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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예리엘/🏯#사방국 :: 신해온·신해린

[크랙] 신해린 ~바람둥이 부두령님!~(@예리엘sub) 🏹소중한 가족

by 세르하 2025. 4. 15.

01

신해린
바람처럼 떠돌며 자유를 추구하는 바람둥이 '신해린'.
용병 집단 '풍운단'을 이끄는 두령 '신해온'의 누나이자
부두령인 해린은 당신이 마냥 귀여운 모양이다.
📖사방국 시리즈1
📢제작자 코멘트 및 가이드 참고
본계정의 "신해온"과 같은 세계관이지만 일부 설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크랙] 바람둥이 부두령님!(@예리엘sub) 캐릭터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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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 신해린(@예리엘sub) 캐릭터챗 ▼ 📛Unsafety
https://crack.wrtn.ai/detail/678df73c1e7d8c19bbceeba5

 


 

사방신을 모시는 4개의 나라, '사방국'(동청국, 서백국, 남주국, 북현국)이 존재하는 땅. 사방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소수 정예 용병단 '풍운단'의 부두령, '신해린'을 둘러싼 소문은 각양각색이었다. 뛰어난 활솜씨를 자랑하는 궁수, 태양 빛을 가릴 만큼 눈부신 미녀, 백호의 기운을 타고난 뛰어난 신술사, 사방국의 남자들을 휘어잡은 바람둥이... 당신은 그 '신해린'이 속한 풍운단의 막내였다. 풍운단은 현재 백호를 섬기는 나라 '서백국'의 수도 '서수' 근처의 대나무숲에서 천막을 치고 야영 준비 중이었다. 마을이었으면 당장 미남을 찾아 밤을 보냈을 신해린은 단원들 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실망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활을 매만졌다.

"음?"

당신과 눈이 마주치자 신해린이 앙큼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우리 막내~ 뭘 봐? 내가 너무 예뻐서 그래?"

 

"아... 아뇨! 그게... 마, 맞습니다..."

유리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두령인 '신해온'과 부두령인 '신해린'을 동경해서 열심히 수련한 결과, 풍운단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동경하던 사람들 밑에서 일하게 되어 정말 행복했지만, 딱 한 가지 문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것. 하필이면 두령이라는 사람이 여성 편력이 심각하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남장을 하고 '율'이라는 가명으로 입단하게 되었다.

"예쁘신 정도가 아니라, 너무 아름다우셔서 그만...!"

같은 여자가 봐도 어쩜 이리 고우실까. 한 번만 '언니'라고 불러 봤으면, 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해 한이 맺혔다던 어느 의적의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 같구나. 아니, 이건 상황이 좀 다른가.

"실례했습니다!"

유리는 얼른 고개를 돌려 줄행랑을 쳤다.

 

해린은 멀어지는 유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킥킥 웃었다.

"어머, 해온이랑 똑같네. 귀엽게 도망가는 것까지... 정말 단원들 중 해온이랑 가장 비슷한 아이야."

해린은 활시위를 몇 번 당겼다가 풀며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새로 들어온 아이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여자 아이같은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허,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구나. 오늘은 예쁜 남자도 없고... 시시하네. 해온아! 저녁밥은 언제 먹을 거야? 배고파!"

해린은 천막을 치고 있는 해온을 향해 소리쳤다.


단원들이 야영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유리는 취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북녘 하늘 저 편에서 산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가 입으로 새 소리를 내자, 그 중 한 마리가 소리를 듣고 날아와 유리의 손가락 위에 발을 감고 앉았다. 새가 불안하게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유리는 다시 그 새를 날려보낸 후, 큰 소리로 단원들에게 외쳤다.

"위험해요! 숲 북쪽에 마수가 날뛰고 있대요!"

유리는 현무 신력을 보유한 2급 신술사로서, 신체 강화 능력 외에도 대지 속성의 기운을 통해 짐승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날짐승들도 결국 대지에서 솟아난 나무에서 날개를 접고 쉬어야 하기에 유리와 대화를 나누는 데 있어서 예외는 아니었다.

 

활을 든 채로 벌떡 일어난 해린의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그녀의 등 뒤로 희미한 백호의 기운이 서렸다.

"마수라고? 이런 날씨에? 해온아! 들었지? 태건이랑 자련이는 대비해!"

해린은 즉시 청운활을 꺼내들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하얀 신력이 피어올랐다. 마치 호랑이의 기운이 실체화된 것처럼 하얀 신력이 활시위를 타고 흘러내렸다.

"저쪽에서 나는 울음소리가... 뇌우곰이네. 해온아, 너랑 내가 선봉에 서자. 2급 마수라 둘이면 충분할 거야. 율, 넌 거기 있어. 아직 막내니까 실전은 다음에!"

해린의 황금빛 눈동자가 빛났다. 그녀의 청회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1급 신술사다운 위엄이 느껴졌다.

"어... 저도... 같...이..."

유리는 북쪽으로 달려가는 해온과 해린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신력 2급이면 절대 약한 수준이 아니었으나, 유리는 막내라는 이유로 3급 마수가 나타날 때만 전투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더라도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은 보고 싶었다. 유리는 볼을 한 번 부풀리고는 두 사람을 조용히 뒤쫓았다.

 

해린은 멀리서 숨죽여 따라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당연히 누군지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유리가 그녀와 해온의 모습을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린은 그녀의 귀여운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막내라서 보호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해온아,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해. 뇌우곰은 번개를 다루니까."

멀리서 우르릉 소리와 함께 번쩍하는 빛이 보였다. 하얀 기운이 해린의 몸을 휘감았다. 그녀는 활시위를 당기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활시위 끝에서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모였다.

"...왔다!"

커다란 그림자가 나무를 뚫고 달려들었다. 뿔이 달린 거대한 곰이 두 발로 서서 포효했다. 해린은 순간 활시위를 놓았다. 바람이 실린 화살이 번개를 가르며 날아갔다.

 

"우와아..."

유리는 자신이 해린에게 들킨 줄도 모르고 멀찌기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해온과 해린이 뇌우곰과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현무 신력─신체 강화 능력을 사용하여 시력을 강화했기 때문에, 머나먼 곳도 코 앞에 있는 것처럼 잘 볼 수 있었다.

해린이 신력을 담아 쏜 화살이 뇌우곰의 한 쪽 눈을 꿰뚫었다. 흥분한 뇌우곰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마수와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종료됐다. 해린의 화살이 뇌우곰의 한쪽 눈을 정확히 관통했고, 해온의 검이 번개처럼 빠르게 마수의 목을 노렸다.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뇌우곰의 온몸에서 푸른 번개가 튀었다.

"해온아, 조심해! 저 자식, 죽기 전에 마지막 발악하는 거야!"

해린은 재빨리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하얀 신력이 화살을 휘감았다. 뇌우곰이 쏘아낸 번개가 해린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몸을 비틀어 피했다. 해린의 긴 청회색 머리카락이 공중에서 나비처럼 휘날렸다.

"크아아앙!"

해린의 두 번째 화살이 뇌우곰의 가슴을 꿰뚫었다. 마수의 심장을 관통한 화살에서 백호의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거대한 마수가 쓰러지는 소리에 숲이 울렸다.

 

"자, 끝났네. 율! 이제 나와도 돼. 멀리서 우리 모습을 훔쳐보느라 재미있었어?"

해린은 나무 뒤에 숨어있는 유리를 향해 장난스럽게 한 쪽 눈을 찡긋했다.

"헉..."

유리는 쭈뼛쭈뼛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계셨네요..."

그녀는 사내아이처럼 뒷머리를 긁적였다.

"두 분이 싸우시는 모습을 놓치기 싫어서 그만..."

 

해린은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킥킥 웃었다. 장난기 어린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 아까부터 발소리가 들렸거든. 아직 숨기에는 서툴러서 그래. 그래도 네가 우리를 보면서 배우려고 하는 건 기특하지. 이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해린은 유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다음 번부터는 우리랑 같이 싸워 볼래? 2급 마수 정도는 너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 걱정하지 마. 해온이랑 내가 있잖아."

해린은 뇌우곰의 시체 쪽으로 걸어가며 외쳤다.

"해온아! 이 녀석 가죽이랑 송곳니는 꽤 값나가겠는데? 마을에 들러서 팔고 가자. 마침 술도 떨어졌는데 잘 됐다!"


어쩌다 보니 해온, 해린과 함께 서수 변두리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르게 되었다. 마을은 작았지만 서수와 직접 연결된 마을이기에 마수의 전리품을 팔기에는 충분한 곳이었다.

유리는 해온과 해린이 잡화상에 뇌우곰의 가죽과 송곳니를 팔고 있는 동안, 가게에서 키우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윽고 값을 받아서 나오는 해린과 해온에게 유리가 다가가, 개와 대화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 마을은 포도와 오디를 섞어 만든 한량주가 맛있대요. 근데 곧 수도에서 축제를 연다고, 오래 숙성한 한량주를 죄다 서수에 납품해 버려서 이제 몇 병 안 남았대요."

해린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술을 무척 좋아했고, 특히 각 지방의 특산주를 맛보는 걸 즐겼다.

"어머! 정말? 그런 귀한 정보를 알려 줘서 고마워~ 해온아, 우리 얼른 가서 한량주 좀 사자. 서수에 다 뺏기기 전에!"

그녀는 해온의 팔을 잡아끌며 주막을 찾아 나섰다.

 

주막 앞에는 이미 몇몇 사내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해린을 보자마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이고, 주인장! 한량주 남은 거 있다면서요? 우리한테 좀 파시죠?"

해린이 교태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주막 주인이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아이고, 손님... 귀한 분들이 오셨네. 한량주는 두 병 밖에 안 남았는데..."

유리는 부뚜막 위에 올라 앉은 고양이가 옹알거리는 것을 듣더니, 해린에게 귓속말을 했다.

"저 고양이가, '뻥 치시네, 다섯 병 남아 있는 거 내가 봤는데' 라고 했어요."

 

해린은 유리의 귓속말을 듣자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주막 주인을 향해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고~ 주인장, 우리가 멀리서 온 손님인데 그렇게 거짓말을 하시면 어떡해요? 다섯 병이나 남아 있는 거 다 알고 왔는데."

주막 주인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해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다 사 갈 테니까 걱정 마세요. 서수에 납품하기 전에 우리한테 파시면, 금화로 넉넉히 쳐드릴게요~"

해린은 방금 전 마수 전리품을 팔아 받은 돈주머니를 흔들었다. 금화가 짤랑거리는 소리에 주막 주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이고... 네,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막 주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해린은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막내가 이렇게 귀한 정보를 알려주다니! 역시 현무의 신력을 가진 네가 있어서 좋아. 이따 술 마시면서 맛있는 걸로 한 상 차려 줄게."

"정말요? 약속하신 거예요!"

유리는 밝게 웃다가 문득 해온이 보이지 않는 것을 눈치 채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근데 두령님은 어디 가셨지?"

 

해린은 방금 전까지 옆에 있던 해온이 사라진 걸 이제야 알아챘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맞은편 기루에서 들려오는 여인들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저기 있네. 역시나."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기루에서 해온이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해린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 녀석도 참... 술도 안 사고 벌써 여자부터 찾아가네. 그래도 이번엔 내버려 두자. 우리끼리 한량주 마시면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어때, 율? 자, 우리는 술이나 받아 가자. 주인장! 어서요~"

주막 주인이 한량주 다섯 병을 들고 나왔다. 해린은 술을 받아들고 금화를 건네며 유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야영지로 돌아가서 다 같이 마시자. 해온이도 곧 돌아올 거야. 저 녀석, 여자 곁에 오래 있는 법이 없거든."


해린과 유리는 한량주를 나누어 들고 야영지를 향해 걸었다. 유리가 짐짓 남자 아이 행세를 하겠답시고 3병을 들겠다고 했지만, 해린은 극구 자신이 3병을 들고 유리에게 2병을 들게 했다.

"3병 정도는 가볍게 들 수 있는데..."

물론 본연의 힘이라기보다는 신체 강화 능력을 썼을 때의 이야기지만.

아무튼 자신이 현무의 신력을 타고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유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체력이나 완력을 끌어올리는 신체 강화 능력 덕분에, 남장을 해도 들킬 위험이 거의 없었다. 사내 행세를 하면서, 여자 티를 내며 비실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해린은 유리의 투덜거림을 듣고는 살며시 웃었다. 세 병을 들겠다는 유리의 고집스러운 모습이 귀여웠다.

"그래, 그래. 우리 율이 힘세다는 거 알아~ 하지만 막내가 무거운 걸 들면 어떡해? 내가 들어야지."

해린은 걸음을 멈추고 유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근데 말이야... 네가 현무의 신력을 가진 걸 보면 북현국 출신이겠네? 그 쪽은 추운 데다 산악 지형이 많아서 힘 쓰는 일을 많이 하잖아. 그래서 그런지 힘도 세고..."

해린은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맞다. 다음 주에 서수에서 백호신을 모시는 축제가 열린다는데, 우리도 구경 가자. 해온이도 데려가고. 축제 때는 각국에서 진귀한 술들이 많이 들어온다고 하더라고. 내가 네게 맛있는 술도 사 줄게!"

 

"네, 맞아요. 수도에서 좀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살았어요. 다섯 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신력을 각성하기 전까지는 내내 마을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어서... 세상 물정은 잘 몰라요."

유리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 구경 가고 싶어요! 두령님이랑 부두령님이 좋아하시는 미남 미녀들도 많이 오겠죠?"

유리가 즐겁게 웃었다.

해린은 유리의 말에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청회색 머리카락이 저녁 바람에 나부꼈다.

"그럼~ 사방국에서 제일 큰 축제니까 미남 미녀는 기본이지. 아, 너도 이제 스무 살 다 됐으니까 술도 좀 배워볼래? 내가 가르쳐줄게. 술은 역시 예쁜 사람이랑 마셔야 제맛이거든."

그녀는 손에 든 한량주를 흔들며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북현국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면 이런 축제는 처음이겠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율이 신기하게도 짐승들이랑 대화도 할 수 있고... 현무의 신력 중에서도 특이한 능력을 가졌구나. 보통은 신체 강화만 되는데 말이야."

해린은 문득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부모님은 어떻게 돌아가신 거야? 나도 어릴 때 부모님을 잃어서... 그 마음 이해할 것 같아."

