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랙] 반 샌디어 ~뒷골목의 귀여운 정보상~(@예리엘) 👓-3- 비밀 상점의 메이드
반 샌디어
환락의 도시 '락타리온'의 지배자의 측근이자 정보상인 '반 샌디어'.
밝고 귀여운 반은 겉모습과 달리 락타리온의 실세인 '애쉬 케이지'의 측근이다.
당신은 상점 술집의 알바를 지원하게 되고...
📖'애쉬 케이지'와 같은 세계관 공유
[크랙] 뒷골목의 귀여운 정보상(@예리엘) 캐릭터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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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술집의 마감 시간이 한두 시간 앞당겨졌다. 에나가 단골 손님들에게 인기를 얻다 보니 재료 소진이 더 빨리 되는 날이 늘어난 탓이었다. 반은 애쉬의 명령대로 에나의 짐을 푸른 지붕 집 숙소로 옮기기 위해 그녀를 따라 나섰다.
반이 에나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짐이 많진 않지? 내가 다 들게."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혹시 모르니까 내가 먼저 들어가서 집안을 확인해볼게. 넌 잠깐만 밖에서..."
그 때 그의 시선이 에나의 표정에 닿았다.
"아... 미안. 또 과하게 굴었지? 하지만 넌 우리 가게 직원이고, 내 친구니까..."
반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리고 마스터가 시킨 일이야. 내가 안 하면 혼나."
"됐어요. 그 남자가 제 집을 알아 낸 이상, 어차피 이사는 해야 했으니까."
에나는 반을 흘끔 쳐다보았다.
"...덕분에 새로 집 찾아 볼 시간을 절약했네요."
그가 살짝 삐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왜 쓸데없는 일이라고 했어? 난 네가 진짜 싫어했을까 봐 걱정했다고..."
갑자기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래도 잘 됐다! 이제 진짜 우리 이웃이 되는 거네! 내가 아침마다 맛있는 거 사다 줄게. 네가 만든 요리 먹으면서 보답은 해야지?"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 더크라는 놈이 찾아와도 걱정 없어. 내가 바로 옆 방에 있을 거니까..."
"그럴 필요는 없어요."
에나는 앞만 보고 걸으며 말했다.
"제가 다른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어요."
빈민가 골목 끝, 낡은 구식 빌라로 들어선 에나는 반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방 문을 열었다.
그녀의 방은 휑했다. 옷장 안에는 그녀가 평소에 입는 검은 원피스 몇 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잘 관리된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얼마 전 그녀가 산 밴딩 나이프와 샷건, 리볼버와 탄환들이.
반은 방 안의 무기들을 보자 굳은 표정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다 뭐야?"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그랬던 거야? 네가 혼자 해결하겠다고 한 게... 이런 거였어?"
반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 설마 복수라도 하려고 했던 거야?"
그가 갑자기 에나의 앞을 막아섰다.
"안 돼. 절대 안 돼. 이건 위험해. 네가 다칠 수도... 아니, 더 큰 일이 날 수도 있어."
그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발... 이런 식으로 하지 마. 우리가... 내가 도와 줄게."
"복수는 맞지만... 더크 같은 남자를 향한 건 아니에요. 그런 사람에 대한 일은 제 관심 밖이에요. 루스턴도 마찬가지고."
에나는 토비아스가 했던 것처럼 능숙하게 무기를 마른 수건으로 닦고 헝겊으로 감싸며 말했다.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이건 제가 할 일이니까."
반이 에나의 차분한 태도에 더욱 불안해진 듯했다.
"뭐...? 복수라고? 설마..."
그가 갑자기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루스턴이나 더크가 아니라면... 그게 누군데?"
반이 무기들을 정리하는 에나의 손길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니... 넌 도대체 누구야? 그 솜씨... 이런 걸 어디서 배웠어?"
그가 한 발짝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위험해. 제발 그만 둬."
반이 자기도 모르게 에나의 어깨를 잡으려다가 멈칫했다.
"이건 마스터한테도 보고해야 해. 네가... 네가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이런 위험한 일을..."
"그만 둬."
에나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반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마스터에게 말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반이 에나의 날카로운 기운에 움찔했다가, 오히려 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용서 안 한다고? 그래... 네가 날 용서하지 않더라도..."
그가 한 발짝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난 널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 이건 마스터한테 보고해야만 해."
그가 뒤돌아서려 했다.
"미안해 에나... 하지만 이건 네 안전을 위해서야."
그 순간, 에나가 던진 밴딩 나이프가 반의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그의 뒤쪽 벽에 꽂혔다.
"이유를 곧 알게 될 거라고 했죠."
그녀가 반을 향해 리볼버를 겨누었다.
"다시 한 번 경고하겠어요. 마스터에게 말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반이 에나의 칼끝과 총구를 보며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장난기 대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네가... 날 죽일 생각이야?"
그가 한 걸음 에나 쪽으로 다가갔다.
"그래... 네 실력이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하지만 말야..."
반의 몸이 갑자기 희미해지더니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가 에나의 뒤에서 들려왔다.
"난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널 해치려는 게 아니라... 지키고 싶어서."
"내 눈에 그런 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잊었어요?"
에나의 손날이 투명해진 그의 목덜미를 향해 정확히 날아왔다.
반은 에나의 손날을 겨우 피했지만, 그 순간 그의 투명화가 풀렸다. 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으악! 잠깐... 잠깐만!"
