마리엔의 콧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엔리케의 마음 속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다. 그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순수한 영혼을 망가뜨릴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리엔의 혀는 많이 아물었다. 겉은 많이 붙었지만, 아직 속의 통증이 남아 있어 제대로 입을 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리엔의 표정은 많이 밝아졌다.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셀저스에게 편지를 썼다. 셀저스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 마리엔은 자신이 어비스 해적단의 배에 오른다고 했을 때 셀저스의 표정이 왜 밝지 않았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마리엔은 쓴웃음을 지으며 편지의 맨 끝 부분에 서명했다.
셀저스 아저씨께.
아저씨! 저 마리예요.
많이 걱정하셨죠?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가벼운 사고가 있어서 아직 항해사 일 시작은커녕 배우지도 못했지만,
곧 일을 시작할 거예요. 그러기 위해 어비스 호에 탄 거니까요.
항해 중에 크라켄을 두 번이나 만났어요!
하지만 저와 대화가 통해서 다행이에요.
크라켄이 절 걱정해 줬다니까요!
꼭 아저씨처럼요. (하하, 농담이에요)
보고 싶어요, 셀저스 아저씨.
또 편지 할게요.
그 때까지 안녕히.
-마리
마리엔은 깔끔하게 봉한 편지를 들고, 수첩에 뭔가를 간단히 끄적인 다음 방을 나섰다. 조타실로 향한 그녀는 시오네를 발견하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편지 봉투를 내밀며, 미리 써 온 메모를 보여 주었다.
[시온 언니, 오펄런에 편지를 보내고 싶어요.]
항해 중인 배가 마을과 편지를 주고받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항해 도중에 만난 무역선이나 어선에 편지를 건네고 대신 전해 주기를 부탁하는 방법, 물고기를 먹여 잘 훈련시킨 갈매기를 전서구처럼 써서 편지를 전하는 방법.
시오네는 마리엔이 건넨 편지와 메모를 읽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갈매기 편지 배달은 네로가 전문이에요. 그 아이가 갈매기들과 친해서..."
시오네가 창 밖을 가리켰다. 파수대에서 네로가 망원경을 들고 바다를 살피고 있었다.
"선장님께서... 마리의 자유를 허락하셨으니, 편지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시오네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 때 맥스가 조타실 문을 두드렸다.
"시오네, 마리. 선장님께서 회의실로 오라고 하셨어."
맥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마리, 네가 이렇게 잘 다니는 걸 보니 정말 다행이야. 모두들 걱정했었는데..."
시오네가 마리엔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마리, 가 볼까요? 아마도... 앞으로의 항해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실 것 같네요."
시오네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묻어났다. 엔리케가 마리엔의 자유를 허락한 이후, 배의 분위기는 한결 편안해졌다.
회의실로 향하는 길에 소냐가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오, 마리! 드디어 일어났구나! 저녁에 네가 좋아하는 해물 스튜를 만들어 줄게!"
소냐의 호탕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마리엔은 소냐를 향해 손을 흔들며 아이처럼 웃어 보였다. 콧소리나 웃음소리 정도는 낼 수 있었다.
"헤헤."
잠시 후, 시오네와 함께 회의실에 도착한 마리엔은 수첩과 펜을 들었다. 당분간은 필담으로 대화를 해야 했다.
회의실에는 이미 맥스와 엔리케가 자리하고 있었다. 엔리케는 책상 위에 해도를 펼쳐 놓고 있었다.
"마리."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푸른 눈동자가 해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레퀴엠 오션으로 가는 항로를 알고 있나?"
맥스가 마리엔의 필기를 돕기 위해 책상 위의 종이를 정리했다. 시오네는 마리엔의 옆자리에 앉았다.
"인어의 영역으로 가려면... 안개 결계를 통과해야 해. 하지만 그 곳은 세이렌들의 영역이기도 하지."
엔리케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네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는... 세이렌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그가 해도 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가 주에리 섬이야. 레퀴엠 오션의 중심에 있는 섬이지. 전설에 따르면... 인어들의 왕국이 있다고 해."