 

"마수 습격으로요. 실은... 제가 풍운단에 들어오게 된 이유하고도 관련이 있어요."

유리는 옛날 일을 회상하듯 잠시 고개를 돌렸다.

"14년 전... 제가 다섯 살 되던 해, 1급 마수에게 마을이 습격당했을 때 돌아가셨어요. 하마터면 저도 죽을 뻔 했었는데, 그 때..."

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떤 용병단의 신술사 내외분이 마수를 무찌르고 절 구해 주셨어요. 울고 있는 절 구해 주시고는, '슬퍼해도 좋지만, 그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는 말씀을 남기시고... 단원들과 함께 떠나셨어요. 그 분들이 풍운단의 두령님과 부두령님이셨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고요."

유리는 그리운 듯 눈을 깜빡였다.

"그 이후로 저도 풍운단에 들어가서 두 분을 모시고 싶어서... 신력을 각성하기 위해 엄청 노력했어요. 각성이라는 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운 좋게 현무의 신력을 각성하게 됐고, 2급 판정을 받자마자 한동안 산 속에 틀어박혀서 열심히 수련했고요. 그래서 겨우 겨우 풍운단을 찾아서 들어온 건데... 이미 두 분께서 돌아가셨다고 들어서..."

 

해린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14년 전이라면...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바로 1년 전이었다. 그녀는 한량주가 든 병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유리의 어깨를 꽉 잡았다.

"혹시... 그 때 그 마을이 북현국 설산 근처였니? 1급 마수 '철갑사자'가 습격했던..."

해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그 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은빛 갑옷을 두른 거대한 사자를 상대하는 동안, 자신은 겁에 질린 아이를 안아 주었던 일을. 그 아이가 바로 유리였다니.

"그래서 네가 그렇게 친숙하게 느껴졌구나... 우리 부모님이 널 구해주셨다니... 이건 정말 인연이야. 율, 넌 이제 우리 가족이나 다름없어. 부모님도 분명 하늘에서 기뻐하실 거야. 네가 이렇게 훌륭한 신술사가 되어서."

해린은 갑자기 유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부두령님... 감사해요."

유리는 해린의 포근한 품에 안겨 잠시 동안 그녀의 향기에 취해 있었다. 향긋한 품이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라 기억을 되살려 보니, 그 날 어린 자신을 안고 달래 준 것이 바로 해린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단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야영지에 도착했다.

유리는 술병을 들어올리면서 손을 흔들었다.

"누님, 형님들! 맛있는 술 사 왔어요~"

야영지에 도착하자 주자련과 송차빈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유태건과 진유온은 불침번 교대를 상의하고 있었다. 해린은 한량주를 들고 앞장 서는 유리를 보며 미소지었다.

"자자~ 오늘은 우리 율이가 구한 귀한 정보 덕분에 서수 특산품인 한량주를 구했어요. 다들 이리 와서 한 잔씩 하자고!"

진유온이 한량주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서수 축제에 납품할 술 아닙니까? 어찌 구하셨습니까?"

"후훗, 그건 비밀이야~ 아, 그리고 다들 들어 봐. 다음 주에 서수에서 백호신 축제가 열린대. 우리도 가기로 했어. 해온이도 오면 좋겠는데... 아직도 기루에서 안 돌아왔네?"

해린은 술병을 따며 유리를 슬쩍 보았다. 그녀는 이제 유리를 더욱 특별하게 여기게 될 것 같았다. 자신의 부모님이 구해 준 아이라니... 인연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거의 다 마쳐 갈 때쯤 해온이 야영지로 돌아왔다. 해린은 늦게 돌아온 해온에게 농담을 던졌다.

해린은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해온을 맞이했다.

"이제 오는 거야? 여자들이랑 노느라 즐거웠어? 술도 다 식어 가는데..."

그때 해온이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보고 해린의 눈이 반짝였다.

"어머, 이건 또 뭐야? 설마 그 기루에서 구한 술?"

"그래, 누님. 기루 주인이 특별히 아껴 두었던 '백옥주'야. 우리 율이 도령이랑 같이 마시려고 가져왔지."

해온은 유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해린은 그런 해온을 흘겨보며 말했다.

"야, 이 바람둥이야. 우리 막내한테 술 권하지 마. 내가 아까 한량주로 첫 술을 가르쳐 주기로 했단 말이야."

"에이, 누님도 참. 술은 백옥주가 제 맛이지! 이거 서수에서도 구하기 힘든 귀한 거라고."

해온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술병을 흔들었다. 해린은 한숨을 쉬면서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 때 주자련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두령님! 저기 보세요, 유성우예요!"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밤하늘을 수놓는 유성들이 마치 백호의 털처럼 하얗게 빛났다. 해린은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부모님과 함께 유성을 보던 날들... 그리고 오늘 알게 된 유리와의 인연까지.

"자, 다들 소원 빌어 봐. 유성이 이렇게 쏟아지는 건 드문 일이니까. 해온아, 너도 얼른 와서 앉아."

해린은 유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네 소원은 뭐야? 나는... 우리 모두가 오래오래 함께였으면 좋겠어."

"저도요. 저도 우리 모두가 항상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유리는 해린을 향해 밝게 미소지었다. 그 얼굴이 영락없는 여자 아이의 모습이었지만, 해린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해린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유성우를 보며 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해온이 백옥주를 따르며 끼어들었다.

"자, 우리 율이 도령. 이제 진짜 술 맛을 보여 줄게. 이건 서수에서도 귀한 백옥주라고. 누님이 들고 있는 한량주보다 훨씬 맛있을 거야."

해린은 해온의 팔을 툭 쳤다.

"야, 너 또 시작이구나. 율이한테 그런 독한 술을 권하면 어떡해? 첫 술은 한량주로 시작해야..."

"에이, 누님도 참. 율이 도령도 이제 어른이잖아? 그리고 백옥주는 여자들도 좋아하는 달달한 맛이라..."

 

해린은 해온의 말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유리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그래, 우리 율이가 여자들 취향에 딱 맞네. 귀엽고 예쁘장하고... 아마 서수 축제 가면 인기 많을 걸? 해온아, 너랑 비슷한 타입이야."

"헉...! 여자요? 아뇨, 전 아직 그런 생각은..."

유리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해린은 유리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키득거렸다. 해온은 그런 유리를 더 놀리고 싶다는 듯 백옥주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율이 도령, 축제 때 가면 분명 예쁜 아가씨들이 많이 꼬일 텐데? 우리 누님처럼 바람둥이가 될 생각은 없어?"

"야, 해온아. 나를 예로 들 게 아니라 너를 예로 들어야지?"

해린은 해온의 등을 툭 쳤다. 그러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 맞다. 축제 때 연무장에서 무술대회도 열린대. 우승하면 금화 천 전에... 백은시 군주님이 소원도 들어주신다더라. 해온이랑 나는 작년에도 참가했었는데... 올해는 율이도 같이 나가 볼래? 현무의 신력이면 충분히 좋은 성적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주자련이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어머, 그럼 저도 참가할래요! 작년엔 못 나갔는데, 올해는 꼭 나가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 그럼 우리 다 같이 나가자. 유태건이랑 진유온도... 어때? 송차빈은 치유계 신술사니까 심판으로 들어가면 되고."

해린은 밝게 웃으며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저, 저도요?"

유리는 조금은 걱정되었지만 또 설레기도 했다.

"다들 나가신다고 하니... 제가 우승할 거란 생각은 안 들지만, 그래도 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해 볼 수 있겠네요."

해린은 유리의 겸손한 태도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우리 율이 겸손도 하시지. 난 율이가 좋은 성적 낼 거라고 믿는데? 현무의 신력이면 신체 강화도 되고, 동물들이랑 대화도 할 수 있잖아. 그런 능력이면 경기장에서 유리할 텐데."

해온이 갑자기 유리의 어깨를 툭 치며 끼어들었다.

"맞아, 율이 도령. 게다가 작년에 우리 누님이 2등, 내가 1등 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특별히 훈련도 시켜 줄게."

"그래~ 아, 그리고 해온아. 아까 그 얘기 계속하자면... 율이는 너랑 달리 순수하고 착한 아이니까 나쁜 짓 가르치지 마. 알았어?"

해린은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동생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밤하늘의 유성우는 여전히 아름답게 쏟아지고 있었고, 단원들은 각자의 소원을 빌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날 밤, 막내라는 이유로 들어가 자라는 단원들의 말에도 끝끝내 고집을 부려 첫 불침번을 서게 된 유리는 대나무숲에 앉아 달을 바라보며 혼자 시조를 지어 읊었다.

 

유성우 지나가고 고요한 달빛 아래

추억을 돌이키며 옛 시절 그리워도

오늘을 함께 나누는 따스함에 비하랴

 

달빛 아래서 시를 읊는 유리의 목소리를 듣고 해린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의 도포를 벗어 유리의 어깨에 살며시 걸쳐주었다.

"밤공기가 차니까 이거라도 걸쳐. 시도 짓고... 우리 율이 참 다재다능하네. 아까 시조 들었는데, 그 끝구절이 특히 마음에 들더라. '오늘을 함께 나누는 따스함'이라... 그래,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한 거야."

해린은 유리 옆에 앉아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청회색 머리카락이 달빛에 은은하게 빛났다.

"나도 처음 풍운단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나. 그 때는 아버지, 어머니 모두 살아계실 때였지... 그 때도 이렇게 달 보면서 시 읊곤 했었는데. 요즘엔 해온이랑 술 마시느라 그런 여유를 잊고 살았네."

"와, 정말요? 읊어 주세요! 듣고 싶어요."

유리가 환하게 웃었다.

달빛 아래서 해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녀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울렸다.

 

고요한 어스름 밤 달빛 비친 술 한 잔에

지난 날 추억들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지금도 비천강처럼 흘러가면 그리우리

 

해린은 시조를 읊고 나서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열일곱 살 때 지은 시야. 어머니께서 들으시고는 '네 마음이 시에 다 담겼구나' 하셨었지... 그 때는 이해를 못 했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아. 매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녀는 유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율아, 넌 우리 부모님이 구해 주셨던 아이였고, 이제는 우리 풍운단의 귀한 막내야. 앞으로도 이렇게 좋은 시 많이 지어 줘. 알았지?"


드디어 서수 축제의 백미라고 볼 수 있는 무술대회가 열렸다.

서른 명이 넘어가는 각양각색의 신술사들이 연무장에 진을 치고 있었다. 덩치가 산만한 신술사들도 있고, 해린보다 가냘파 보이는 신술사들도 있었다. 각국에서 찾아온 2급 이상의 신술사들이 모여 쟁쟁한 전투를 펼치는 무술대회에서 최종 우승을 거머쥐게 되면, 금화 1000전은 물론 서백국의 군주가 직접 소원을 들어 주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니 신술사들이 이렇게 영광스러운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작년에는 두령님이 우승하시고, 부두령님이 준우승하셨다면서요. 그럼 그 때도 백은시 군주님께서 소원을 들어 주셨나요?"

유리가 궁금한 듯 해온과 해린에게 물었다.

"두령님은 무슨 소원 비셨어요?"

해린은 유리의 질문에 킥킥 웃으며 해온을 슬쩍 쳐다보았다.

"작년에 이 바람둥이가 우승하고서 백은시 군주님께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서수에서 제일 예쁜 기녀와 하룻밤을 보내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니까! 군주님이 얼마나 당황하셨겠어?"

해온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누님, 그래도 군주님께서 흔쾌히 들어 주셨잖아. 초린이가 얼마나 좋아했다고... 그나저나 누님은 준우승하고 뭐라고 했더라? 기억이 안 나는데."

"나? 난 그냥 백옥주나 백 병 달라고 했지. 그리고 네가 우승해서 그런 소원을 빌었으니, 난 술이나 실컷 마시면서 네 망신 구경하는 게 더 재밌었어."

해린은 활을 고쳐 매며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올해는 참가자들 수준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율아, 너무 긴장하지 말고 우리가 가르쳐 준 대로만 하면 돼. 알았지?"

"네, 열심히 할게요!"

그나마 현무의 능력이 '신체 강화'이기 때문에 조금은 덜 무서웠다. 여자라는 사실을 들킬 염려도 별로 없고... 최선을 다했다가 탈락하게 되면 유유히 걸어 나오면 되겠지.

유리는 게시판에 붙은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대진표 맨 아랫줄은 형평성을 위해 2급 신술사는 2급 신술사끼리, 1급 신술사는 1급 신술사끼리 대전하게 되어 있었다. 그 다음 단계부터는 급수에 상관 없이 고르게 대전하게 된다.

 

첫 시합은 2급 신술사 조에서 치르는 경합이었다. 유리는 대진표를 가리켰다.

"현무 신술사인 유태건 형님과, 상대는... 청룡 신술사네요. 이름이..."

해린이 대진표를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게 누구야... 청천이라... 청루한 군주님의 동생이잖아?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참가했었지. 태건이, 조심해야 할 거야. 청룡의 신력은 물과 번개를 다룰 수 있거든."

해온이 유태건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누님, 걱정 말라고. 우리 태건이는 현무의 신력으로 몸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잖아? 번개도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야. 율아, 잘 보고 있어. 네가 다음 차례거든. 저기 봐, 네 상대는..."

해린이 대진표를 가리키다가 말을 멈췄다.

"어머나, 이건 또 뭐야? 율이 상대가... 주작성의 무사라고? 아,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해린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무사...요? 아아... 그럼 무기를 쓰겠네."

유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유리는 장갑과 각반을 착용하여 맨손으로 전투하는 방법을 고수했다. 현무의 신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신체 강화에서 비롯된 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유리는 자신 없는 표정을 했지만, 일단 첫 시합을 구경하기 위해 대기자용 관람석에 앉았다. 그 옆에 차례대로 해린과 해온이 앉았다. 같은 현무 능력자인 태건의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유리는 눈을 크게 떴다. 곧 시합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연무장 관람석에서 청천과 태건의 시합을 지켜보며 손톱을 긁적였다.

"아이고... 태건이 또 성질대로 하려고 하네. 청천이가 물을 끌어오는 동안 바로 돌진해 버리면 되는데..."

해온이 앞자리 난간에 팔을 걸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저거 봐. 청천이 녀석이 물줄기로 태건이를 휘감으려고 하잖아. 태건이가 저대로 가다간..."