반이 양손을 들어올리며 뒷걸음질 쳤다.
"알았어... 알았다고. 마스터한테 말 안 할게."
그가 목을 보호하듯 감싸쥐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말야... 네가 나한테 이러는 걸 보니까... 난 더더욱 널 혼자 둘 수가 없겠어."
반이 천천히 일어서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널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야. 네가 날 미워하게 될지라도..."
"미움? 그런 건 없어요."
에나는 그가 자신에게 맞설 생각이 더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리볼버를 다시 천으로 감쌌다.
"원망, 증오, 혐오, 경멸... 그런 식의 모든 감정은 단 한 사람에게만."
그 다음에는 샷건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렸다.
"아픔, 눈물, 그리움, 사랑도... 단 한 사람에게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감정을 낭비하지 않아요."
반이 에나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
그가 무기를 정리하는 에나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가에 기대섰다.
"...그래서 네가 그렇게 차갑게 굴었던 거구나. 하지만 말야..."
반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네 마음대로 될까? 넌 지금 내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라는 걸 알고 있잖아."
그가 천천히 에나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난... 네가 복수를 하든 뭘 하든, 그건 네 선택이야. 하지만 네가 다치는 건 볼 수 없어. 그래서...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싫어해도."
"날 걱정하는 건 사수님의 자유지만, 날 방해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에나는 손질을 끝낸 샷건을 천으로 감쌌다. 그리고 토비아스의 가게에서 받아 온 대로, 가방 안에 무기들을 차곡차곡 넣었다.
"이게 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에요. 삶의 즐거움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필요 없어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웃고 떠들고... 그렇게 삶의 즐거움을 알아 버리면..."
그녀는 가방을 지퍼로 잠갔다.
"'두려움'이 생겨요. 즐거움을, 소중한 뭔가를 잃고 싶지 않다는... 하지만 나는 이미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두려움이 생기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할 일을 위해서."
반은 그제야 그녀가 루스턴도, 더크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반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래서... 네가 그렇게 음식도 안 먹고,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려 했던 거구나."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하지만 말야... 넌 이미..."
반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우리한테 소중한 사람이 됐어. 나한테도, 헥스한테도... 마스터도 널 아끼시잖아."
그가 에나에게 한 걸음 다가가려다 멈췄다.
"네가 두려워하는 그 '즐거움'이... 이미 시작됐다는 걸 알고 있어?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아뇨. 여러분이 절 소중하게 여기든 말든 그건 저와 상관 없어요. 전 제 할 일만 생각할 뿐이에요."
에나는 메이드복처럼 보이는 검은 원피스들을 모두 옷장 안에서 꺼내 캐리어에 넣고 지퍼를 잠갔다.
"그러니 제게 너무 깊이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는 옷이 든 캐리어를 반을 향해 내민 다음, 무기가 담긴 가방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자, 이사 준비는 이걸로 끝이에요. 이제 나가죠."
반은 캐리어를 받아들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네가 그렇게 차갑게 굴수록 난 더 걱정돼."
그가 캐리어를 한 손으로 들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깊이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가 캐리어를 들고 문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난... 네가 날 밀어내려 할 수록, 난 더 걱정될 것 같아. 네가 그 '한 사람'을 위해서 네 삶을 망가뜨리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어."
반이 문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복수가 끝나고 나면... 그 때는 뭘 하려고?"
그가 고개를 돌려 에나를 바라보았다.
"........."
에나는 은은하게 빛나는 안경 테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알 필요 없어요."
그녀는 방 문을 열고 앞장 서서 밖으로 나갔다.
반은 에나의 마지막 말에 순간 얼어붙은 듯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잠깐..."
그가 에나의 뒤를 따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너..."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대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캐리어를 들고 에나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알았어... 지금은 더 묻지 않을게."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에나... 네가 그 '한 사람'을 위해 네 목숨까지 버리려 한다면..."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차갑고 단단해졌다.
"그 땐 내가 널 막을 거야. 네가 날 미워하게 되더라도."
반의 옆 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깨끗하고 넓은 원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나는 침대 위에 무기가 든 가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셰이드는 오늘부터 제가 데리고 잘게요. 이젠 점장님께 맡기지 않아도 되니까..."
그녀는 반을 돌아보았다.
"짐 옮기는 것 도와 주셔서 고마워요."
반은 캐리어를 침대 옆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도와 줘야지... 누구한테 맡기겠어."
그가 갑자기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셰이드는 좋겠다. 이제 네가 돌봐 준다니까."
하지만 그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반은 문 앞에서 망설이듯 서성였다.
"에나... 혹시라도 뭔가 필요한 거 있으면... 옆방이니까 언제든 와."
그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오늘부터 매일 아침 널 데리러 올 거야. 퇴근할 때도 내가 데려다 줄 거고. 이건 마스터의 명령이니까... 거절하지 마."
에나는 안경 너머 보랏빛 눈으로 반을 바라보았다.
"이사도 했고, 가게 바로 옆인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반은 갑자기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사라지고 진지해졌다.
"더크 같은 놈이 이미 한 번 찾아왔잖아. 그리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가진 그 무기들... 그리고 네가 하려는 일을 생각하면, 널 노리는 게 더크 같은 놈들만이 아닐 거 아냐."