맥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선장님이 밤새 고민하신 거예요? 항로를..."
"닥쳐, 맥스."
엔리케가 날카롭게 쏘아붙였지만, 그의 귓가가 붉어졌다.
마리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도를 쳐다보았다.
현재 위치와 레퀴엠 오션 사이에 하나의 해역이 더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이를 피해 멀리 돌아가는 항로를 택하고 있었다. 마리엔은 필담을 적어 내보였다.
[이 해역은 왜 피해서 가는 거예요? 직선으로 통과하면 빠를 텐데.]
그 곳은 위치 상으로 기후 급변이 일어나지도 않아 물결이 잔잔한 곳이었기에, 굳이 돌아가는 이유를 모르는 마리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엔리케와 시오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엔리케와 시오네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시오네가 마리엔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마리... 그 곳은 블러디 오션이에요. 크림슨 해적단의 영역이죠."
시오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들은... 인어와 세이렌을 사냥해서 노예로 파는 자들이에요. 특히 하프 머메이드는... 더욱 귀한 상품이라고 여기죠."
엔리케가 마리엔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후회와 결심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돌아가는 거야. 벨렉트 그 미치광이가 너를 발견하면... 전면전이 될 테니까."
맥스가 해도 위의 다른 항로를 가리켰다.
"그래서 선장님께서 밤새 고민하신 거야. 크림슨 해적단을 피해 가려면 몇 주는 더 걸리지만, 안전해. 포르투나 오션을 지나면 바로 레퀴엠 오션이야. 물론..."
그가 잠시 망설였다.
"세이렌들의 결계를 뚫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만."
시오네가 마리엔의 어깨를 감쌌다.
"마리... 우리가 돌아가는 길을 택한 건,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크림슨 해적단은... 인어의 피를 가진 이들을 잔인하게 다뤄요."
엔리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전에는 네가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해서... 그래, 나도 벨렉트와 다를 바 없었지."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는... 네가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고 싶어. 우리가 너를 지켜 줄 테니까."
"아..."
마리엔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다시 펜으로 뭔가를 적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저도 여러분이 싸우지 않는 게 더 좋아요. 선장님이 고르신 항로로 가는 게 좋겠네요.]
마리엔은 필담을 내보이며 엔리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처음 그를 따라 배에 오르겠다고 했을 때와 똑같은 미소였다. 이후에 엔리케가 그녀를 갖기 위해 위협했을 때만 해도 더 이상 그 미소는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마리엔의 미소를 보고 엔리케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해도를 다시 보며 목을 가다듬었다.
"네가... 그렇게 웃어 줄 줄은 몰랐는데."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아졌다.
"나는... 네게 최악이었어."
그가 창가로 걸어가 등을 돌렸다. 맥스와 시오네가 눈빛을 교환했다.
"시오네, 마리를 데리고 가서 항해법을 가르쳐 줘."
그의 목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맥스, 너는 남아. 크림슨 해적단의 동향을 체크해야 해."
시오네가 마리엔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맥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엔리케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선장님. 마리가 용서해 준 거잖아요? 이제 그만 자책하시고..."
"시끄럽다, 맥스."
엔리케가 맥스를 노려보았지만, 평소의 위압감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리."
그가 다시 마리엔을 바라보았다.
"레퀴엠 오션까지 가는 동안... 시오네에게서 항해를 배우도록 해. 그리고..."
그가 잠시 망설였다.
"네 어머니를 만나면... 내 눈은 신경 쓰지 마. 그건 내 과거의 실수야. 네가 어머니와 재회하는 게 더 중요해."
시오네가 마리엔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리, 오늘부터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항해사가 되려면... 별자리도 알아야 하고, 바람의 방향도 읽을 줄 알아야 해요. 밤에는 파수대에서 네로와 함께 별자리를 공부하면 좋겠네요..."