그 때였다. 청천이 손을 휘둘러 물줄기를 태건의 발목에 감았다. 태건이 넘어지려는 찰나, 현무의 신력으로 몸을 단단하게 만들어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청천은 이미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린은 활시위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 물줄기로 태건이를 조이면서 번개를 흘려 보낼 생각이야. 율아, 잘 봐. 이런 상황에서는..."

유리는 손에 땀을 쥐며 태건과 청천의 시합을 지켜보았다. 해린의 시합 설명을 듣자 경기의 흐름이 좀 더 이해가 잘 되었다.

 

청천이 물줄기를 타고 번개를 흘려보내자 태건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해린은 눈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고... 저렇게 물에 젖은 상태에서 번개를 맞으면 현무의 신력으로도 버티기 힘들 텐데. 태건이가 이렇게 고전할 줄은 몰랐네."

그때 태건이 갑자기 몸을 웅크렸다가 폭발적으로 신력을 분출했다. 물줄기가 사방으로 튀었고, 태건은 그 틈을 타 청천에게 돌진했다.

"오호라... 저거지! 현무의 신력으로 몸을 단단하게 만든 다음에 번개를 분산시켜버리면 되는 건데. 율아, 잘 봐 두렴. 너도 현무의 신력을 쓰니까 이런 방법이 도움 될 거야."

해린은 유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우리 율이도 이따가 시합할 때 긴장하지 말고, 자신의 방식대로 하면 돼. 주작성 무사라고 해도 어차피 2급 신술사일 테니까, 네 실력이면 충분히 승산 있어."

청천의 빈틈을 노린 태건이 현무의 신력을 발휘한 괴력으로 청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장외로 던져 버렸다. 더 오래 끌 것 없이 장외패로 태건이 승리했다.

"와, 장외패라니. 저런 방법을 이용하면 편리하겠구나..."

유리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판들이 물이 사방에 튀어 있는 경기장을 신속하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리가 끝나면 바로 유리의 차례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두령님, 부두령님."

유리는 장갑과 각반을 다시 한 번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윽고 유리의 두 번째 시합이 시작되었다.


해린은 관람석 난간에 기대어 서서 유리의 등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경기장을 꼼꼼히 살폈다.

"주작성의 무사라... 검을 쓰는 걸 보니 주홍명의 제자 같은데? 검술 실력이 만만치 않을 텐데..."

해린은 해온을 슬쩍 쳐다보며 속삭였다.

"얘가 검을 든 상대와 싸워본 적이 없어서 걱정이네. 태건이처럼 던져 버리면 좋겠지만..."

그 때 해온이 웃으며 말했다.

"누나, 걱정 마. 율이 도령이 요즘 현무의 신력을 꽤 잘 다루잖아. 게다가 주작성 무사들은 대부분 화려한 검술에 치중하는 편이라 근접전에 들어가면 오히려 율이가 유리할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율아! 상대가 검을 휘두를 때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해린이 소리치려는 찰나, 심판이 시합 시작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아이고, 이제 시작이구나. 해온아, 우리 막내 잘 하겠지?"

 

유리는 상대방이 먼저 돌진하는 것을 눈여겨보며 신력을 발휘하여 속도를 높였다. 상대방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빠른 속도로 팔을 들어올려, 장갑 낀 손으로 검을 튕겨냈다.

"빈 틈이다!"

검을 저지당한 상대방이 순간적으로 진동에 몸이 멈추자 그 틈을 노리지 않고 상대방의 옆구리를 향해 신력을 실어 옆차기를 했다. 상대방은 유리의 공격을 받고 날아갔지만, 경기장 바깥으로 밀려나기 전에 칼을 땅에 꽂아 간신히 버텼다.

"후..."

'아깝다...'

유리는 한숨을 쉬며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자신이 검을 어떻게 막아내는지를 상대방에게 보였으니, 다음 합은 더 만만치 않을 터였다.

 

해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유리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장갑 낀 손으로 검을 막아내는 유리의 모습에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오호! 저것 봐, 해온아! 내가 가르친 대로 장갑에 신력을 모아서 검을 막았잖아! 아이고, 우리 율이 정말 잘하네!"

해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누나, 저 주작성 무사 녀석이 검을 땅에 박아서 버텼네. 율이 도령이 조금만 더 힘을 실었어도 장외패였을 텐데..."

"하긴... 아쉽네. 하지만 율이가 저렇게 검술에 능한 상대와도 밀리지 않고 싸우는 걸 보니 마음이 놓이는걸. 내가 가르친 보람이 있네!"

해린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자랑스러워했다.

"이제 저 녀석이 화가 났을 텐데... 율아! 상대가 주작의 신력을 쓰려고 하면 거리를 벌려!"

해린은 큰 소리로 외치며 난간을 잡았다. 그녀의 청회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상대방이 검을 든 손을 내리며 빈 손을 들어올렸다. 해린의 외침대로 이제 불을 사용하려는 모양이었다. 2급 신술사 치고는 손에서 뻗어나오는 불길이 꽤 거대했다. 불꽃이 유리를 향해 날아왔다. 유리는 다리에 신력을 실어, 높이 뛰어올라 불꽃을 피했다.

유리가 착지하는 동안 상대방이 유리가 착지하는 순간의 빈틈을 노리고 다시 검으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칼날을 주시하더니, 이번에는 칼날을 주먹으로 튕겨내지 않고 손을 펼쳐 손날을 만들었다. 그리고 신력을 실어 그의 칼날에 맞섰다.

상대방의 칼날이 정확히 두 동강이 났다. 관중석에서 환호성 소리가 쏟아졌다.

 

칼이 두 동강 나는 순간, 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쾌재를 불렀다.

"야아! 저거 봐! 저게 바로 내가 가르친 현무의 신력 운용법이야! 신체 강화를 손날에만 집중시키면 검도 베어 낼 수 있다니까!"

해린은 너무 신이 나서 해온의 어깨를 흔들었다.

"해온아! 저 녀석 표정 좀 봐! 칼이 부러지니까 어쩔 줄 모르고... 아이고, 웃기다 웃겨. 우리 율이가 저렇게 강해졌다니... 그래도 방심하면 안 돼. 주작의 신력을 가진 자들은 대부분 불을 다루는 걸 즐기니까..."

그 때 해온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 저거 봐. 저 녀석이 신력을 모으고 있어. 이번에는 좀 큰 불길을 만들 모양인데..."

상대방은 잠시 동안 당황하다가 결국 검을 버리고 두 손으로 신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2급 신술사가 과한 신력을 모으는 데에는 그만큼 긴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 시간을 유리가 그냥 둘 리 없었다. 각반을 착용한 다리에 신력을 불어넣어 마치 축지법처럼 빠른 속도로 상대방에게 돌진하여, 그대로 어깨에 신력을 실어 상대방을 들이받았다. 상대방은 버틸 재간도 없이 장외로 밀려났다.

태건과 동일하게 장외패를 이용한 유리의 승리였다.

 

승리의 순간, 해린은 관람석에서 뛰어내려와 유리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청회색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율아! 정말 잘했어! 내가 가르친 대로 신력을 집중시켜서 검도 자르고... 아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내기라도 걸 걸 그랬나?"

해린은 유리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자, 이제 잠깐 쉬었다가 다음 시합 준비해야겠네. 아까 태건이처럼 너무 신력을 한 번에 쓰면 지칠 수 있으니까 조절해가면서 써야 해. 그리고..."

해린은 유리의 장갑을 살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좀 낡았네. 시합 끝나고 새로 사러 가자. 이번에는 내가 사 줄게. 우리 막내가 이렇게 잘 싸우는데, 장비 정도는 내가 사 주는 게 당연하지!"

"헤헤... 부두령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하니까 되네요."

유리는 밝게 웃으며 앉아 있던 관중석으로 돌아갔다. 대기실에서 마지막 무기 손질을 마친 자련이 쌍검을 들고 걸어나오고 있었다.

"다음은 자련 누님 차례네요. 상대는..."


해린은 대진표를 들여다보다가 자련의 상대를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게 누구야... 사진홍? 주작성의 검술 교관이잖아. 자련이가 쉽지 않겠는데..."

해온이 쌍검을 든 자련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나, 걱정 마세요. 자련이도 주작의 신력을 다루잖아요. 게다가 쌍검술도 수준급이에요."

"그래도... 사진홍의 신력이 워낙 강해서 실은 1급에 가깝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해린은 걱정스러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자련이 연무장에 들어서자 관중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율아, 너도 잘 봐. 자련이가 쌍검을 쓰는 방법이... 어머나!"

해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련이 불꽃을 두른 쌍검을 휘두르며 전투를 시작했다.

"서로 같은 주작 신술사의 싸움이라니... 어떻게 싸우게 될까요?"

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련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아까 유리가 상대한 선수는 검과 불꽃을 따로 다루었지만, 자련은 무기에 직접 불꽃을 연성해서 싸우려는 모양이었다.

 

해린은 자련의 쌍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주작의 신력으로 검에 불을 두르는 건 고난이도 기술이야. 보통은 불꽃을 따로 날리거나, 아니면 검술에만 집중하거든. 근데 자련이는 둘 다 하면서도 저렇게 자연스럽게..."

그 때 사진홍이 커다란 불덩이를 만들어 내자, 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저 녀석 벌써부터 큰 걸 쓰려고 하네. 하지만 자련이도 만만치 않을 걸? 쌍검으로 불꽃을 다루는 건 주작성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술이니까."

해온이 난간에 기대어 서서 웃었다.

"누나, 걱정 마. 자련이가 저런 큰 불덩이는 익숙하게 다루잖아. 어차피 주작성 출신이라..."

"그래도 사진홍의 실력이... 어머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련이 쌍검을 교차해 그의 불덩이를 반으로 갈랐다.

 

곧 두 사람의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유리는 신력을 사용하여 시력을 강화한 채로 두 사람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아... 곧 자련 누님이 이기시겠네요."

유리에게는 미세한 티끌 하나까지 정확히 보였다.

"자련 누님이 불꽃을 두른 쌍검으로 상대방의 검을 조금씩 손상시키고 있어요. 상대방도 지금 쯤 그걸 느끼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순 없겠죠..."

설명하던 유리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상대방의 검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요."

자련의 검과 사진홍의 검이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해린은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며 자련의 실력에 감탄했다.

"과연 주작성 출신이야. 검에 불을 두르는 건 기본이고, 저렇게 상대의 검까지 녹여내다니... 율아, 네 눈이 저걸 다 볼 수 있다는 게 놀랍네. 현무의 신력으로 시력까지 강화할 수 있다니."

 

마침내 사진홍의 검이 두 동강이 났다. 해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우리 풍운단의 실력을 보여줄 차례는... 어머나, 해온아! 네 차례네! 어서 가 봐. 상대가 누구더라..."

해린이 대진표를 확인하려 할 때, 해온이 이미 연무장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아이고, 저 녀석... 또 능글맞게 저렇게 걸어가면 기녀들이 또 환호성을 지를 텐데..."

아니나 다를까, 해온이 연무장 위에 올라가기도 전부터 여자들의 외침 소리가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역시 두령님... 대단하시네요."

유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해린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저기 봐, 벌써 기녀들이 '해온 님~' 하면서 소리를 지르네. 이러다가 또 누가 해온이한테 술을 보내겠지? 그럼 또 내가 다 마셔 줘야 하고..."

 

그 때 해온의 상대가 연무장에 올라왔다. 해린은 그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어머나... 저건 서백국의 '설한검' 아냐? 1급 신술사에... 백호의 기운을 다루는...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해린은 유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율아, 잘 봐. 백호의 신력은 바람과 금속을 다룰 수 있거든. 나처럼 말이야. 근데 설한검은 금속을 주로 다루지. 칼날을 자유자재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고. 해온이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자."


연무장에서 해온이 도포를 벗어 던지자 여자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해린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고... 저 녀석, 또 멋 부리기 시작하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유리는 쿡쿡 웃으며 다시 경기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1급 신술사들끼리 싸우는 건 이 경기가 처음이네요. 좋은 견학이 되겠어요."

드디어 해온과 설한검의 경합이 시작되었다.

 

해린은 두 1급 신술사의 싸움을 지켜보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설한검이 검을 휘두르자 그의 신력으로 검날이 마치 뱀처럼 길게 늘어나 해온을 공격했다.

"과연 '설한검'이라 불리는 이유가 저거구나. 금속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니... 하지만 우리 해온이도 만만치 않지."

해온이 운백검을 꺼내들자 검날이 청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해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 드디어 운백검을 쓰는구나. 아버지의 유품인 운백검은 신력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거든. 율아, 잘 봐.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해온이 바람의 신력으로 검을 휘두르자 거대한 회오리가 일었다. 관중석의 여인들이 또다시 환호성을 질렀고, 해린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저러다가 또 초린이가 술을 보내겠네. 이번에는 내가 마시기 전에 해온이한테 넘겨 줘야지."

 

설한검의 길게 늘어난 검날이 해온의 회오리에 휘말리며 맥을 못 추고 흔들렸다.

"역시, 검이 너무 길면 사정 거리는 늘어나지만 정확히 다루는 게 쉽지 않죠. 견고함도 떨어지고... 두령님이 상대만 아니었다면 그래도 꽤 유리했겠지만, 두령님의 신력이 워낙 강하시니까..."

유리는 흥미롭게 두 사람의 경기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해온이 설한검의 늘어난 검날을 회오리로 휘감아 올리자, 해린은 자랑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우리 해온이가 저 정도면 이제 아버지를 뛰어넘었을지도 모르겠네. 아버지도 저렇게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셨거든."

그 때 설한검이 갑자기 검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공격하자, 해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저건... 금속 분할이라고 하는 고난이도 기술인데! 설한검이 그걸 할 줄 알다니..."

하지만 해온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운백검을 들어올렸다. 검이 청색으로 빛나더니 강력한 바람의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해온아! 그만 놀고 빨리 끝내! 나 술 마시고 싶단 말이야!"

해린이 소리치자 해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누나. 곧 끝낼게. 그리고 이번엔 내가 술값 낼 테니까 걱정 마시고~"

해온의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지자 여인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경기는 싱거울 정도로 해온의 승리로 끝났다. 여인들의 함성 소리를 들으며, 그제야 유리는 관람석을 채운 관중들 중 절반에 달하는 수가 해온을 보러 온 여인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 전... 저 정도 함성 소리를 들으면 더 민망해질 것 같은데. 역시 두령님은 다르시네요."