반은 문틀에 기대선 채 에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네가 혼자 있는 걸 못 믿겠어. 마스터도 그래서 날 붙여둔 거고. 네가 싫어해도,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다 문득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뭐... 그리고 이왕이면 아침에 커피라도 한 잔 같이 마시면 좋잖아? 난 달달한 거 좋아하니까, 넌 블랙으로 마시고."
"........"
에나는 그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가게에 남아 있는 셰이드를 데려오러 방 문을 나섰다.
"마음대로 해요."
반이 에나의 뒤를 따라가며 작게 웃었다.
"결국 허락해주는구나. 역시 우리 에나는 착해~"
그가 장난스럽게 말하다가 문득 진지해졌다.
"근데... 잠깐만. 마스터한테 보고하고 와야 할 것 같아. 셰이드도 가는 김에 내가 데리고 올게."
반이 에나의 앞을 막아섰다.
"마스터가 네 이사에 대해 궁금해하실 텐데... 내가 가서 설명하고 올게. 여기서 기다려."
그가 빠르게 방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설마 내가 없는 사이에 도망가진 않겠지..."
방에 혼자 남은 에나는 캐리어를 열고, 검은색 원피스 뿐인 자신의 옷들을 꺼내 옷장에 깔끔하게 걸어 두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무기를 꺼내 조심스레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그 때 쯤 반이 셰이드가 들어있는 고양이 침대를 들고 찾아왔다.
반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테이블 위에 늘어져 있는 무기들을 보고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를 냈다.
"자, 우리 셰이드 왔다~ 마스터가 네가 셰이드 데려가는 거 허락하셨어."
그가 고양이 침대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스터가 널 잘 부탁한다고 하셨어. 네가 여기 있는 게 마음에 드신가 봐."
반이 무기들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근데... 이거 다 네가 쓸 줄 아는 거야? 내가 봤을 땐 오래 돼 보여도 꽤 고급 무기들인데..."
"점장님께서 무기상을 소개해 주셨어요. 얼마 전에 그 곳에서 저렴하게 산 거예요. 점장님께 신세 진 게 있다고 한 것도, 돈이 남는 일이 있었다고 했던 것도 그 일이었고요."
어차피 반이 본 이상 더 감출 것도 없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가르쳐 주셨어요. 귀족들의 경호도 함께 맡는 전투 메이드셨거든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메이드로 키워진 거고... 그 때부터 무기 사용법도 배웠어요."
어머니를 떠올리듯 에나가 산탄총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반은 에나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래서 네가 그렇게 완벽했구나. 어머니께 배운 거였어."
갑자기 반이 말을 멈추고 에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네가 그토록 집착하는 '그 한 사람'이... 어머니와 관련이 있는 거야?"
에나는 대답 없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이 너무 늦었어요. 이만 돌아가셔야죠? 사수님."
반은 에나의 차가운 대답에 잠시 말을 잃었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 말대로 늦었네."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춰 섰다.
"하지만 말야, 에나..."
반이 돌아서서 에나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난... 네가 혼자 짊어지는 걸 보고만 있진 않을 거야. 네가 아무리 밀어내도... 그래도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그가 문을 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 늦지 않게... 셰이드 잘 부탁해."
반이 나가고 나서, 에나는 고양이 침대에서 셰이드를 꺼내 끌어안았다. 그 동안 잘 먹고 큰 셰이드는 사료를 우유에 불려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걱정 마.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좋은 사람들이니까... 내가 없어도 널 잘 키워 줄 거야."
셰이드는 에나의 속삭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행복하게 야옹거렸다.
다음 날 에나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기다렸지만, 데리러 오겠다는 반이 오지 않았다. 옆방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어 그냥 출근하려다가, 문고리를 천천히 돌려 보자 문이 열렸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 보니 반은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고, 그의 방은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은 듯 난장판이었다. 언젠가 집이 더러워서 셰이드를 데려갈 수 없겠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숨을 내쉰 에나는 그가 자는 채로 놔 두고, 그의 방을 말끔히 청소하기 시작했다. 선반 먼지부터 턴 다음 물건들을 제 자리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바닥을 쓸고 닦았다. 부엌에서 티포트를 발견해서 커피를 올렸다. 깨끗해진 반의 집이 향긋한 커피 냄새로 가득 찼다. 커피 향을 맡은 반이 스르르 눈을 떴다.
"일어나셨어요?"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에나가 방을 모조리 치워 놓고 커피를 따르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시길래 노크해 봤는데, 문을 잠그지도 않고 주무시고 계시길래 들어왔어요."
에나는 그를 흘끔 바라보며 찬장에서 시럽과 크림을 꺼냈다.
"씻고 나오세요. 사수님이 좋아하시는 달달한 커피 만들어 드릴게요."
반은 몽롱한 상태로 자신의 방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 으으음... 잠깐... 내 방이 이렇게 깨끗했던가?"
그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잠깐만... 내가 잠옷 차림인데..."
그러나 에나가 개의치 않자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이거... 다 네가 한 거야? 부끄러운데... 아... 아침에 데리러 간다고 해 놓고... 미안해."
그러다 문득 커피 향을 맡고 표정이 밝아졌다.
"으음... 그래도 이 향기... 진짜 좋다... 내가 5분만에 씻고 올 테니까 기다려 줘! 절대 가지 마!"
허둥지둥 욕실로 뛰어들어간 반이 물을 틀며 중얼거렸다.
"진짜 완벽한 메이드라는 게 실감 나네."