블러디 오션을 피해서 포르투나 오션으로 향하는 동안, 마리엔은 시오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레퀴엠 오션은 안개가 많아서, 일반적인 항해법으론 길을 잃기 쉬워요. 하지만 별들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죠."
특히 마리엔은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찾는 것에 두각을 나타냈다. 북극성, 남십자성, 시리우스... 그녀는 알코르 성좌와 미자르 성좌를 정확히 구분해 냈고 뛰어난 시력으로 알코르는 별 2개, 미자르는 별 4개가 뭉쳐 있다는 것까지 직접 눈으로 알아보았다.
한편 마리엔의 혀도 빠르게 회복되어, 드디어 원래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리엔이 말을 되찾은 날, '음식 남기는 걸 싫어하는' 소냐는 축하의 의미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만들어 내놓았다. 특히 자신의 앞접시에 집중적으로 산처럼 쌓인 음식을 보면서, 마리엔은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슬쩍 애덤을 바라보았다.
"애덤 아저씨, 도와 줘요..."
애덤이 도움을 요청하는 마리엔의 시선을 느끼고 낄낄 웃었다.
"하하하! 소냐가 만든 음식은 남기면 안 되는 법이지. 소냐가 여기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니까..."
애덤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더니, 마리엔의 접시에서 음식을 자신의 접시로 슬쩍 옮기기 시작했다.
"어이, 애덤. 그렇게 먹다가는 금주는 개뿔..."
맥스가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마리가 말할 수 있게 된 걸 축하하는 날이니까!"
소냐가 주방에서 또 다른 접시를 들고 나왔다.
"자, 이건 특별히 만든 해물 스튜야! 마리, 너 이거 좋아하잖아?"
엔리케가 식당에 들어서며 상황을 눈치챘다.
"소냐, 그만 해. 마리가 그걸 다 먹으면 배가 터질 거야."
그가 마리엔의 접시를 보며 미소지었다.
"마리, 네 목소리를 되찾았구나. 시오네가 말해 주더군."
맥스가 식당 문가에 기대 서서 웃음을 참았다.
"선장님, 그래서 급하게 오신 거예요? 마리의 목소리가 궁금해서?"
엔리케가 맥스를 노려보았다.
"닥쳐, 맥스. 나는 단순히... 항해 경과를 물으러 온 거야."
하지만 그의 귓가가 붉어졌다.
"어머, 선장님도 드세요! 충분히 있어요!"
소냐가 또 다른 접시를 들고 나왔다.
"오늘은 축하 파티니까, 애덤의 금주도 특별히 해제예요! 자, 모두 건배!"
애덤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엘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자 시무룩해졌다.
"어... 전 괜찮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애덤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겨우 럼주 반 잔을 마시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마리엔은 텐션이 올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크라켄 말고 우리 뱃사람들을 위해서... 인간의 언어로 된 노래를 부를게요!"
얼굴은 좀 달아올랐지만 혀가 꼬부라질 정도는 아니었다. 마리엔은 오펄런에서 매일 밤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며 불렀던 노래를 불렀다. 엔리케가 오펄런에 12년 만에 돌아와 배를 댄 날,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불렀던 노래를.
나는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닌 내 어머니의 고향
다섯 개의 대양 그 깊은 어딘가에 계시겠지
내 머리카락과 내 눈동자와 내 지느러미는
사랑하는 엄마가 물려주신 것.
마리엔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식당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술잔을 들던 선원들의 손이 멈췄고, 시끄럽던 대화 소리도 잦아들었다. 인간의 언어로 부르는 노래였지만, 마리엔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인어의 매력이 담겨 있었다.
엔리케는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맥스가 빨간 머리를 흔들며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고, 소냐는 주방에서 냄비를 두드리며 리듬을 맞췄다. 엘라는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애덤은 술을 마시지 못해 시무룩해하던 표정이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네로와 사무엘도 숨을 죽이고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엔리케는 자신의 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마리엔에게 고정되었다. 12년 만에 오펄런에 돌아와 해변에서 처음 들었던 그 노래. 당시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목소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가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선장님. 얼굴이 빨개지셨네요?"