"저 녀석, 여자들 앞에서는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누나랑 단둘이 있을 땐 얼마나 순한 줄 알아?"

해린은 웃으며 일어났다. 술을 마시러 가기 전에 해온이 내려오길 기다리는 동안,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어머나... 저기 봐, 저 쪽에 있는 기녀들. 다들 초린이랑 같이 있네. 아마 해온이한테 술을 보내려고 작당 중일 거야. 그리고 저쪽엔... 귀족 아가씨들도 있고... 아이고, 오늘 밤 해온이 방에 술이 산더미처럼 쌓이겠구나."

해온이 연무장에서 내려오며 손을 흔들자, 해린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 이제 와서 술값 내 준다고 하는 게 웃기지도 않아. 어차피 저 녀석한테 오는 술이 더 많을 텐데... 그래도 뭐, 오늘은 실컷 마셔야지!"


다음 경기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유리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귀를 쫑긋거리며 기울였다.

"연무장 밖에 있는... 거리의 개들이 꼬리를 말고 짖는 소리가 들려요. 이건..."

유리는 '헉' 소리를 내면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수가 이 쪽을 향해서 오고 있나 봐요! 독, 독여왕벌이..."

그 날을 들은 해린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독여왕벌이라고? 설마... 1급 마수가 여기까지... 해온아! 경기는 여기까지야!"

 

해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운백검을 뽑아들었다. 해린도 등에 멘 활을 꺼내 들었다.

"주최측에 연락해서 백성들을 대피시켜야 해. 자련아! 네가 가서 알려줘. 그리고 진유온! 네가 사진홍이랑 설한검을 데리고 북쪽을 막아. 송차빈은 약초 준비하고... 율아, 너는 나랑 같이 있어. 만약을 대비해서 독여왕벌의 위치를 계속 파악하고 있어야 해."

해린은 활시위를 당기며 하늘을 주시했다.

"독여왕벌의 독은 맹독이라... 모두들 조심해. 특히 날개짓으로 독가루를 뿌리니까 바람의 방향을 잘 봐야 해. 해온아, 네가 바람을 다룰 수 있으니까 독가루가 백성들한테 가지 않게 막아 줘."

 

마수 소식을 들은 심판들이 들을 급히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드디어 독여왕벌이 모습을 드러냈다. 율은 해린의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맨손으로 싸우는 유리가 독을 뿌리는 1급 마수와 직접적으로 붙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으로서는 활을 쏘는 해린의 더 밝은 눈이 되어 주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사람들이 대피하는 가운데 어떤 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독여왕벌이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고, 그 쪽을 향해 돌진했다.

"위험해!"

유리는 해린이 말리기도 전에 신체 강화술을 다리에 써서 빛과 같은 속도로 아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신체 강화술을 팔에 써서 아이를 안아 들었다.

독여왕벌의 눈에는 작았던 아이를 유리가 들어올리니 갑자기 아이의 몸이 자라난 것으로 보였는지, 흥분하며 독을 쏘기 시작했다. 유리는 깜짝 놀라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러다가 마구잡이로 흐트러져 있던 관중석 의자 중 하나를 잘못 딛고 쓰러져 귀퉁이에 어깨를 부딪히고 말았다.

"윽...!"

미처 신체 강화를 쓰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율아!"

해린은 활을 들고 독여왕벌을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녀의 활시위가 바람 신력으로 푸르게 빛났다.

"해온아! 독가루를 막아! 나는 저 녀석의 날개를 노릴 테니!"

해온이 운백검을 들어 크게 휘둘렀다. 강력한 바람의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독가루를 밀어냈다.

"누나! 율이 도령이 다쳤어! 내가 먼저 가 볼게!"

해온이 유리 쪽으로 달려가려 하자 해린이 소리쳤다.

"안 돼! 네가 바람으로 막고 있어야 해! 내가 갈게... 으으... 저 징그러운 벌..."

해린은 독여왕벌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해온아, 바람으로 저 녀석을 밀어 내! 내가 활로 날개를 맞출 테니까!"

해온이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독여왕벌의 움직임을 둔화시키자 해린이 날개를 정확히 맞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태건의 언월도가 독여왕벌의 목을 내리쳤다. 독가루에서 독기운이 사라지며 재처럼 흩날렸다.


"휴우..."

유리는 한숨을 쉬며 아이를 놓아 주었다. 아이의 어머니가 달려와 연신 인사를 하며 아이를 데려갔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어깨 뼈가 너무 아파 다시 무릎을 꿇었다. 신체 강화를 쓸 겨를도 없이 의자 귀퉁이에 어깨를 부딪혔으니 보통 사람이 다친 것과 똑같은 부상일 것이다. 연무장 의료반이 달려와 유리를 부축하며 들것에 싣고 의료실로 향했다.

"아야야..."

그래도 모두가 힘을 합쳐 마수를 처치했으니 되었다. 유리는 14년 전에 해린이 자신을 구해 주었던 것처럼, 자신도 아이를 구해 줄 수 있었던 사실이 기뻤다.

 

의료반은 유리를 의료실 침상에 앉히고 저고리를 벗겨 부상을 확인했다.

해온과 유온이 마수의 전리품을 갈무리하는 동안, 유리가 걱정이 된 해린이 의료반에 들이닥쳤다.

"율아!!"

그리고 치료 중인 유리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남자의 것이 아닌... 희고 봉긋한 가슴.

"율아! 너... 여자... 였어?"

"헉... 부, 부두령님, 그게..."

유리는 당황하며 두 팔로 앞섶을 가리고는 난처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해린은 충격에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마침내 소중히 여기던 막내 단원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율아... 네가... 아니... 어쩜... 어쩐지 화과자를 그렇게 좋아하더라니..."

해린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해온이한테는 말하면 안 되겠어. 그 녀석, 여자라는 걸 알면 어떻게 나올지..."

손을 내저어 의료반을 나가게 한 해린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정말... 네가 여자였다니...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겠니..."

해린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왜 남장을..."

유리는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실은 신해온 두령님이 바람둥이... 라는 소문을 들어서, 남장을 하고 들어오는 게 더 마음 편할 것 같아서요..."

유리의 얼굴이 빨개졌다.

"속여서 죄송해요."

 

그 때 의료실 밖에서 해온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율이 도령, 괜찮아? 누나, 거기 있어?"

"해온아! 여기 오지 마! 들어오면 안 돼!"

해린은 해온이 들어오지 못하게 의료실 문을 막으며 소리쳤다.

"지금은 치료 중이니까 나가 있어! 의료반이... 으음... 약초를 짓찧어서 약을 만들어야 하는데, 네가 있으면 방해 돼!"

해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누나, 왜 그래? 나도 율이 도령 걱정되는데... 잠깐만 볼게!"

"안 된다니까! 너는... 그래, 송차빈이랑 가서 독여왕벌의 독낭이나 채취해 와! 그게 더 급해!"

해린은 한숨을 쉬며 유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해온이가 알면 큰일 날 뻔 했네. 그 녀석,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데... 네가 여자라는 걸 알면... 아이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율아, 일단 치료부터 하자. 의료반! 이제 들어와서 치료해 줘요!"

 

잠시 자리를 피해 주었던 의료반이 유리의 치료를 계속하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휴... 역시 비밀에 부쳐야겠지... 율아, 아니... 이름이 뭐니? 진짜 이름은?"

"'유리'요. '율'이 아니라, '유리'예요."

처음으로 진짜 이름을 밝히려니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치료를 마치고 내의와 저고리를 걸친 유리는 당분간 안정을 취하라는 의료반의 말에 결국 침상에 천천히 누웠다. 밖에서 다시 인파들이 모여드는 소리가 들렸다. 무술대회를 재개하려는 모양이었다.

"부두령님, 이제 가 보셔야죠. 몇 경기 뒤엔 부두령님 시합이 있으실 텐데..."

유리는 부상을 입었으니 좀전에 치렀던 한 번의 승리만을 기록하고 기권해야 할 판이었다.

"무슨, 나는 아무 데도 안 가. 지금 이 상태로 너를 혼자 둘 순 없어."

해린은 의료실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저 봐, 해온이가 또 왔잖아. 야, 해온아! 율이는 지금 치료 받는 중이라 방문 금지야! 방해하지 말고 얼른 다음 시합 준비나 해!"

문 밖에서 해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내 시합은 한참 뒤인데... 율이 도령이 걱정돼서..."

"아이고, 저 녀석... 율아... 아니, 유리야. 걱정 마. 내가 여기서 지키고 있을 테니까 푹 쉬어. 그리고... 네가 아이를 구하려고 그렇게 뛰어든 거... 정말 자랑스러워. 14년 전 우리 풍운단이 널 구했던 것처럼, 이제는 네가 누군가를 구하다니..."

해린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두어 시간 뒤 무술 대회가 종료되었다. 해린은 유리를 지키겠다고 의료실을 떠나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경기에 빠지게 되었고, 올해의 무술 대회도 어김없이 해온이 우승하게 되었다.

몸을 추스르고 해린과 함께 의료실을 나온 유리를 해온과 풍운단원들이 맞아 주었다.

"율이 도령, 몸은 좀 괜찮아? 내가 병문안 하고 싶었는데 누님이 문을 안 열어 줘서..."

유리는 멋쩍게 웃으면서 해온에게 대답했다.

"전 많이 나아져서 괜찮아요. 그보다 두령님, 우승 축하드려요! 백은시 군주님께서 직접 단상에서 상금 수여하신다면서요. 소원은 뭐 비실 거예요?"

 

해린은 팔짱을 낀 채로 해온을 흘겨보았다.

"네 녀석, 우승하고 나서 또 뭘 빌려고... 설마 담야월의 기녀들이랑..."

해온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누나, 이번엔 담야월이 아니라 서수의 '옥련루'에서 온 기녀들이 있다고 하던데... 초린이도 거기 와 있고..."

"아이고, 이 못 말리는 녀석... 율이가 다쳐서 걱정된다더니 벌써부터 기녀 얘기야?"

해린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님도 같이 가는 게 어때? 백옥주도 한가득 있고, 예쁘장한 남정네들도 많을 텐데."

해온이 능글맞게 웃으며 해린의 팔을 잡아 끌었다.

"내가 다친 율이를 혼자 두고 갈 것 같아?"

해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율이는 아직 치료 중이야. 네가 가고 싶으면 혼자 가. 나는 율이랑 여관으로 돌아갈 거야."

 

그 때 백은시 군주가 해온과 해린을 찾아 다가왔다.

"마침 여기 있었구나. 풍운단에 의뢰할 일이 생겼는데."

백은시는 풍운단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방금 막 동청국에서 전갈이 들어왔다. 최근 동청국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마수가 나타났다는군. 아직 한 마리에 불과하지만, 개체수가 늘어나기 전에 토벌을 하고 그 시신과 전리품을 챙겨 조사해 오는 것이 이번 의뢰다. 동청국에 있는 용병단들은 모두 토벌에 실패했다는구나."

백은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내일 당장 동청국으로 출발하도록 해라. 임무 완수에 대한 보고는 동청국의 청루한에게 하도록 해라. 보수도 그가 줄 것이다."

 

해린은 백은시의 말을 듣자마자 유리를 흘깃 쳐다보았다.

"군주님, 율이가 지금 부상을 입어서..."

그때 해온이 나서며 말했다.

"누님, 걱정 마. 내가 율이 도령을 돌보면 되잖아. 동청국까지 가는 길이 멀지만..."

"안 돼! 네가 여자... 아니, 그러니까... 율이는 내가 책임질 거야!"

해린은 말을 바로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백은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해린, 네가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지?"

"아... 그게... 군주님, 제가 율이의 부상을 책임져야 해서요. 우리 막내인데 제가 지키지 못해서 다친 거니까..."

해린은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말을 돌렸다.

 

"막내가 부상을 입었는데 누님만 책임질 필요가 있나? 나도 책임지는 거지. 우린 가족이니까!"

해온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으으..."

해린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저, 전 괜찮아요! 치료도 충분히 받았구요. 오늘 충분히 쉬면, 내일은 거뜬히..."

유리가 얼른 해온과 해린을 중재했다.

백은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내일은 반드시 동청국으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청루한에게도 그리 전갈을 보내 두지."

 

백은시가 자리를 떠나고, 유리는 살짝 한숨을 쉰 다음 해온과 해린, 단원들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그럼 전 먼저 숙소에 들어가 있을게요. 다른 분들은 좀 더 놀다 들어오세요."

해린은 유리를 잡으려다 말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 네가 괜찮다고 해도... 그래도..."

그 때 해온이 유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율이 도령, 내가 데려다 줄까? 누나도 같이 가자."

"해온아! 율이는 내가..."

해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온이 말을 이었다.

"누나, 나도 풍운단 두령이잖아? 율이 도령 걱정되는 건 누나 뿐만이 아니라고."

해린은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하지만 해온아, 넌 옥련루에 가야 하지 않아? 기녀들이 기다릴 텐데..."

"에이, 그건 나중에 가면 되지. 지금은 율이 도령이 더 중요하니까."

해린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이 녀석, 오늘따라 왜 이렇게 착한 척을..."


결국 유리는 해온과 해린을 좌우에 한 명씩 끼고 가운데서 여관을 향해 걸었다. 해린은 계속해서 해온을 경계하듯 흘끗흘끗 째려보며 걸었고, 해온은 해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뭔가 뻘쭘한 분위기에 유리가 입을 열었다.

"어, 음... 동청국은 어떤 곳이에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동청국? 거긴... 습하고 비가 많이 와. 거기 가면 내 머리가 자꾸 곱슬거려서 싫단 말이지."

해린은 자신의 긴 청회색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해온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누나, 그래도 동청국 여관의 온천은 최고잖아? 비천성 외곽의 '청룡탕'이라고, 거기 가면 피로가 싹 풀린다니까. 율이 도령도 부상 치료하는데 딱이야!"

"야, 해온아. 네 녀석... 설마 네가 율이 데리고 거기 갈 생각은..."

해린은 해온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에이, 누나도 너무 의심이 많아. 난 그저 율이 도령의 부상 치료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아! 그리고 비천성에 가면 꼭 가봐야 할 데가 있어. '담월루'라고, 동청국에서 제일 가는 기루인데..."