반이 씻고 나오자 에나가 달콤한 아인슈페너와 함께 토스트를 구워 잼을 바르고 있었다.
"식기 전에 드세요."
테이블에 놓인 아침 식사로부터 맛있는 향기가 흘러나와 코를 찔렀다.
반은 머리를 털며 나와 자신의 방이 완벽하게 정돈된 것을 다시 한번 놀란 듯이 둘러보았다.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 없었는데..."
그가 테이블에 앉으며 달콤한 향기에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아인슈페너랑 토스트라니... 완전 호강이네. 내가 이런 아침을 먹어 본 게 언제였더라..."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감탄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어떻게 이렇게 맛있게 만들어? 헥스가 내린 커피보다 백 배는 맛있는데?"
그가 토스트를 먹으려다 멈췄다.
"근데 넌... 아침 안 먹어? 같이 먹자. 너무 미안하니까 내 것 반 줄게."
"아뇨, 신경 쓰지 마세요."
에나는 곧바로 사양했다.
"다 드시고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밖에서 기다릴게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그의 방을 나갔다.
반은 순간 말을 걸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토스트를 먹기 시작했다.
"맛있다..."
혼자 중얼거리며 커피를 마시던 그는 테이블 위에 다소곳이 놓인 잼을 보고 미소지었다.
"이런 것까지 챙겨 주고... 근데 정작 자기는..."
그가 한숨을 쉬며 마지막 한 입을 먹었다.
"이래서 내가 널 걱정한다니까..."
반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은 챙기면서 정작 너 자신은 안 챙기잖아..."
그가 급하게 옷을 입고 방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깨끗하게 정리해 준 건... 고마워."
방을 나오자 에나가 셰이드를 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을 잘 먹고 배가 빵빵하게 부른 셰이드가 에나의 품에 안긴 채 꾸벅꾸벅 졸았다. 반이 다가오자 에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안 늦었네요. 바로 가죠."
그리고 몸을 돌려 곧바로 가게를 향했다.
에나가 고개를 돌릴 때 높이 묶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향긋한 냄새가 휙 풍겼다.
반은 에나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향기에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오늘 아침에 늦잠 자서 미안해. 네가 그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는데..."
그가 머쓱한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방 청소해준 거랑, 아침 차려준 것도 고마워. 하지만, 너도 아침을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문득 반이 셰이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 녀석 네 품에서 잘도 자네. 완전 엄마랑 아기 같아."
반의 마지막 말에, 셰이드를 안고 가는 에나의 발걸음이 살짝 멈칫했다.
"나중에..."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중에는, 이 아이를..."
말을 멈춘 에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반은 에나의 불완전한 말에 순간 얼어붙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깐... 방금 뭐라고...?"
그가 에나의 뒤를 따라 들어가며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에나는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에나..."
그 때 헥스가 주방에서 나왔다.
"어라? 반, 너 오늘 늦었네?"
반은 잠시 헥스를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 응. 늦잠 자서... 에나가 깨워 줬어."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고, 에나를 향한 걱정스러운 시선은 쉽게 거둬지지 않았다.
"...나중에 꼭 얘기하자."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다 보니 점심 식사는 매일 에나가 요리하게 되었다. 오전 영업이 끝나고 에나는 여느 때처럼 테이블에 음식을 차려 놓고 헥스와 반을 불렀다.
"식사하세요."
그러고 나서 자신은 애쉬가 먹을 식사를 접시에 담아 쟁반에 올렸다.
"마스터께도 갖다 드리고 올게요."
이제 제법 걷고 뛸 줄 알게 된 셰이드가 에나의 뒤를 졸졸 따랐다. 3층 서재에 올라간 에나는 문을 노크했다.
"마스터, 점심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애쉬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한쪽으로 밀어두며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지."
차가운 목소리가 문 너머로 흘러나왔다.
에나가 들어서자 그가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음식 냄새가 좋군. 네가 만든 거야?"
그의 시선이 에나의 발치에서 따라온 셰이드에게 향했다.
"그 녀석... 제법 컸네. 반이 말하길 네가 잘 돌봐 준다고 하더군."
애쉬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아침에... 반의 방을 정리해 줬다고? 그 녀석, 네 얘기를 하느라 정작 보고할 일은 까먹었더군."
"네, 매번 1층으로 내려오실 순 없을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서재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에나가 대답했다. 그리고 유리잔에 화이트와인을 따랐다.
"마스터께서 살펴 주신 덕분에 무사히 거처를 옮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애쉬는 와인잔을 집어들며 에나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감사는 됐어. 난 그저... 내 물건이 망가지는 걸 원치 않을 뿐이니까."
그가 와인 향을 음미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반의 방을 정리해 준 건... 흥미롭군. 그 녀석,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방은 늘 저 모양이었거든."
그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에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온 뒤로 이것저것 변한 게 많아. 반도 그렇고... 셰이드도 그렇고."
그가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넌 변하지 않았지. 여전히 그 차가운 눈빛 그대로야."
"...제가 변할 필요가 있을까요."
에나가 조용히 대답했다.
"제 할 일만 다 한다면... 그걸로 충분할 텐데."
애쉬가 천천히 에나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네 할 일이라... 그래. 넌 그걸 위해 살아가지."
그가 에나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올렸다.
"하지만 말야...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난 보이는 게 있어. 반이나 셰이드를 대하는 네 모습에서."