맥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닥쳐."
엔리케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지만, 평소의 위압감은 없었다.
마리엔의 노래가 끝나자 선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앙코르! 앙코르!"
소냐가 숟가락을 두드리며 외쳤다.
"마리, 네 목소리를 들으니 술이 없어도 취한 것 같아!"
애덤이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오네가 조용히 마리엔의 곁으로 다가왔다.
"마리... 당신의 노래를 들으니, 레퀴엠 오션의 안개도 걷힐 것 같네요."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어머니를 꼭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앙코르요? 그럼 이번에는..."
마리엔은 펄 식당에 손님으로 온 선원들에게 배웠던 '뱃사람의 노래'를 불렀다. 배 위의 거친 남자들이 즐겨 부르는 곡으로, 어부, 선원, 해적들 너나 할 것 없이 좋아하는 힘찬 가사의 노래였다.
바람아 불어라, 더 빠르게
우리가 올린 돛을 위하여
황금이 가득한 곳에도, 보물이 가득한 곳에도,
우리는 어디에든 갈 수 있지.
우리 배 선장님은 욕심꾸러기
갑판엔 철과 기름이 가득하다네
해군 따위 엿이나 먹으라고 하신다
어이 신입, 우리 배에 타고 싶다면
크리스마스에 지상에서 눈을 밟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선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마리엔의 노래에 맞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맥스는 벌떡 일어나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어이! 불쇼로 분위기를 더 달궈 볼까?"
맥스가 럼주를 입에 머금더니, 횃불을 들고 불을 뿜었다. 화려한 불길이 천장을 향해 치솟았다. 하지만 맥스의 완벽한 컨트롤로 불은 아름다운 용의 형상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선원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그래, 이게 바로 진정한 선원의 축제지!"
소냐가 더 많은 술을 가져왔다.
사무엘이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쉬었다.
"내일 아침 회계 장부 정리는 어떻게 하나... 모두들 취해서..."
하지만 축제의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네로는 파수대에서 내려와 모두와 어울렸고, 애덤은 결국 금주를 잊은 채 술잔을 들었다. 엘라는 그를 말리려다가 포기하고 함께 잔을 부딪쳤다.
엔리케는 벽에 기대선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처음 마리엔을 만났을 때, 그녀가 이렇게 선원들과 어울릴 줄은 몰랐다. 그는 자신의 왼쪽 눈을 무의식적으로 만졌다. 마리엔의 어머니를 찾는 건... 이제 단순히 자신의 눈을 치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선장님, 이러다 크림슨 해적단이 우리 배 소리를 듣고 찾아올지도 모르겠네요."
시오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괜찮아. 오늘만큼은... 모두가 즐기게 해."
엔리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님도 한 곡 부르시죠?"
소냐가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며 외쳤다.
"그건 사양하지."
엔리케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마리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리! 또 불러 줘!"
선원들이 외쳤다.
마리엔은 그 이후에도 서너 곡을 연달아 더 불렀다.
자정이 지나고 축하 파티도 파하자, 마리엔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옷을 하나 둘 벗었다. 그리고 맑은 바닷물과 진주 조개들로 가득 찬 특별 수조로 향했다. 수조에 연결된 벽면에 난간과 함께 설치된 계단을 올라, 그대로 수조 안에 몸을 던지자 마리엔은 아름다운 인어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아... 행복해..."
마리엔은 자맥질도 하고 물 속에서 공중제비도 돌다가, 몸에 힘을 빼고 나른하게 동동 떠 다녔다. 딥 어비스 호는 정말 멋진 배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엔리케가 마리엔을 데려오기 위해 준비해 준 바로 이 거대한 특별 수조였다.
그 이후에는 그녀를 소유하겠답시고 마리엔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지금의 엔리케는 다시 첫인상처럼 '친절한 선장님'이 되어 있었다. 마리엔은 커다란 수조 안을 물고기처럼 헤엄치며 콧노래를 불렀다. 인간들이 샤워를 하면서 콧노래를 부르듯이.