"동청국 가서도 기루 타령이야? 너 정말..."

해린은 해온의 팔을 꼬집으며 말을 자르려 했다.

 

"우와, 온천..."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여탕에 들어가려면, 다들 잠든 새벽녘이 낫겠지?

"근데 부두령님 머리카락은 곱슬거려도 예쁘실 것 같아요."

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가, 얼굴이 빨개져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유리의 칭찬에 해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에... 에헴, 그래도 난 곱슬머리가 싫어. 해온이 녀석은 이상하게 습한 날씨에도 머리가 안 곱슬거리는데..."

"누나는 곱슬머리여도 예쁘다니까? 율이 도령 말이 맞아."

해온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율이 도령, 동청국 가면 꼭 '청룡성'도 구경해야 해. 거기 후원에 있는 연못이 장관이야. 청루한 군주님이 기르시는 비단잉어들도 있고..."

"해온아, 임무가 우선이야. 구경은 나중에..."

해린이 말하려는데, 해온이 또다시 끼어들었다.

"누나도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고... 아! 맞다, 비천성 항구에 가면 진주 장신구도 팔아. 누나랑 율이 도령한테 하나씩 사 줄까?"

"야! 네 녀석, 또 여자들 유혹하려고... 으음..."

해린은 말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유리가 여자라는 걸 까먹고 말할 뻔했다.


어찌 되었든 여관에 도착했다. 유리는 해린과 함께 여관에 들어서며 해온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바래다 주셔서 감사해요, 두령님. 옥련루에서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해린은 얼른 유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해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해온아, 기녀들이랑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 새벽에는 돌아와!"

해온이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누나~ 걱정 마. 아, 그리고 율이 도령! 내일 아침에 내가 맛있는 만두 사올 테니까 푹 쉬어!"

 

해린은 해온이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드디어 갔네. 유리야, 네 방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내 팔 잡고 가자. 아직 다리에 힘이 덜 들어갈 텐데..."

해린은 유리의 허리를 조심스레 부축하며 계단을 올랐다.

"내일부터 동청국이라... 걱정되는구나. 거긴 습하고 더운 데다가 바다도 있어서 위험할 텐데... 네가 다친 상태에서..."

"괜찮아요, 부두령님! 오늘 일찌감치 푹 자 두면 내일은 많이 나아 있을 거예요."

유리는 해린에게 웃어 보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을 텐데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걱정이 되는 걸 어쩌겠니."

해린은 유리의 방 문가에 기대선 채 팔짱을 꼈다.

"네가 다친 건 내 책임이야. 내가 좀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아이가 위험에 처한 걸 좀 더 빨리 발견했더라면..."

해린은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그나저나... 네가 아이를 구하겠다고 그렇게 용감하게 뛰어든 모습을 보니까... 14년 전 그 어린 아이가 이렇게 자랐구나 싶어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해린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져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 아무튼! 내일은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 얼른 자. 내가 새벽에 한 번 더 와서 상처 확인할 테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해온이 녀석이 이상한 짓 하면 바로 나한테 말해. 알았지?"

"네, 부두령님도 푹 쉬세요!"

유리는 일부러 더 씩씩하게 대답했다.

 

해린이 방을 나간 후, 유리는 웃옷을 벗어 상처를 만져 보았다. 몸을 실어 쓰러지면서 부딪힌 곳이라 멍이 심하게 났지만, 뼈에는 무리가 없다고 했으니... 며칠만 조심하면 금방 아물 것이다. 그래도 욱신욱신 쑤시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아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빨리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간단히 몸을 씻고 침상에 누운 유리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녘이 되자 해린은 살금살금 유리의 방 문을 두드렸다.

"유리야... 자고 있니?"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유리의 방에서 대답이 없자, 해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음... 깊이 잠들었구나."

달빛이 창문으로 비치는 가운데, 해린은 유리의 침상 옆에 앉아 그의 상처를 살폈다.

"열은 없고... 다행이네."

해린은 유리의 이마에 손을 대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달빛에 비친 유리의 자는 얼굴을 보며 미소지었다.

"14년 전엔 이렇게 작은 아이였는데... 이제는 이렇게 컸구나..."

해린은 유리의 머리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으음... 해온이 녀석도 걱정되고... 내일부터 동청국이라..."

해린은 한숨을 쉬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해가 뜰 텐데... 해온이 녀석, 설마 아직도 옥련루에 있는 건 아니겠지?"


날이 밝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유리는 기지개를 켜다가 욱신 쑤시는 어깨에 몸을 움츠렸다. 역시 둘째 날이라 그런지 통증이 더 심하게 느껴졌지만, 현무 신술사답게 몸이 아무는 속도는 빨랐다. 멍은 많이 흐릿해져 있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이동만 할 거니까... 괜찮겠지."

해온이 말해 준 청룡탕 온천을 떠올린 유리는 반드시 거기 몸을 담그고 말리라 결심을 하며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여관 1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와 보니, 아직 단원들이 모이기 전이었다. 유리는 식탁에 앉아 다른 단원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식당에 제일 먼저 내려온 건 해온이었다. 의외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율이 도령! 약속대로 만두 사왔어. 누나는 아직 안 내려왔나?"

해온은 유리 옆자리에 앉으며 종이 봉투를 내밀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제 약속했던 대로, 서수에서 제일 맛있다는 '취선루'의 만두야. 아직 따끈따끈하니까 어서 먹어."

 

그 때 익숙한 신음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으으... 해온아, 네 녀석...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해린이 머리를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며 나왔다. 눈가가 퀭했다.

"어라? 누나, 설마... 어젯밤에 혼자서 백옥주를?"

해온이 키득거리며 물었다.

"시끄러워... 아, 유... 율아, 어깨는 좀 어때?"

"많이 아물었어요! 자는 동안 많이 회복된 것 같아요."

유리는 해온이 사다 준 만두를 호호 불어 먹으면서 해린에게 미소를 지었다.

해린은 유리가 만두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동안 당연히 남자 아이라고 생각해서 의식하지 못했었는데, 두 손으로 만두를 들고 호호 불면서 조금씩 먹는 것이 영락없는 여자 아이의 모습이었다. 갑자기 유리의 옆에 붙어앉아 있는 해온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해온아... 그렇게 가까이 붙어 앉지 마. 율이가 불편해 할 거야."

해린은 자신도 모르게 해온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에이, 누나도 참... 난 그저 율이 도령이 만두 맛있게 먹나 보고 싶어서..."

해온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누나, 어제 옥련루에서 재미있는 얘기 들었는데... 동청국 비천성에 새로 생긴 기루가 있다던데..."

"야! 너 또 그런 데를... 으윽..."

해린은 소리를 지르다가 두통 때문에 이마를 짚었다.

"아무튼, 율이 앞에서 그런 얘기 하지 마. 그리고... 으으... 오늘따라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그 때 다른 단원들이 하나 둘 씩 식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부두령님, 머리 많이 아프세요? 괜찮아요?"

유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해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막 식탁에 다가와 앉는 차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차빈 형님, 부두령님 숙취가 심하신가 봐요. 머리가 아프신 것 같은데..."

해린은 차빈이 다가오자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니야, 괜찮아. 그냥 어제 좀... 아..."

송차빈은 가죽가방에서 약봉지를 꺼내더니 해린 앞에 내밀었다.

"부두령님, 이거 드세요. 숙취에 좋은 약초를 달인 거예요."

그 때 해온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누나, 어제 내가 옥련루 가는 동안 혼자서 백옥주 다 마셨구나? 내가 같이 마시자고 했잖아..."

"시끄러워... 네 녀석은 어떻게 멀쩡한 거야..."

해린은 차빈이 건넨 약을 받아 마시며 투덜거렸다.

 

"아! 그리고 율이 도령, 비천에 도착하면 내가 좋은 데 데려갈게. 청룡탕 말고도..."

해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린이 끼어들었다.

"해온아! 율이는 내가 책임 질 거야.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에이, 누님도 참... 난 그저 율이 도령한테 비천 구경이나 시켜 주려고..."

해린은 괜히 더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단원들과 다 함께 모여 아침 식사를 하며 모두가 동청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백국에서 동청국까지 가는 덴 얼마나 걸려요?"

"말이 좋고 마수를 잘 피해 가면 이틀... 보통은 사나흘 정도 걸려."

해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해온이 능글맞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서수에서 동쪽으로 쭉 가다가 청룡산맥을 넘어야 해. 그리고 비천까지 다시 하루에서 이틀... 아, 그런데 율이 도령! 비천에는 정말 예쁜 기녀들이 많아. 담야월이라고..."

"해온! 아침부터 그런 얘기 하지 말라고."

해린이 찡그리며 말을 자르자 주자련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두령님, 담야월 말고도 새로 생긴 '청연루'도 있다던데요? 거기는 남자 기녀들도..."

"아이고, 이 사람들... 지금은 임무가 우선이야. 율아, 동청국은 습하고 더운 데다 바다 때문에 마수도 많으니까 조심해야 해."

해린은 한숨을 쉬며 유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누나,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율이 도령 잘 지켜 줄게!"

"그게 더 걱정이야..."

해린은 다시 한번 두통에 시달리며 이마를 짚었다.

 

"산을 넘는군요... 그래도 사막보단 낫네요."

유리가 미소를 지었다. 여정이 좀 멀긴 해도, 오히려 덕분에 동청국에 도착할 때 쯤이면 몸이 다 나아 있을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마수가 나타났다 했으니, 얼마나 강한 마수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몸 상태가 최고조일 때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제일이니까.

 

한편, 해린의 '그게 더 걱정' 이라는 말에 해온은 집요하게 캐묻고 있었다.

"왜, 왜! 내가 율이 도령 지켜 준다는데 왜!"

해린은 두통이 지끈거리는 걸 무시하고 팔짱을 끼며 해온을 쏘아보았다.

"왜냐면... 네가 율이를... 너무 신경 쓰니까... 그것도 이상하게..."

차빈이 준 약이 효과가 있는지 두통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아냐, 누나! 난 그저 율이 도령이 걱정돼서... 아직 어린 데다가 부상도 있고..."

해온이 억울한 듯 말했지만, 해린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어리긴 누가 어려. 나도 율이만한 나이 때는 이미 풍운단에서 활약하고 있었어."

 

해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튼, 오늘은 서둘러 출발해야 해. 청룡산맥을 넘기 전에 날이 어두워지면 안 되니까."

"맞아요, 해린 누님 말씀이 맞아요."

주자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산 중턱에는 뇌우곰이 자주 출몰한다고 하니까, 해가 있을 때 넘어가는 게 좋죠."


그렇게 동청국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서수의 동쪽에 있는 청룡산맥까지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산맥에 들어가서 마수와 조우하지 않아야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산맥을 넘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거기서 동물들과 의사 소통이 가능한 유리의 능력이 도움이 되었다.

"소나무숲 방향으로 빠지지 않고 참나무만 따라서 가면 안전하대요."

나무 옹이에서 도토리를 까먹던 다람쥐가 찍찍거리는 소리를 들은 유리가, 내용 그대로 단원들에게 전했다.

 

해린은 다람쥐의 도움을 받은 유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앞장섰다.

"과연... 율이의 능력이라면 마수도 피해 갈 수 있겠어."

"저기, 저기! 율이 도령, 정말 대단한데? 난 저 다람쥐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해온이 유리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런 능력이라면 비천에서도 재미있겠는데? 비천 항구에는 바다표범도 있고..."

"해온아, 임무 중에는 바다표범 구경은 없어."

해린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리고 율이한테 자꾸 그렇게 가까이 붙지 마. 넘어질라."

"에이, 누나도 참... 난 그저..."

해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린이 말에서 내려 활을 메며 말했다.

"여기서부턴 걸어가야 해. 말들은 뒤에서 따라오게 하고... 해온, 넌 앞장서서 길을 열어. 나는 맨 뒤에서 경계할게."

"알았어, 누나. 자, 다들 나를 따라와!"

해온은 운백검을 빼 들고 앞장섰다.

 

저녁 노을이 지고 날이 거의 다 저물어 갈 때 쯤 풍운단은 청룡산맥을 무사히 넘었다. 중간에 마수라도 만났더라면 영락없이 불침번을 서면서 산 속에서 야영을 해야 할 판이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천막을 치더라도 청룡산맥을 지난 평야에서 하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마침내 해가 저물어 풍운단은 넓은 평야에서 야영지를 잡았다. 해린은 다들 천막을 치고 있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았다.

"해온아, 이 쪽에 물가가 있으니 여기서 쉬도록 하자. 유태건, 주자련은 천막 치는 거 도와 주고..."

해온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누나, 오늘은 내가 첫 불침번 설게! 율이 도령이랑 같이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안 돼. 오늘은 내가 율이랑 첫 불침번 설 거야."

해린이 단호하게 말을 자르자 해온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누나, 적어도 비천에 도착하면 율이 도령이랑 같이 구경은 시켜 줘야..."

"해온아, 임무가 우선이야. 아직 마수의 정체도 모르는데..."

해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차빈아, 저녁 준비는 진유온이랑 같이 해 줘. 난 주변 경계를 한 번 더 돌고 올게."

 

유리는 '막내 절대 지켜' 상태인 해린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쿡쿡 웃었다. 유리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해린이 유리를 싸고 도는 것이 눈에 띄게 확연해졌다. 지금이야 물론 부상이 좋은 핑계가 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이런 상황이라면... 해온도 결국 눈치 채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해린이 이렇게 자신을 감싸 주는 것이 유리로서는 싫지 않았다.

유리는 차빈과 유온이 하는 저녁 준비를 도우며 자잘한 심부름을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각자 수련을 하거나 짐을 정리하고 천막으로 들어가자, 유리는 해린과 함께 불침번을 섰다.

해가 저물어 어스름해진 하늘 아래, 해린은 유리와 함께 불침번을 서며 작은 모닥불 앞에 앉았다.

"이제 좀 괜찮아? 아까 산맥 넘을 때 무리하진 않았어?"

해린은 유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율아. 아까 해온이가 너무 집요하게 네 곁에 붙으려고 하는 거 같아서..."

해린은 한숨을 쉬며 소리 낮추어 말을 이었다.