그가 낮게 웃었다.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게 널 더 위험하게 만들지."
애쉬가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가봐. 반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셰이드와 함께 1층으로 내려온 에나는 우유에 사료를 담가 셰이드를 먹였다. 그리고 도시락 가방에서 에너지 바를 꺼냈다.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그녀는 담벼락에 기대고 서서 에너지 바를 먹었다.
반이 에나의 뒤를 따라나왔다. 그는 담벼락 옆에 서서 에나를 바라보았다.
"에너지 바로는 부족할 텐데..."
그가 주머니에서 포도맛 사탕을 꺼내 에나에게 건넸다.
"이거라도 먹어. 단 거 먹으면 기운 나."
그러다 문득 아까 3층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는지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에나... 아까 셰이드 얘기... 무슨 뜻이었어? '나중에는 이 아이를'... 그게 무슨 말이야?"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에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에나는 그에게서 사탕을 받았지만,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아까는... 사수님이 잘못 들으셨겠죠."
그녀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에너지 바를 한 번 더 베어 물었다.
반의 표정이 굳어졌다.
"...거짓말."
그가 에나의 손목을 잡았다.
"분명히 들었어. 정말로 나중에는... 여길 떠날 생각인 거야?"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난 더 이상 모른 척 못 하겠어. 네 방의 무기들, 네가 하려는 일까지... 이제 다 말해. 이제는..."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널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마스터도, 점장님도, 제게 친절은 베푸시지만 더 깊이 관여하지 않고 계세요."
포도 사탕을 닮은 에나의 보라색 눈이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그를 주시했다.
"왜 사수님만 자꾸 불필요한 관심을 가지시는 거죠? 성격인가요?"
반은 자신의 성격을 지적하는 에나의 말에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목을 더 강하게 쥐었다.
"맞아. 난 그런 성격이야. 혼자 있는 걸 싫어하고, 누군가를 걱정하고, 관심 가지는 게 습관이 됐거든."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보여 준 것들... 네가 가진 무기들, 식사도 제대로 안 하는 거, 그러면서도 친절한 마음, 셰이드한테 보이는 애정... 그런 것들이 날 불안하게 해."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넌... 뭔가를 버리려고 하는 것 같아. 네 목숨이든, 셰이드든... 그게 날 미치게 만들어."
"그러실 거 없어요."
에나가 말을 이었다.
"저는 뭔가를 버리려고 한 적이 없어요.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게 없으니까. 버린다는 건 가진 사람들만 하는 것이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혹시나 언젠가 제가 없어지더라도, 새로운 직원을 고용하시면 돼요."
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에나의 손목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아파... 새로운 직원?"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반이 갑자기 에나를 벽으로 밀쳐 양 팔로 그녀를 가두었다.
"그렇게 쉽게...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네가 없어지면 새 직원을 구하면 된다고?"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
"넌 대체... 네 목숨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난..."
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네가 없어지면... 난..."
"사수님."
에나가 태연히 손목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이제 오후 영업 준비를 하러 가야 해요."
반은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 그렇지."
그가 천천히 팔을 내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 말대로야. 일해야지."
반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에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야. 네가 날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더 깊이 파고들 거야."
오후에는 륀네르의 샬럿이 술집을 찾아왔다. 고위직 손님들에게 총애를 받는 에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문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에나가 그를 맞이하자 샬럿이 아름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와인이나 위스키는 질려서요. 당신이 추천해 줄래요?"
"........"
에나는 잠시 샬럿을 바라본 다음 입을 열었다.
"장미 향을 좋아하시는군요. 손님의 머리 색처럼 아름다운 붉은 빛의 장미향 칵테일을 추천 드리겠습니다."
반이 카운터 근처에서 잔을 닦다가 샬럿을 발견하고는 씩 웃었다.
"어라? 샬럿? 오랜만이네. 륀네르는 잘 돌아가?"
그러다 에나와 샬럿의 대화를 듣고는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장미향 칵테일이라... 역시 에나는 손님 취향을 잘 파악하네."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샬럿을 향해 다시 한번 웃어 보였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에나에게로 향했다.
"샬럿,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겠다."
에나는 허리를 공손히 숙여 인사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루비처럼 붉고 향긋한 칵테일을 완성해서 가져왔다.
"석류의 상큼한 달콤함과 장미향을 즐기실 수 있는 칵테일, 뱀파이어 로즈입니다."
샬럿이 칵테일을 받아들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어머... 뱀파이어 로즈라니, 재미있는 이름이네요. 마치 저를 위해 만든 것 같아요."
그녀가 붉은 입술로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고는 감탄했다.
"반, 이 아가씨는 정말 특별해. 륀네르에도 이렇게 손님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사람은 없는데..."
샬럿이 에나를 향해 관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륀네르로 오지 않을래요? 질리언 마담님께서도 당신 같은 분을 찾고 계시는데..."
반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륀네르에서 아가씨들의 시중을 들어 드릴 메이드를 쓴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에나는 특유의 웃음기 없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손님께서는 절 개인적으로 필요로 하고 계신 것 같네요. 그 곳과는 상관 없이..."
샬럿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곧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제 생각도 정확히 읽어 버리네요. 더 탐나는걸?"
샬럿은 미소를 머금고 에나를 바라보았다.
"실은 심부름 하나를 맡기고 싶어요. 어려운 건 아니고..."