문득 마리엔의 방 문 앞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엔리케였다. 그는 마리엔의 콧노래 소리를 듣고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마리엔이 부르는 노래는 언제나 그를 매혹했다. 하지만 물 속에서 헤엄치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문을 조용히 돌아섰다. 그의 표정은 복잡했다.
"마리..."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진 않았다. 대신 그는 문 앞에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상자 안에는 오늘 마리엔의 목소리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선물이 들어 있었다. 레퀴엠 오션에서 발견됐다는 진주 귀걸이였다.
마리엔이 지금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그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복도를 걸어가며 그는 자신의 왼쪽 눈을 만졌다. 이제 그의 눈을 치료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리엔이 자신의 의지로 항해사가 되기로 한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때 맥스가 복도 끝에서 그를 발견했다.
"선장님? 이 시간에..."
"...잠이 안 와서."
엔리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하, 설마 마리의 노래가 귓가에 맴돌아서...?"
"맥스, 당직 근무 안 가고 뭐하나?"
엔리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네, 네... 지금 가죠."
맥스가 키득거리며 갑판으로 향했다.
엔리케는 자신의 선장실로 돌아가며 생각에 잠겼다. 내일... 마리엔에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레퀴엠 오션으로 가는 길에 대해, 그리고 그 곳에서 마주칠지도 모를 위험에 대해.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알게 된 새로운 정보에 대해.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시오네에게서 항해사 수업을 받기 위해 방 문을 열고 나온 마리엔은 방 문에 뭔가 걸리는 것을 느끼고 발치를 내려다 보았다.
보물 상자의 미니어쳐처럼 생긴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마리엔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둘러보고는 상자를 열어 보았다. 영롱한 진주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쪽지도 서명도 없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자를 들고 시오네에게로 갔다.
"시온 언니, 혹시 귀걸이 잃어버리셨어요?"
마리엔은 시오네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아니면 엘라 선생님인가?"
시오네가 진주 귀걸이를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마리. 이건 제 것이 아니에요. 엘라의 것도 아니고요."
시오네가 마리엔의 귀를 살짝 만지작거렸다.
"이건... 레퀴엠 오션에서 발견된 진주로 만든 귀걸이예요. 레퀴엠 오션의 진주는 특별하죠. 보통의 진주와는 달리 신비한 빛을 품고 있어요."
시오네가 귀걸이를 들어올려 빛에 비추었다. 진주는 달빛처럼 영롱한 광채를 발했다.
"선장님이 주신 거겠죠. 어제 선장실에서 이 상자를 보았거든요."
시오네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마리, 당신의 목소리가 돌아온 걸 축하하는 선물인 것 같아요. 선장님은... 이런 식으로 마음을 표현하시죠."
그 때 맥스가 복도를 지나가다 그들을 발견했다.
"오, 선장님이 결국 건네셨네! 어젯밤에 고민하시는 걸 봤는데..."
맥스가 씩 웃었다.
"그나저나 마리, 오늘은 선장실부터 가 보는 게 좋을 거야. 선장님이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거든."
"선장님이요?"
마리엔은 시오네에게서 다시 진주 귀걸이를 받아 들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선장실에 가 보라는 맥스의 말에, 결국 항해사 수업은 잠시 미루고 복도를 걸어 선장실로 향했다.
그녀는 선장실 앞에서 잠깐 고민하다가, 귀걸이를 귀에 걸었다. 신비로운 빛깔의 진주가 그녀의 귀를 장식했다.
마리엔은 선장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선장님, 부르셨어요?"
엔리케는 지도가 펼쳐진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마리엔의 귀에 걸린 진주 귀걸이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다시 서류로 향했다.
"들어와."
엔리케가 자신의 책상 앞 의자를 가리켰다. 그의 책상 위에는 레퀴엠 오션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여러 개의 표식이 찍혀 있었다.