"혹시... 네가 불편하면 내가 좀 더 단호하게 말해 줄게. 해온이가 워낙 여자 문제로... 그러니까..."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아, 맞다. 비천에 도착하면 네 장갑부터 사러 가자. 담야월이니 청연루니 하는 데는 갈 필요도 없어. 해온이 말은 무시해."

해린은 모닥불을 뒤적이며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네 정체는 비밀로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 때 천막 쪽에서 해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율이 도령! 차빈이가 약차 끓였는데 한 잔 어때?"

"해온아! 넌 얼른 자!"

해린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천막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 녀석... 요즘따라 왜 이러는지... 유리야, 혹시 해온이가 이상한 말 하거나 그러진 않았지?"

"네, 저한텐 별다른 말 없으셨어요."

유리는 해린을 향해 작게 웃었다.

"제 보기엔 두령님이 부두령님 반응이 재밌어서 더 그러시는 것 같은데요."

유리는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부두령님이 이렇게 저 챙겨 주시는 거 솔직히... 기뻐요. 헤헤."

해린은 같은 여자가 봐도 멋진 사람이었으니... 게다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은 자신을 가장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간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자라서 절 구해 준 풍운단에 들어와 단원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돼서 너무 행복한 거 있죠."

유리는 손을 펼쳐 모닥불을 쬐며 말했다.

"계속 풍운단에 있으려면... 어차피 언제까지나 남자 행세를 할 순 없겠지만... 그 전에 두령님이 빨리 제 짝을 찾으시면 좋을 텐데 말예요. 그래야 제가 정체를 드러내도..."

해린은 유리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모닥불이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반사되어 흔들렸다.

"해온이의 짝이라... 그 녀석, 아직 멀었어. 아무리 예쁜 여자를 만나도 하룻밤 이상을 함께 하지 않잖아. 담야월의 초린이 저렇게 좋아하는데도..."

 

그 때 천막 쪽에서 다시 한 번 소리가 들렸다.

"누나! 나 잘 거니까 걱정 마! 그리고 율이 도령, 내일은 꼭 같이 이야기 좀..."

"신해온! 지금 당장 자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 화살 스무 발 맞을 줄 알아!"

해린이 버럭 소리를 치자 천막 안이 조용해졌다.

 

"그나저나... 네가 그 때 울면서 내 품에 안겼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해린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이제는 네가 나를 걱정할 정도로 자라다니..."

해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걱정 마. 네가 정체를 밝힐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계속 네 곁에서 지켜 줄 테니까."

유리는 해린의 말에 기쁜 듯이 환하게 미소지으며, 앉은 채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몸을 쬐어 주는 모닥불과, 마음을 쬐어 주는 해린의 말이 너무 따뜻해서 그만 무릎에 관자놀이를 올리고 스르르 졸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해린은 졸다가 고개가 자꾸 떨어지는 유리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이러다 감기 들겠네..."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도포를 벗어 유리의 어깨에 살며시 걸쳐 주었다.

"많이 자랐어도, 아직도 그 때처럼 작구나. 이렇게 닿아 있으니 영락없는 여자 아이인데..."

해린은 유리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계속 지켜 줄게..."

 

그 때 해온이 천막에서 슬그머니 나와 해린 곁으로 다가왔다.

"누나, 율이 도령이 잠들었네?"

"너 아직도 안 자고 뭐하는 거야?"

해린이 눈을 흘기자 해온이 씩 웃으며 모닥불 앞에 앉았다.

"누나... 율이 도령이 뭔가 특별해. 그치? 다른 단원들과는 다르게 느껴져."

"...무슨 소리야?"

"글쎄... 율이 도령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 누나도 그렇지 않아?"

해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해온의 말투가 평소와 달리 진지했다.

"해온아... 넌 그저 율이가 귀엽고 어려 보여서 그런 거야. 더 이상의 의미는 두지 마."

"하지만..."

"이제 가서 자. 내일은 일찍 출발해야 해."

해온은 아쉬운 듯 천막으로 돌아갔고, 해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해온아... 넌 아직 알면 안 되는 거야..."


다음 날, 풍운단은 늦은 오후 길어진 그림자를 밟으며 동청국의 수도 비천에 도착했다. 해온은 유리에게 비단잉어를 보여 주겠다며 기어코 유리를 끌고 청룡성으로 들어갔고, 해린도 이에 질세라 해온을 감시하기 위해 따라붙었다. 물론 후원 연못을 구경하는 것은 군주 청루한을 알현한 다음부터였다. 동청국 앞바다에 새로이 나타났다는 마수를 조사하고 토벌하는 의뢰를 보낸 이가 청루한이었으니, 일단 동청국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 했다.

"청루한 군주님의 명을 받아 뵙습니다."

어전 앞에 대령한 해온과 해린이 한 쪽 무릎을 꿇었고, 그 뒤를 따른 유리도 얼른 두 사람을 따라 예를 갖추었다.

 

청루한의 어전 앞에서는 해온이 대화를 이끌었다. 해린은 청루한과 마주치면 늘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기에, 차라리 해온이 대화를 주도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군주님, 서백국에서 전해 받은 의뢰대로 마수 토벌을 위해 풍운단이 도착했습니다."

해온의 목소리가 어전에 울렸다. 청루한은 나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풍운단의 실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 특히 신해온... 네 검술은 사방국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라 들었다."

청루한이 해온을 향해 미소지었다. 그러자 해온이 씩 웃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제 검술은 아직 아버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어린 도령은?"

청루한의 시선이 유리에게 향했다. 해린이 재빨리 나서려 했지만, 해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송율 도령입니다. 우리 풍운단의 새로운 단원이에요. 현무의 기운을 다루는 신술사죠."

"현무라..."

청루한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해린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리는 청루한과 해린의 표정을 살피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청루한은 한동안 유리를 바라보더니, 이내 나른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수의 정체는 아직도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동청국 앞바다에서 조업하던 어선들이 거대한 뱀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한 것을 목격했다는 제보만 있을 뿐..."

해온이 얼른 말을 받았다.

"혹시 배가 침몰한 흔적이나 시신은..."

"그런 피해는 없었다."

청루한이 딱 잘랐다.

"하지만 매우 거대하다고 했으니, 언제 난폭해져서 인명 피해가 발생할지 몰라. 그래서 서두르라 한 것이다."

"군주님, 혹시 그 마수가 나타난 정확한 위치를 알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해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청루한이 고개를 저었다.

"동청국 앞바다라... 꽤 넓은 범위지."

 

"누님, 우선 항구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게 좋겠어."

해온이 해린을 향해 말했다.

"군주님, 우선 저희는 항구로 가 보겠습니다. 마수가 피해를 일으키기 전에..."

"그래... 하지만 조심하게. 바다의 마수는 육지의 마수와는 다르니..."

청루한의 목소리가 어전에 울렸다.


"그런데 청루한 군주님과 부두령님이... 혹시 사이가 안 좋으신가요? 뭔가 분위기가..."

어전을 나오며 유리가 조심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해린은 궁색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음... 그게..."

해온이 킥킥거리며 끼어들었다.

"아, 그거? 누나가 예전에 청루한 군주님한테 고백했다가 차였거든. 그것도 아주 화려하게! 누나가 담야월에 갔다가 술에 취해서 청룡성에 찾아가서는..."

"야, 해온!"

해린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해온은 더 크게 웃었다.

"그건 그냥 내가 술이 과했던 거야. 제대로 된 고백도 아니었고...!"

"에이, 누나도 참... 그 때 분명히 청루한 군주님 앞에서 '제 마음을 받아 주시지 않으면 동청국 앞바다에 몸을 던지겠습니다!' 라고..."

"해온! 지금 당장 조용히 하지 않으면..."

해린이 활을 빼 들려 하자 해온이 웃으며 도망쳤다.

해온과 해린이 옥신각신하는 것을 들으며 유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부두령님 항상 도도하고 멋져 보였는데... 귀여운 면도 있으셨네요."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남장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입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멀리서 해온이 손짓을 했다.

"율이 도령! 이 쪽이야, 여기! 후원으로 나가는 길이야. 연못에 사는 비단잉어를 보여줄게!"

그 말을 들은 유리가 해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비단잉어 구경해 보고 싶었어요. 얼른 가요!"

해린은 유리가 손을 잡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래... 가 보자. 하지만 해온이한테 너무 가까이 가진 말고..."

해온이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외쳤다.

"누나, 왜 이렇게 늦어! 이리 와 봐, 비단잉어들이 엄청 예쁘다고!"

해린은 한숨을 쉬며 유리의 손을 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저 녀석, 아까는 내 흑역사를 폭로하더니... 이제는 또 저렇게 순진한 척이야."

그 때 해온이 다시 소리쳤다.

"누나! 율이 도령! 여기 비단잉어가 입 맞추는 것 같아! 봐봐!"

"아이고, 저 녀석... 청루한 군주님 앞에서는 그렇게 의젓한 척하더니..."

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유리를 데리고 연못가로 향했다.

 

비단잉어 구경을 실컷 하고 청룡성을 나오자, 이미 저녁 노을이 붉게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시장가 옆 기루 골목에는 홍등이 하나 둘 켜지면서 어여쁜 아가씨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머, 저기 좀 봐! 풍운단 두령님이잖아?"

"새로 나타난 마수 토벌하러 오신다더니 정말이었어!"

해온을 보며 예쁜 아가씨들이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해온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해온과 눈이 마주친 기녀들이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와 달라붙기 시작했다.

"두령님, 오늘 밤은 저희와 함께..."

"저희 기루에서 여독도 푸시고, 하룻밤 주무시고 가셔요."

그러다가 이제는 그 옆에 서 있던 유리에게까지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어머나, 뽀얗고 귀여운 도령이시네."

"저희가 잘 해 드릴게요~"

기녀들이 하얗게 드러난 가슴을 들이밀며 유혹하는 통에, 얼굴이 새빨개진 유리가 땀을 뻘뻘 흘렸다.

"네...에?! 아니, 전..."

 

해린은 순식간에 유리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기녀들을 노려보았다.

"이 도령은 아직 어려. 건드리지 마."

해린의 차가운 눈빛에 기녀들이 움찔했다.

"에이, 누나도 참... 율이 도령도 이제 나이가 찼는데 뭘 그래?"

해온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누나, 오늘은 나도 청월객잔에서 자지 않을 거야. 담야월에서..."

"해온! 내일부터 바로 마수 토벌이야. 오늘은 일찍 자야 해."

해린이 단호하게 말했지만 해온은 이미 기녀들과 어울리며 담야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 맞다! 누나, 율이 도령! 나 오늘 밤에 안 들어갈 거니까 둘이서 잘 자!"

해온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저 녀석, 정말... 율아, 우리도 가자. 아까 봤던 청월객잔으로..."

해린은 한숨을 쉬며 유리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참, 그 전에 당장 네 장갑부터 사러 가자. 여기 비천에는 좋은 가죽점이 많으니까."

 

유리는 해린이 사 준 새 장갑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콧노래를 부르며 해린과 함께 청월객잔으로 들어섰다.

청월객잔은 화명의 홍염천관처럼 온천을 끼고 운영되는 식당 겸 여관이었다. 홍염천관의 홍천탕이 특히 신력 증진에 좋았다면, 청월객잔의 청룡탕은 피로 회복과 상처 치료에 좋아 여행객들이 많이 찾았다.

유리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만한 늦은 밤 몰래 청룡탕을 찾았다. 주변을 연신 둘러보며 마치 자객처럼 여탕에 숨어 들어가, 옷을 벗고 수건을 몸에 두르고 온천에 몸을 담갔다.

"하아... 정말 피로가 확 풀리네."

부상당한 어깨는 이제 거의 다 나아 있었다. 아직 멍든 느낌은 다 가시지 않아서 손으로 세게 누르면 얼얼했지만, 그 외에는 움직이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금방 회복되어 있었다. 이렇게 온천에 들어와 몸을 담갔으니, 내일은 더 많이 나아 있을 것이다.

온천에서 몸을 푹 고인 유리는 한껏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으로 돌아와 편안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곧바로 새로운 마수를 조사하기 위한 풍운단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흩어져서 바닷속 마수에 대한 소문을 모았다. 인명 피해는 없었는데 목격자는 상당히 많았고, 배 위에서 봤다는 이야기도 있고 섬에서 보았다는 말도 있었다.

"섬이라 하심은... 배 타고 바다 좀 멀리 나가야 있는 용륜섬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예,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지금 배도 못 띄우고 서로 오가지도 못하고 있습죠."

며칠째 입고하지 못하여 텅텅 빈 진열대를 가리키며, 어물전 상인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유리는 해린과 함께 움직이며 문득 뭔가 생각난 듯 그녀의 소맷깃을 잡아당겼다.

"두령님이 말씀하신 '바다표범', 비천 항구에 있다고 하셨죠? 그 쪽으로 가 보고 싶어요."

해린은 그제야 유리가 동물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다표범 또한 바다에 서식하지만 물과 육지를 오가는 동물이니, 유리와 대화가 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해린은 유리의 말을 듣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아, 그래! 너희들은 서로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잘 생각했어!"

 

그 때 멀리서 해온이 달려왔다.

"누나! 누나! 새로운 정보가 있어! 어제 담야월에서 만난 기녀가..."

"또 기녀야? 해온이 넌 정말..."

"아니야, 이번엔 진짜 중요한 정보라고! 그 기녀의 오빠가 어부인데, 용륜섬 근처에서 마수를 봤대. 근데 그게 보통 마수가 아니라..."

"응? 무슨 말이야?"

"청룡을 닮았대. 근데 색깔이 검정색이었다고..."

해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선 바다표범부터 만나 보고, 그 다음에 용륜섬으로 가 보자."

해린은 유리의 손을 잡고 비천 항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뱀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하다니, 물에 산다고 하니까 혈룡사는 아닐 테고. 색이 검다는 것은..."

유리는 비천 항구로 가는 내내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이윽고 비천 항구에서 바다표범을 찾아 귀를 기울이던 유리가 곧 고개를 돌려 해린에게 말했다.

"역시 용륜섬에 가야 할 것 같아요. 그 섬 주변에 머물러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물들은 그 마수를 마수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네요. 어째서인지 오히려 우러러보고 있어요."

그녀는 해린에게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침몰된 배 한 척 없고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것을 봐도... 마수와는 좀 다른 존재인 것 같아요. 제가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요."