반이 순간 샬럿과 에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있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심부름? 샬럿, 넌 원래 이런 거 안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샬럿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누가 시켜서 온 거야? 루스턴? 아니면..."
반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마담?"
그러면서도 그의 한쪽 손은 자연스럽게 에나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샬럿은 반을 장난스럽게 바라보았다.
"반, 이상하네. 내가 하는 일로 이렇게까지 날을 세우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 아가씨 때문이야?"
샬럿은 에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 드레스를 맞춰 주는 고정 의상실이 있어요. 실비엣 의상실이라고... 지금도 신상 모델로 주문을 하나 넣어 놨는데, 드레스를 꾸밀 보석과 리본은 제 마음대로 골라도 된다고 했거든요."
샬럿이 에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하지만 매번 제가 가기도 힘들고, 의상실에서 매번 륀네르로 찾아오기도 힘드니... 중간에 왕복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륀네르에 있는 메이드들은 눈치가 없고, 심부름꾼을 보내려니 드레스를 잘 모르는 남자아이들 뿐이라... 당신이 필요해서 찾아온 거예요. 어때요? 보수는 섭섭하지 않게 드리겠어요."
반은 샬럿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드레스 심부름? 네가?"
그가 의심스러운 듯 눈을 좁혔다.
"샬럿, 네가 그런 일로 직접 여기까지 올 리가... 혹시 루스턴이 뭐라도...?"
그가 잔을 닦던 행주를 내려놓으며 샬럿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니면 마담이 에나에 대해 뭔가 알아보라고 한 거야? 솔직히 말해."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스러움이 없었다.
"루스턴이 에나 씨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얘긴 들었어. 꼭 채용하고 싶다고 칭찬이 자자하던걸..."
샬럿은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시며 말했다.
"하지만 그게 그녀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아. 이런 순수해 보이는 아가씨를 그런 사람의 손에 넘기는 것은 나도 반대고."
샬럿은 에나가 마음에 든 듯 계속해서 눈길을 주었다.
"마담께서 메이드로 에나 씨를 탐내는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이 일은 순수하게 내 의뢰야, 반."
그녀는 다시 에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때요? 에나 씨."
반이 샬럿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루스턴이라고? 그 자식이 에나를..."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며 심호흡했다.
"샬럿, 네가 그런 마음이라니 다행이야. 하지만..."
그가 에나를 힐끗 보았다.
"이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마스터한테 허락을 받아야 할 텐데..."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샬럿에게 몸을 기울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혹시 실비엣 의상실이 어디 있는지 알려 줄래? 난... 그냥 궁금해서..."
반의 말에 샬럿이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반, 정말 속마음을 잘 드러내는구나. 전에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샬럿이 키득거리며 반에게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렇게 에나 씨가 걱정되면 네가 동행하면 되잖아?"
그녀는 다시 에나를 바라보았다.
"전 꼭 에나 씨 도움을 받고 싶은데. 에나 씨만 좋다고 하면 애쉬 님도 허락하실 거예요. 별다른 의뢰도 아니니까..."
에나는 조용히 샬럿을 바라보며 공손히 대답했다.
"...네,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스터만 허락하신다면..."
반이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했다.
"난... 그냥 에나가 위험할까봐... 아니, 그러니까..."
그가 말을 더듬더니 이내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 좋아. 내가 동행하지. 어차피 에나 호위는 내 일이니까."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샬럿을 향해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혹시 루스턴이 또 륀네르에 왔었어? 에나 얘기는 어떻게 들은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바로 어제 왔었어. 요즘 부쩍 자주 오는데... 그 때마다 이 가게에서 일하는 에나가 참 탐나는 인재라고 말하길래, 나도 좀 궁금한 차에 왔지."
샬럿이 반을 향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루스턴이 한 얘긴데, 이번에 빌렌 시장의 호위를 블랙 로즈가 의뢰받게 되었다고 하더라. 빌렌 시장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최근에도 페시튼의 군주 밑에서 일하는 상단주 한 명이 빌렌 때문에 망해서 거리에 나앉게 됐다고 들었어."
'빌렌'이라는 이름을 들은 에나의 손 끝이 순간 정전된 듯 움찔했다.
이야기를 마친 샬럿은 빈 칵테일 잔을 롯과 함께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에나 씨, 오늘 고마웠어요. 애쉬 님의 허락을 받게 되면 언제든 륀네르로 찾아오세요. 전 자정까지 거기 있을 테니까..."
샬럿은 장난스럽게 반을 바라보았다.
"그럼 에나 씨를 잘 부탁해~"
곧 그녀는 가게를 떠났다.
반은 샬럿이 떠나자마자 에나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에나... 방금 빌렌 얘기 나올 때 네가..."
그가 말을 하다 멈췄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뒤, 그는 에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혹시 빌렌이랑 뭔가 관계가 있어? 너 아까 반응이..."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그의 눈이 커졌다.
"설마... 네 방에 있던 무기들이랑... 네가 하려는 일이..."
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발...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 줘."
에나는 대답 없이 테이블을 치우고 롯을 카운터 금고에 넣었다.
"마스터께 허락 받고 올게요."
그녀가 계단을 향해 걸어가자, 셰이드가 종종걸음으로 그녀를 따랐다.
반은 에나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제기랄."
그가 카운터를 한 번 세게 내리쳤다.
"빌렌이 에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니면 에나의 누군가를..."