"어제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어. 레퀴엠 오션 중심부에 있는 주에리 섬에서... 인어들이 목격됐다고 해. 순혈 인어들 말이야."
엔리케는 지도 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 크림슨 해적단도 같은 정보를 입수한 것 같아. 벨렉트 그 자식이 인어 사냥을 위해 블러디 호를 몰고 레퀴엠 오션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거든."
엔리케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어깨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마리, 네 어머니가 그 곳에 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위험해. 레퀴엠 오션은 안개가 짙고, 세이렌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곳이야. 게다가 크림슨 해적단까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리엔을 바라보았다.
"결정은 네가 하도록 해. 위험하다고 해서 내가 막진 않겠어. 네 선택이니까."
"저는..."
마리엔은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겠다고 하고 싶지만, 이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 그렇게 쉽게 말할 수가 없었다. 배에 탄 지 하루 이틀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면 이 선택의 순간에 당연히 '가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마리엔은 딥 어비스 호의 사람들과 충분히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뱃사람들이 위험해지는 일은 피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다른 해적단에서 순혈 인어들을 사냥하러 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인어들이 위험에 처하는 것도 싫었다. 그 중에 어머니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마리엔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엔리케는 마리엔의 망설임을 보고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네가 걱정하는 건 알아. 하지만 우리 배는 단순한 해적선이 아니야. 딥 어비스 호는 세계 최강의 배라고."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세이렌들의 노래는 네 노래만큼 아름답지 않아. 넌 크라켄도 진정시켰잖아. 그리고..."
그가 마리엔의 귀에 걸린 진주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그 진주... 네 어머니의 것일지도 몰라. 레퀴엠 오션의 순수한 인어들만이 이런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 낼 수 있거든."
엔리케는 창가로 걸어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난 이미 결심했어. 주에리 섬으로 갈 거야. 네가 가지 않겠다고 해도."
그의 목소리에 단단한 결의가 묻어났다.
"크림슨 해적단이 인어들을 사냥하도록 놔 둘 순 없으니까. 벨렉트 그 자식이... 인어들을 노예로 팔아 넘기는 걸 본 적이 있어."
그의 주먹이 창틀을 꽉 쥐었다.
맥스가 선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장님, 준비는 끝났습니다. 시오네가 레퀴엠 오션으로 가는 최단 경로를 찾았고, 소냐는 한 달치 식량을 준비했습니다. 엘라도 의약품을 보충했고요."
"좋아."
엔리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 네 선택을 기다리고 있을게. 하지만 알아 둬. 넌 이미 우리 선원이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린 네 편이 될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능글맞음 대신 진심이 담겨 있었다.
"...왜 그런 결정을 하신 거예요?"
당황한 마리엔이 물었다.
"훨씬 위험해질 텐데. 세이렌에게 하프 머메이드인 제 노래가 통할지 안 통할지 알 수 없어요. 같은 밀림에 산다고 해서 사자와 토끼가 같은 편인 건 아닌 것처럼요. 바다도 똑같다구요."
마리엔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물론... 엄마를 보고 싶지만... 인어들을 돕고 싶지만..."
엔리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마리엔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처음 널 만났을 때... 난 내 눈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그가 마리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혀를 깨물었을 때... 그 때 깨달았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크림슨 해적단이 인어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걸 보고도 모른 척했었지. 내 눈만 나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엔리케는 창가로 걸어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네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그리고 다른 인어들이 노예가 되는 것도 보고 싶지 않고. 어쩌면 난..."
그가 말을 멈추고 잠시 침묵했다.
맥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장님, 시오네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고 합니다. 크림슨 해적단이 우리보다 먼저 레퀴엠 오션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알았다."
엔리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 네 선택을 기다리지. 하지만 알아 둬. 이건 더 이상 거래가 아니야. 난... 그냥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능글맞음 대신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선장님..."
마리엔은 잠시 망설였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항상 결정이 빨랐다.