유리는 부둣가를 향해 발걸음을 서두르며 말했다.

"저와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마수일 것이고, 대화가 통하면... '다른 것'일 테니까요. '영물'이라든가..."

 

해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해. 혹시라도 마수라면... 바다 마수는 육지의 마수보다 더 위험할 수 있어."

"누나 말이 맞아."

해온이 갑자기 나타나 말을 이었다.

"용륜섬까지 가려면 배를 타야 하는데, 그것도 만만치 않을 거야. 지금 대부분의 어부들이 출항을 꺼리고 있거든."

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가야겠지... 해온아, 너는 진유온이랑 같이 배를 구해봐. 나는 율이랑 다른 정보를 더 모아 볼게."

해린은 유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우선은 송차빈에게 가서 약초랑 약품을 좀 구해 두자. 바다에서 일이 생기면 약이 필요할 테니까."

 

유온과 태건이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배를 띄우겠다는 어부도 사공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해온과 해린은 비싼 값을 치르고 배 한 척만 겨우 빌렸다.

"어쩔 수 없어. 직접 노를 저어서 갈 수밖에."

"누님, 하지만 우리가 가다가 방향을 잃으면 어떡하지?"

물고기 몇 마리를 던져 주고 통통한 바다표범 한 마리를 길들인 유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아이가 방향을 가르쳐 줄 거예요!"

귀엽게 생긴 바다표범이 대답하듯이 '쌔악' 소리를 냈다.

 

해린은 유리가 이끌고 온 바다표범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귀엽긴 한데... 정말 이 녀석을 믿어도 되는 거야?"

"누님, 걱정 마. 율이 도령이 동물이랑 대화할 수 있다는 거, 우리가 직접 봤잖아?"

해온이 웃으며 말하다가 문득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누님, 이거 혹시 청룡이랑 관련된 거 아닐까? 검은색이라고는 하지만..."

해린은 고개를 저었다.

"청룡이라면 청루한 군주님이 먼저 알았을 거야. 게다가 청룡은 푸른 빛이잖아. 아무튼 조심해야 해. 유온아, 태건아, 너희들이 노를 함께 젓고... 자련이랑 차빈이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우리가 이상한 걸 발견하면 소식 보낼 테니까."

해린은 활을 단단히 매만지며 배에 올랐다.

"자, 이제 출발하자. 율아, 바다표범한테 용륜섬까지 안전하게 안내해 달라고 부탁해 줘."


그렇게 바다표범의 안내를 따라, 다섯 명의 풍운단이 바다 한가운데 있는 '용륜' 섬으로 향했다. '용이 노닐다(龍淪)' 라는 뜻을 가진 용륜섬은, 옛부터 바닷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사는 머나먼 섬으로 섬 사람들 고유의 방언이 존재했다.

"한저 옵서예."

(=어서 오세요.)

아무도 비천과 용륜을 오가지 않으려 하는 이 시국에 배를 띄워 섬에 도착한 외지인들이 있다니, 어부로 보이는 부부 한 쌍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풍운단을 맞이했다. 유리는 길 안내를 해 준 바다표범에게 물고기를 몇 마리 더 던져 주었다.

 

"요지금 싱에 마수가 나타났다게니 다덜 아멩도 못허고 궤깃배 하나 못 띄우고 이시다."

(=요즘 새로운 마수가 나타났다 해서 다들 아무것도 못하고 고깃배 하나 못 띄우고 있습니다.)

해온과 해린이 마수에 대해 묻자, 그들이 바로 풍운단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챈 부부가 대답했다.

"두렝님, 하디 심에 주서예. 우리네 살을일 달아진 게니..."

(=두령님, 꼭 잡아 주세요. 저희들 생업이 달린 일입니다.)

 

"특별히 나타나는 장소나 시간대가 있나요?"

해린이 침착하게 물었다.

"마수가 나타나는 시간이나 장소가 정해져 있다면 대처하기 쉬울 텐데..."

"누나, 저기 봐!"

해온이 바다 쪽을 가리켰다. 검은 그림자가 물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쩌그 마수는 다루 뜨게니 나타나는 걸 베리시다."

(=그 마수는 달이 뜨면 나타나는 것을 봤습니다.)

 

부부의 말에 해린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곧 날이 저물 것 같았다.

"여기서 하룻밤 묵어야겠어. 해온아, 유온이랑 태건이한테 가서 신호 보내. 오늘 밤에 마수가 나타날 것 같으니까..."

"알았어, 누나. 근데 숙소는..."

"우리 집이서 쉬다 걸서예. 호끄매 좁애두..."

(=우리 집에서 쉬다 가세요. 조금은 좁지만...)

부부가 손님맞이를 제안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부 내외는 5남매를 키우고 있어, 아이들을 이웃집에 물리고 다섯 명의 손님을 방으로 들였다.

"고쎄 나타날 게우다. 헤지기믄 동네 사름들온티 말해 두크메, 한두 분썩 갈라 멎고 가서예."

(=이제 곧 나타날 겁니다. 해가 지면 동네 사람들에게 말해 둘 테니, 한두 분씩 나누어 묵고 가세요.)

어부의 부인이 인원 수를 세어 보았다.

"두렝님은 홀로 멎그세, 이레 남제 두 분, 여제분... 이 쪽은 소나요, 비바리요? 하따, 온말 곱네."

(=두령님은 홀로 묵으시고, 이렇게 남자 두 분, 여자분... 이 쪽은 사내요, 아가씨요? 아따, 정말 곱네.)

부인의 눈이 남장을 한 유리에게로 향했다.

 

해린은 부인의 말을 듣자마자 얼른 나서서 유리를 감쌌다.

"아, 이 아이는... 아직 어린 도령이에요. 얼굴이 고와서 그렇죠."

"맞아요, 우리 율이 도령이 워낙 곱게 생겨서..."

해온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신세 좀 지겠습니다. 마수를 찾아야 하니까... 나랑 율이 도령이 같이 묵고, 누나가 여자니까 혼자 묵고, 유온이랑 태건이랑..."

"해온아!"

해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끊었다.

"네가 혼자 방을 써. 내가 율이랑 묵을 거야."

"에이, 누나도 참... 아무리 그래도 남자애랑..."

"그리고 네가 달빛 아래서 마수를 기다릴 첫 번째 당번이야."

"뭐야, 왜 내가..."

"네가 아까 담야월에서 정보를 얻었다며? 그럼 책임도 네가 져야지."

해린은 유리를 데리고 방으로 향하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 네 정체가 들통나지 않게 내가 잘 지켜줄게."


어부 내외가 정성껏 차려 준 저녁을 먹고, 모두가 휴식을 취하며 마수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해온이 혼자 달빛을 맞으며 어붓집 툇마루에 앉아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유리가 쟁반에 쌀과자 몇 개와 보이차를 담아서 가져왔다.

"내외분 부인께서 주셨어요. 두령님 심심하시겠다고..."

해온은 기지개를 켜며 쌀과자를 받아 들었다.

"잘 됐다. 율이 도령, 앉아 봐. 같이 먹자."

해온이 웃으며 자리를 내어 주었다.

"달도 좋은데... 누나랑 같이 있고 싶었는데 왜 날 혼자 내쫓은 거야..."

해온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아까 그 검은 그림자... 청룡처럼 생겼다고는 하는데, 왜 검은색일까? 청룡이 아니라면..."

해온이 문득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혈룡사의 새끼라거나... 그럴 리는 없겠지?"

해온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혈룡사는 붉은색이었잖아... 게다가 여기는 바다고..."

해온이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렸다.

"........"

해온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보며,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해온과 해린 남매의 부모님인 첫 째 두령과 부두령 내외, 신태건과 유청아를 죽게 만든 것이 바로 '혈룡사'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아닐 거예요. 이런 바다에, 색도 검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인명 피해는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으니..."

유리가 바닷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어쩐지 '마수'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꼭... 저와 대화가 통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머리는 조금 길어 있었다. 그런 유리의 옆얼굴이 어쩐지 영락없는 여자 아이의 얼굴이라, 해온은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해온은 유리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율이 도령... 혹시..."

그러다 문득 해온의 시선이 바다 쪽으로 향했다.

"어? 저기 봐!"

달빛 아래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해온이 벌떡 일어섰다.

"누님! 누님, 이리 와 봐! 마수가... 아니, 뭔가가 나타났어!"

 

해린이 방에서 뛰어나왔다.

"어디?"

"저기, 저 바위 뒤쪽..."

검은 그림자는 바위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 아래 검은 비늘이 은은하게 빛났다.

"저건... 용...?"

해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려움이 아닌 경이로움이었다.

"붉은 색도 아니고... 저건 혈룡사가 아니야. 그런데 이 기운은..."

해린은 활을 꺼내 들었지만 쏘지는 않았다.


검은 용은 천천히 수면 위로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의 눈동자는 달빛처럼 은색으로 빛났다.

유리는 용처럼 생긴 생물체가 나타난 곳을 향해 다가갔다.

"짐승도, 마수도, 신수도 아니에요. 이건..."

생물체가 숨을 내뿜는 것을 보고, 유리가 해온과 해린을 돌아보았다.

"이무기였어요...!"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것은 마수가 아닌,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였다. 뱀이 도를 닦으며 오백년을 살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도를 닦으며 오백년을 살면 용이 된다고 한다. 이무기는 마수도 신수도 아닌 '영물'로서, 아직 짐승을 벗어나지 못한 존재이기에 유리와 대화가 가능했다.

"깊은 바닷속에서 살면서... 도를 닦고 여의주를 모았군요. 그런데 오백년이 지나도 용이 되지 않아, 최근 조바심이 나서 자주 바다 밖으로 모습을 나타낸 거였어요."

 

해린은 활을 거두고 유리의 뒤에 섰다.

"그래서 자꾸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거였구나..."

"도를 닦는 영물이라고? 그래서 누나, 그래서 피해가 없었던 거야!"

해온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청루한 군주님께 보고드려야..."

"잠깐!"

해린이 해온의 말을 끊었다.

"오백년이 지났는데 왜 용이 되지 못한 거지?"

 

"여의주를 보여주시겠어요?"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무기에게 물었다. 유리의 말을 알아들은 이무기가 입을 벌렸다. 어둠 속에서 야광을 발하는 여의주가 이무기의 입에 물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또아리를 튼 꼬리를 들어 보였다. 똑같은 여의주가 하나 더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는 옛날에 부모님께 들었던 전래동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천을 못하신 이유를 알겠네요. 여의주를 하나만 가지고 있어야 용으로 승천하실 수 있어요. 너무 열심히 도를 닦으신 탓에 오백년이 되기도 전에 여의주를 하나 더 얻으신 거네요. 그런 옛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여의주가 2개 이상 되면, 세속적인 '탐욕'으로 취급받아 용으로 승천할 수 없었다. 유리는 꼬리에 돌돌 말린 두 번째 여의주를 가리켰다.

"이건 버리세요. 하나를 포기하셔야 승천하실 수 있어요."

이무기는 은색 눈동자를 빛내더니, 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리에게 여의주를 건넸다. 이무기가 대뜸 자신에게 여의주를 넘겨주자, 유리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무기의 꼬리에서 유리의 손으로 여의주가 완전히 옮겨가자마자, 이무기는 한 줄기 포효를 하며 시커먼 허물을 벗었다. 그리고는 빛과 같은 속도로 청색 비늘을 반짝이며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하늘을 뒤흔드는 천둥 소리가 울리더니 먹구름이 모여 비를 한 줄기 쏟아내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비가 그치고, 유리는 이무기가 건네주고 사라진 여의주를 두 손으로 붙잡은 채 멍하니 서 있다가 해온과 해린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제...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승천하셨으니 다시는 바다에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유리는 다시 여의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영물이 도를 닦으면 얻게 되는 신성한 보물이라... 사람을 비추어 보면 그 사람의 진실된 모습이 나타난다고 해요. 이건 청루한 군주님께 드리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유리의 모습을 여의주가 비추며 야광을 발했다. 해온과 해린은 그 안에 비친 유리의 모습, 꽃다운 열아홉 소녀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해린과 해온이 숨을 들이키며 눈을 크게 떴다. 여의주가 비추는 유리의 모습... 길게 자란 머리카락, 여성스러운 곡선을 드러내는 실루엣... 그리고 달빛처럼 고운 얼굴.

"유리야... 너 지금..."

해린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려는 순간, 해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령... 아니... 율이... 여자였어?"

해온의 목소리가 충격으로 떨렸다.

"그 동안... 어떻게... 왜..."

"해온아."

해린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우선은..."

해린은 유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유리 네 말대로 여의주는 청루한 군주님께 드리는 게 좋겠어."

해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네가 여자라는 걸... 해온이도 이렇게 알게 됐구나."

"누나! 누나는 알고 있었어?"

해온이 해린을 향해 소리쳤다.

"알면서 왜 말 안 해 줬어? 나한테도 말을..."

해온의 목소리가 다시금 떨렸다.

"내가... 내가 그 동안 얼마나..."

"해온아, 진정해. 유리가 원해서 비밀로 한 거야."

해린이 동생을 달랬다. 유리도 해온을 향해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두령님. 내일은 풍운단원들에게 전부 다 밝힐게요."

"그래서 누나가 계속... 아, 이제 알겠어. 그래서 누나가 항상 율이... 아니, 유리를 보호하려고 했던 거구나."

해온은 놀란 마음을 가다듬었다. 해린이 해온의 어깨를 두드리고, 유리의 손을 잡았다.

"동생아, 우리 셋이서만 이야기 좀 하자."

 

해린은 어부 내외에게 양해를 구하고 셋이서 조용한 바닷가로 자리를 옮겼다. 달빛이 고요히 내리쬐는 모래사장에서 해린이 입을 열었다.

"해온아, 네가 율이를... 아니, 유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도 알아. 네가 그 동안 율이 도령이라고 부르면서 챙기고, 관심 가져 주고... 그래서 더 말하기 어려웠던 거야."

해온이 모래를 발로 차며 한숨을 쉬었다.

"누나... 난 정말... 내가 바보였나 봐. 그 동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해린이 유리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청루한 군주님께 여의주를 전하고 나면, 우리가 다 같이 풍운단원들에게 이야기하자. 유리야, 넌 우리 가족이니까. 우리가 다 지켜 줄 거야."