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좋아... 그래. 샬럿 말대로 내가 동행하면서 지켜보면 되겠지. 그 동안 뭔가 단서를..."
잠시 후 에나가 1층으로 내려왔다.
"마스터께서 허락해 주셨어요. 영업 마감 후에 샬럿 님을 뵈러 갈 생각이에요. 그리고 블랙 로즈가 시장을 호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보고드렸어요."
반은 에나의 말을 듣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마스터가 허락해 주셨다니..."
그가 에나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럼 내가 동행할 거라는 것도 말씀드렸어? 네가 외출할 때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말을 멈추었다.
"잠깐... 영업 마감 후라고? 자정이면... 위험할 텐데."
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에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상하네... 마스터가 이렇게 쉽게 허락하실 줄은 몰랐어. 혹시... 뭐 다른 지시사항은 없으셨어?"
"다른 지시사항은..."
에나가 반을 바라보았다.
"사수님의 호위를 거부하지 말 것, 그리고 단순한 심부름이 아닐지도 모르니 뭔가 수상한 것이 보이면 바로 보고할 것. 이 정도네요."
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스터답네. 이상한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바로 돌아와야 해. 알았지?"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근데 에나... 아까 빌렌 얘기 나왔을 때 네 반응이... 그건 대답 안 해 줄 거야?"
반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난... 네가 혼자 위험한 일을 하게 두고 싶지 않아. 네가 날 밀어내도, 난 계속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어서 오십시오, 시몬 님."
가게 문이 열리자 에나는 얼른 반으로부터 비껴가 단골 손님을 맞았다.
"이제 곧 해질녘이니, 선셋 드림 칵테일은 어떠십니까?"
단골 손님이 벗는 재킷을 공손히 받아 드는 에나의 뒷모습을 반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반은 주문을 받고있는 에나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카운터 뒤로 가 술병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몬 님, 선셋 드림은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그가 웃으며 말했지만, 평소의 장난기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에나, 넌 다른 손님들 주문 받아. 아, 그리고..."
그가 에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 밤엔... 내가 네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을 거야. 알겠지?"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단단했다.
오후 11시 경 가게를 마감한 후, 에나는 헥스에게 셰이드를 맡겼다.
"마스터의 허락으로, 륀네르의 샬럿 님을 뵙고 오겠습니다."
그녀는 앞치마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검은 원피스 차림으로 가게를 나갔다.
반이 서둘러 에나의 뒤를 따랐다.
"밤거리가 안전하지 않은 건 알잖아? 괜히 걱정하는 게 아니야."
그가 에나의 옆으로 바짝 붙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샬럿이 갑자기 널 부른 것도 이상해. 그 녀석, 평소엔 자기가 필요한 게 있어도 직접 오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내는 스타일인데..."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내 말 잘 들어. 뭔가 이상한 낌새만 보이면 바로 날 잡아. 알았지?"
"잡으라고요? 왜죠?"
에나가 그에게 묻고 있는데 골목 길 모퉁이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 그 늙은 난봉꾼이 우리에게 경호를 의뢰한 이상... 확실히 지켜 주자고. 그 대신 챙길 것은 더 확실히 챙기고 말이야... 그러니 바론 네가..."
루스턴의 목소리였다.
반은 순간 에나의 손목을 잡아 그늘진 골목 안쪽으로 당겼다.
"쉿..."
그가 낮게 속삭이며 에나를 벽 쪽으로 밀었다. 그의 투명화 능력이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블랙 로즈 녀석들이야..."
그가 에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에나의 귀를 스쳤다.
"저 녀석들... 빌렌의 호위 얘기를 하고 있어. 뭔가 수상한데..."
그의 손이 여전히 에나의 손목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경호팀을 뽑도록 하지요. 책임자로는 누굴 보내시겠습니까? 자크와 콜 둘 중에..."
"콜로 해. 자크에게는 얽힌 일이 너무 많아."
투명해진 반과 에나를 지나쳐, 루스턴은 바론과 이야기하며 비밀 상점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오랜만에 에나 양 얼굴을 보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기를... 후후."
반은 루스턴의 말에 순간 에나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팔이 에나의 어깨를 감싸안듯 했다.
"젠장... 저 미친 놈이 아직도 너한테 관심을 보이고 있잖아."
그가 이를 악물며 속삭였다.
"에나, 오늘은 륀네르 가는 걸 포기하는 게 어떨까? 저 자식들이 비밀 상점으로 가는 것 같은데... 마스터한테 이 얘기도 전해야 할 것 같고..."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샬럿 님과의 약속을 깰 수는 없어요."
에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마스터에게 급히 보고드려야 한다면, 먼저 가세요. 저 혼자 륀네르로 가겠어요. 그러니..."
그녀가 자신을 끌어안다시피 한 반의 가슴에 손바닥을 얹어 가볍게 힘을 주었다.
"일단 놔 주시겠어요?"
반이 에나의 손바닥을 느끼자 순간 당황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싫어. 혼자 가게 두진 않을 거야."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단단했다.
"루스턴이 널 노리고 있잖아. 저 자식... 이미 널 '에나 양'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더군다나 오늘은 블랙 로즈 녀석들이랑 뭔가를 모의하는 것 같은데..."
그가 에나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그리고... 네가 빌렌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아 버렸어. 이제 더더욱 널 혼자 둘 순 없어."
"사수님."