"...갈게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서 이 배에 타고 있는 모두를 지킬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엔리케가 선물한 진주 귀걸이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선물, 감사해요. 하지만 앞으로는... 문 앞에 두고 가지 마시고 직접 주세요."
마리엔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씩 웃었다.
"분실물인 줄 알았잖아요."
그가 살짝 당황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맥스도 키득거렸다.
"다음 번엔 꼭 그렇게 하지. 네게 어울리는군."
엔리케는 천천히 마리엔에게 다가가 그녀의 귀걸이를 살짝 만졌다. 그의 손가락이 귀걸이에서 마리엔의 목덜미로 살짝 스쳤다가 떨어졌다.
그 때 시오네가 선장실로 들어왔다.
"선장님, 블러디 호가 포착됐어요. 우리보다 3일 정도 앞서 있는 것 같아요."
"걱정 마. 우리 배가 더 빠르니까."
엔리케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마리가 있으니까."
엔리케는 지도를 접으며 마리엔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네 어머니를 찾는 것... 그리고 크림슨 해적단을 막는 것. 준비됐어?"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함과 결의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아, 그리고..."
그가 마리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진주가 네 눈동자만큼 예쁘진 않네."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선장실을 나섰다.
갑판에서는 이미 선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냐는 주방에서 나와 큰 소리로 외쳤다.
"야! 선장님! 레퀴엠 오션이면 한 달은 걸릴 텐데, 식량이 더 필요해요!"
"알아서 해."
엔리케가 대답했다.
"사무엘, 무역항에 들러 보급품을 더 구해."
"네, 선장님. 하지만 예산이..."
"걱정 마. 내가 따로 준비해 뒀으니까."
사무엘이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딥 어비스 호의 돛이 천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continue
엔리케도 이게 도대체 언제적부터 묵혀 놨던 엔리케인가ㅠㅠㅠ 드디어 엔딩 보고 포스팅합니다.
시작 설정이 확실히 온화한, '첫 만남'이 역시 좋은 것 같아요!
그래도 결국 집착 발동은 필수 요소인 것인가...
아냐 아무리 그래도 '납치'보다는 이게 나아ㅠㅠㅠ
16살... 마의 16살. 동화 <인어공주>에서도 '16살 생일'이 시작점이 되듯이,
'하프 머메이드가 인어의 생태를 갖게 되는 것도 16살부터' 라는 설정을 세워 봤습니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쉽게 이루어지는 행위를 인어들은 '사랑의 맹세'라는 특유의 표현으로 칭하며,
평생의 짝을 찾는 무게감 있는 의식으로 취급하게 했어요.
그렇게 마리의 엄마가 딸을 두고 떠난 이유가 달라졌습니다. 좀 더 안타깝고 애틋하게...
그래서 마리는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을 인어들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는 캐릭터인 거죠.
동시에 하프 머메이드의 노화가 느리다는 설정을 아예 성장 속도가 느리다는 설정으로 슬쩍 바꿔서,
몸의 성장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아이 같은 면모도 가지고 있는 인어다운 순수함을 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또 인어니까 순간 순간 인간들보다 더 지혜로운 모습도 보여 주는... 그런 여주를 원했어요!
개인적으로 캐챗하면서 집착남 앞에서 혀 깨물어 본 게 딱 두 번인데,
집착남의 집착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거 은근 비장의 카드일지도...🫠
엔리케도 그렇고 다른 캐챗 때도 그렇고 다들 충격 먹고 싹 손을 떼던데(특효약ㅡ,.ㅡ)
사실 충격 받은 건 나다, 엔리케 이 자식아ㅠㅠㅠ
목적이 불순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대놓고 협박까지 할 줄은 몰랐다고!
혀 깨무는 건 그리 자주 쓰고 싶은 방법은 아닙니다.
육안 상으로도 너무 극단적이고, 한동안 말을 못하게 되는 것도 있고;;
그런데 동화의 인어공주도 목소리를 잃었다는 속성이 있어서, 일시적으로 오마쥬를 시켜 준 것 같아 여기서는 만족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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