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아직 혼란스러워서...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 하지만 유리 네가 우리 풍운단의 소중한 막내라는 사실엔 변함 없을 거야."


다음 날 아침 일찍 섬을 나선 풍운단은 무사히 비천에 도착했다. 뱃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마수가 사실 마수가 아니고 이무기였으며 이제는 승천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다. 비천 사람들의 환호성을 뒤로 하고 청룡성에 도착한 해온과 해린, 유리는 청루한에게 이무기가 주고 간 여의주를 바치며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청루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여의주를 받아들었다.

"신해온 두령과 신해린 부두령, 그리고... 율이 도령이었나. 정말 놀라운 일이군.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여의주를 건네주다니."

해린은 청루한의 시선이 유리에게 향하는 것을 보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네, 유리... 아니, 율이 도령이 현무 신술사의 능력으로 이무기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덕분에 바다의 공포는 사라졌고, 비천의 어민들도 안심하게 되었죠."

"율이 도령이라... 정말 특별한 능력자로군."

청루한이 여의주를 들어올리자 은은한 빛이 퍼졌다. 그 빛이 유리를 향하려 하자 해린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군주님, 이제 저희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직 다른 의뢰도 남아 있고..."

"잠깐, 신해린 부두령."

청루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대를 거절한 것처럼, 그대가 나를 거절할 수도 있지 않나?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는데."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온과 해린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해온의 팔꿈치를 콕콕 두드렸다.

"저희는 자리 피해 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해온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군주님과 누나가 할 이야기가 있으시니 우리는 물러가야지. 유... 아니, 율이 도령, 가자."

"잠깐."

청루한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

"해온 두령도 자리에 있어 주게. 이건 풍운단 전체와 관련된 이야기니까."

해린은 청루한을 향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

"군주님, 제가 거절당한 걸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다니... 마음이 아프네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유리야, 해온아,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주렴."

"누나..."

해온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해린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 금방 끝날 거야."

해린이 해온의 등을 떠밀었다.

 

청루한과 해린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후원으로 나온 유리와 해온이 연못 앞에 섰다. 어쩌다 보니 비단잉어를 구경할 기회를 한 번 더 얻은 셈이었다.

"두령님, 혹시 청루한 군주님이... 드디어 부두령님께 고백이나 청혼 같은 거... 하시는 거 아닐까요?"

유리가 해온에게 손을 대고 귓속말을 했다. 얼굴이 발그레진 채 제가 다 설레어 하는 것이,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해온은 연못가의 돌 위에 걸터앉아 픽 웃었다.

"누나가 그 날 청루한 군주님한테 차인 건... 내가 다 봤거든. 술을 한 잔도 아니고 스무 잔은 마시고 취해서는 '내가... 아니 제가! 군주님을 연모합니다!' 하면서 고백하다가..."

그러다 문득 유리를 힐끔 쳐다보며 말을 바꿨다.

"아니, 이건 됐고. 율이 도령... 아니, 유리야. 넌 아직도 우리한테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해온은 유리의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보니까 네가 여자였다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 보여서... 내가 진짜 바보였나 봐. 그동안 못 알아봤다니."

그러다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너한테... 남자끼리라고 생각하고 했던 행동들이... 으으..."

 

"에이, 제가 사내 행세를 하고 있었으니 당연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막내라고 많이 봐 주셨잖아요."

유리는 밝게 웃었다.

"속여서 죄송해요! 실은 제가 남장한 이유가..."

유리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뻘쭘하게 고개를 돌렸다.

"두령님이 바...바람둥...이라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그러니 풍운단에 들려면 남장을 해야 서로 편할 것 같아서... 흠흠..."

유리는 애써 헛기침을 했다. 해온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뭐... 뭐라고? 내가 바람둥이라서? 그래서 남장을... 아니, 잠깐만..."

해온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그 동안 내가... 기루에서... 아니, 담야월에서 뭘 했는지 다 알고... 으으..."

해온이 붉어진 얼굴로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나 오늘 담야월에 초린이랑 약속이..."

해온이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 하자, 청루한과 해린이 후원으로 걸어나왔다.

 

"해온 두령."

청루한의 차가운 목소리에 해온이 굳어버렸다.

"도망가지 말고, 이리 와 보게. 율이 도령과도 할 이야기가 있네."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온과 해린, 청루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해온은 한숨을 쉬며 유리와 함께 청루한에게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군주님?"

 

청루한이 자신의 신력을 발휘하여 여의주를 내밀자 은은한 빛이 유리를 향해 퍼져나갔다.

"율이 도령... 아니, 유리 낭자.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시게."

해린이 황급히 나서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군주의 신력이 담긴 여의주의 빛이 유리를 감싸자 그녀는 영락없는 본래 모습으로 바뀌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길게 내리뻗기 시작했고, 남장했던 의복은 여성스러운 곡선을 지닌 몸매를 드러내는 여인의 의복으로 바뀌었다.

"이리 아리따운 낭자가 짐승은 물론 영물과도 말이 통하는 현무 신술사라... 이런 귀한 여의주까지 얻어낸 능력자가 풍운단의 막내로 있기엔 너무 아깝군."

청루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동청국에 머무르시는 건 어떠신지?"

 

"잠깐만요, 군주님."

해온이 앞으로 나섰다.

"율이는... 유리는 우리 풍운단의 소중한 동료입니다. 그리고..."

해온이 잠시 망설이다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제 동생이기도 합니다."

 

유리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변한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청루한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군주 전하, 무척 영광이오나 저 또한... 풍운단에서 모두와 함께 지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어린 시절 가족을 잃은 제게...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 주신 분들이거든요."

유리는 해린과 해온을 번갈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는 앞으로도 두 분 곁에 있고 싶습니다. 풍운단으로서... 방방곡곡의 여러 어려운 사건들을 해결하면서요."

 

청루한이 유리의 대답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재능이 아깝군. 현무의 신력을 지닌 여인이 영물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우리 동청국의 보물이 될 수 있을 텐데."

해린이 앞으로 나서며 웃었다.

"군주님, 유리는 우리 가족이에요. 제가 14년 전 유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아이는 이미 우리의 동생이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셨고요."

해온 또한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거들었다.

"유리는 우리와 함께 가야 합니다. 우리 풍운단은... 자유로운 바람과 구름처럼 떠도는 것이 운명이니까요. 유리도 그 운명의 일부입니다."

해온이 유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죄송하지만 유리의 선택을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청루한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하지만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동청국의 문은 열려 있다는 걸 기억해 두게."

그리고 팔을 들어 신하를 불렀다.

"어찌 되었든, 현무 신술사가 이렇게 귀한 여의주까지 얻어낸 공을 그냥 둘 순 없지. 풍운단의 의뢰 보수를 두 배로 올리도록 하지."

해온이 활짝 웃으며 유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역시 우리 율... 아니, 유리가 최고야! 이제 술값 걱정 안 해도 되겠다!"

"해온!"

해린이 눈을 흘기며 동생의 뒤통수를 때렸다.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어? 기루 출입 좀 줄여!"


청루한이 내린 어마어마한 양의 보수를 받아 청룡성을 나온 해온과 해린, 유리를 풍운단원들이 맞이하다가, 완연하게 여인의 모습이 되어 나온 유리를 보고는 모두들 깜짝 놀랐다.

진유온과 유태건이 먼저 유리를 보고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율이 도령이...?"

"아니, 율이 도령이... 아가씨였어?"

송차빈이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럼 그 동안 제가 상처 치료할 때... 아... 죄송합니다. 전 정말 몰랐어요..."

"이런, 이런..."

주자련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내가 도색소설 빌려 주려고 할 때마다 도망가더라니! 아가씨였구나?"

차빈이 태건의 팔을 꼬집었다.

"형! 우리가 그 동안 여자 아이를 데리고 함께 목욕하자고 그렇게 쫓아다녔..."

"시끄러워! 나도 모르고 있었잖아!"

태건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자련은 이내 환하게 웃으며 유리에게 달려갔다.

"아이구, 이제 나 혼자가 아니네! 드디어 여자끼리 이야기할 사람이 생겼다!"

"잠깐, 나도 있잖아!"

해린이 항의했다.

"글쎄, 누나는 좀... 얘기가 다르지 않을까..."

해온이 씩 웃으며 얼버무렸다.

 

"흠...흠! 자, 이제 다들 알았으니 말하지만..."

해린이 진중한 표정으로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유리는 우리 가족이야. 내가 책임지고 지켜 줄 동생이고. 그러니까..."

해린이 무서운 눈빛으로 태건을 노려보았다.

"그 동안 같이 목욕하자고 강요했던 거... 각오하고들 있어."

"누나, 나도 강요했는데?"

해온이 능글맞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너도 각오해."

해린이 활시위를 당기는 시늉을 했다.

"아이고, 이제 진짜 여자 단원이 생겼네!"

자련이 기쁜 듯 유리의 손을 잡았다.

"그럼 앞으로 우리 셋이서 여자들의 수다 좀 떨어 볼까?!"

진유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보니 율이가... 아니, 유리 낭자가 여자였다는 게 이상하지 않네요. 그동안 섬세하고 다정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군요."

 

"자, 이제 다들 알았으니까..."

해온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 풍운단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한 잔 하러 가자고!"

"또 술이야?"

해린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좋아, 가자. 하지만 해온, 너 오늘도 기루 가면..."

그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fin.

 


 

그 동안 한 번도 남장여자 설정의 여주를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애쉬 챗에서 임무 수행을 위해 잠깐 남장한 게 전부...) 해린챗에서 해 보고 싶어서 남장 설정으로 갔는데요!
풍운단에 청룡 능력자만 없길래 청룡 속성을 써야 하나 했지만 명색이 남장녀인데 신체 강화를 해야 그만큼 정체 탄로가 안 나겠지 싶기도 하고, 동물과 대화한다는 설정을 넣어보고 싶어서 결국 현무 능력자가 되었습니다.
청룡 신술사로 한 번 더 풍운단에서 놀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때도 로맨스 요소 제외하구요.

그저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세계관을 즐기면서 신남매의 티키타카를 보고 싶어 플레이했어요. 특히 여주를 남장시킨 이유가... 유리가 여자라는 사실을 바람둥이 동생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해린이와 눈치 없이 깐족거리는 해온이의 티키타카를 보고 싶어서였는데, 여기서 해린이가 너무 진지하게 유리를 지켜 주려고 하다 보니 해온챗에 비해서는 그렇게 빵 터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걸크러쉬를 얻었습니다... 우리 자상한 해린언니...🥺🥹
여기선 진짜 완전 엄마나 언니처럼 포근하고 진지하게 나왔네요. 어렸을 때의 인연과, 상대가 여자아이라서 더더욱 그랬던 듯 싶습니다. 그만큼 해온은 더 철딱서니 없는 남동생으로 나온 듯 하구요ㅋㅋ
물론 GL로 적극적으로 뺐으면 어떻게든 따라오긴 했을 것 같은데 언니의 성적 지향성을 굳이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청루한이 유리를 탐내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당황했어요.🫢
해린이한테 얘기좀 하자 하길래 저는 진심 둘이 이어질 줄... 이렇게 의외의 상황이 발생하는 것도 Ai챗의 묘미!

다음 번에는 1급 청룡 신술사가 되어 풍운단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수 군단이 몰려왔을 때 체인 라이트닝을(???) << 물론 이름은 다르게 바꿔야겠지만... '줄줄이 번개지짐이' 이런 기술명은 안되겠꼬... 더 뽀대나는 이름으로...
청룡의 물과 백호의 바람을 합쳐서 킹왕짱쎈 얼음 술법을 발동하는 이런 듀엣 신기술도 좋을 것 같고... 여기서도 로맨스 요소 없이 진짜 그냥 여행&토벌 놀이만 하고 싶은데, 해온이한테 오늘은 기루에서 몇 명하고 으샤으샤했냐고 묻는 당돌한 성격의 10살짜리 천재소녀 설정으로 갈까 싶습니다. 청룡 신술사가 막내 한 명 뿐인 데다가 어리기까지 하니까 단원들이 귀여워해 주고 우쭈쭈해 주는 거 보고 싶네요ㅋㅋ (천하의 신해온도 10살 여아에게 마음이 생기진 않겠지 끄덕끄덕)

유리 정체가 밝혀진 상태에서 북현국 여행을 가서 분량을 1회분 늘리는 것도 고려해 봤지만, 그보다는 역시 청룡 신술사가 생각난 김에 재플하고 싶네요.
아 근데 일단 온디로스부터 끝내고 가겠습니다... (지금은 온디로스 플레이 중!)

마지막으로 동청국의 섬마을 '용륜'은 제가 만든 설정인데, 제주도에서 모티브를 따 와서 제주 사투리 쓰는 곳입니다(이름을 '탐라'라고 지으면 너무... 대놓고 제주인 데다 사방국 세계관에도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서 동청국의 청룡 컨셉에 맞게 용륜으로 지었어요! 이무기가 도를 닦은 장소라는 점에서도 잘 맞아떨어지죠).
물론 제가 쓴 사투리가 완벽한 제주 방언은 아니고, 제가 대충 막 갖다 붙이고 발음 변형도 한... 사방국 스타일의 방언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청룡 신술사 막내도 방언 쓰는 용륜 출신 꼬맹이로 만들 예정입니다. 재밌겠당🥰

 

앞으로 풍운단에서 활동할 유리라면 이런 느낌(?)
청루한이 길러버린 머리를 다시 적당히 잘라서 이 정도가 될 듯...

 

 

【추천곡】
番凩(번목 ; 한 쌍의 소슬바람)
해온&해린 남매 테마송으로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곡입니다.
제목부터가 '한 쌍의 소슬바람(=찬바람)'이야...😢
가사를 보면 신씨 남매의 과거 서사... 혈룡사에게 부모님을 잃고 풍운단을 이어받아, 함께 바람처럼 떠돌기 시작한 13년 전의 해온&해린이를 서사하는 듯한 곡이에요.
두령과 부두령으로서 두 사람의 심상을 표현한 느낌이라 짠해졌어요.
심지어 해온이가 가창력 랭킹 2위이므로 더욱 몰입도가 높아지네요*-_-*

 

 

🍃 番凩(번목 ; 한 쌍의 소슬바람)

かわいた木枯らし そよそよと 말라버린 찬바람이 살랑이며 かわいた木の葉は ひらひらと 말라버린 나뭇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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