에나의 목소리가 그의 품 안에 묻혔다.
"일단 놔 주셔야 걸을 수 있겠는데요."
반은 에나의 말에 화들짝 놀라 팔에 힘을 풀었다.
"아... 미안."
그가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투명화 능력은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그래도 혼자 가겠다는 말은 하지 마. 네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에나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내가 지켜 줄 수 있게 해 줘."
에나는 그의 눈을 외면하며 그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륀네르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했어요. 샬럿 님이 기다리고 계실 텐데."
꽃들이 볼품없이 드문드문 피어 있는 산책로를 지나자, 륀네르의 화려한 건물이 눈 앞에 나타났다.
"이제 투명화는 푸셔도 될 것 같아요, 사수님."
에나는 그가 잡고 있는 자신의 손목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반은 마지못해 투명화를 풀었지만, 여전히 에나의 손목은 놓지 않았다.
"알겠어. 하지만 내 손은 놓지 마. 륀네르 안에서도 위험할 수 있으니까..."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샬럿이랑은 내가 오래 알고 지내서 뭔가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불안한지..."
그가 륀네르의 화려한 붉은 기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마담도 계실 텐데... 일단 들어가 보자."
"어서 와요, 에나 씨."
샬럿은 방에 앉아 머리를 빗으며 에나를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는 반을 보며 쿡쿡 웃었다.
"실비엣 의상실은 산책로에서 우측으로 꺾으면 나오는 두 번째 골목 입구에 있어요. 제 드레스 담당 직원은 호노라 헤버릿이에요. 일단은 내일 오전에 실비엣 의상실로 찾아가서 그 아가씨가 주는 카탈로그를 제게 가져다 주기만 하면 돼요. 다음 날 제가 원하는 디자인을 카탈로그에 표시해서 에나 씨에게 주면, 에나 씨가 의상실로 전해 주면 돼요. 그런 흐름으로 당분간 이런 일을 계속 해 주셔야 할 것 같으니, 앞으로 매일 오전 9시에 제 방으로 와 줘요. 아 참, 그리고."
그리고 샬럿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빗질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전 9시에는 어시빌에서 온 아델라 귀족 부인이 항상 차를 마시러 와 있을 거예요. 그 분이 차를 마시며 나누는 이야기를 잘 들어 두었다가, 제게 전달해 줘요. 아무리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도요."
빼먹은 이야기인 듯 전했지만, 에나는 그것이야말로 샬럿이 자신에게 부탁하는 진짜 일임을 깨달았다.
"네, 잘 알겠습니다."
샬럿은 반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에나 씨를 잘 지켜 줘, 반.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지키고 싶은 얼굴이지만..."
반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호노라의 이름이 나오자 그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잠깐, 샬럿. 호노라가 그 의상실에 있다고? 그건 몰랐는데..."
그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리고 아델라 귀족 부인의 이야기를... 그러니까 스파이 일을 시키겠다는 거야?"
반이 샬럿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난... 에나가 그런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건 원하지 않아. 다른 심부름꾼을 구해."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스러움이 없었다.
"어머, 애쉬 님 허락을 받아서 여기 온 걸로 알고 있는데."
샬럿이 장미 같은 입술로 웃었다.
"애쉬 님이 허락하신 일을 네가 반대하겠다고?"
에나는 반을 돌아보았다.
"마스터께서도 어느 정도 감안하고 허락하신 일일 텐데요, 사수님."
에나는 다시 샬럿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일 아침 9시, 실비엣 의상실로 가서 호노라 헤버릿 님을 만나 카탈로그를 받아서 전달 드리겠습니다. 아델라 귀족 부인께서 하신 이야기와 함께요.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그녀는 반이 잡은 손에서 손목을 천천히 빼낸 다음,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샬럿에게 인사한 후 밖으로 나왔다.
반이 에나를 따라 나오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호노라가 있을 줄은 몰랐어."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아델라 귀족부인의 스파이 일까지... 이건 단순한 심부름이 아니야, 에나. 위험할 수 있다고."
그가 에나의 앞을 막아서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일... 내일은 내가 네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 거야. 호노라도 있고... 그리고 스파이 일은... 적어도 내가 옆에서 도와 줄 수 있게 해 줘."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불안이 묻어났다.
"호노라 헤버릿이라는 분이 위험한 사람인가요?"
륀네르를 등지고 선 채, 에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초능력자인가요?"
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없이 대답했다.
"아니... 초능력자는 아냐. 그냥..."
그가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내 전 여자친구야. 4개월 정도 사귀었는데... 헤어진 뒤로 좀 껄끄러워졌거든. 내가... 그녀를 많이 아프게 했나 봐."
그가 불편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헤어질 때도 그렇고... 그 후로도 내가 너무 가볍게 굴었던 것 같아. 그래서 혹시... 네가 거기 가면 널 괴롭히거나 하진 않을까 걱정돼서."
"그런 거라면 걱정할 건 없겠네요."
에나는 아무렇지 않게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 그 분이 오해하셔도, 사실대로 설명드리면 되죠. 사수님과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요."
그녀가 반을 흘끔 돌아보았다.
"하지만 사수님이 정 불편하시다면, 의상실에는 제가 혼자 다녀올게요."
반은 에나의 말에 순간 표정이 굳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가 에나의 팔을 잡아 돌렸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래, 네 말대로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닐지 몰라. 하지만 난... 네가 소중해. 그리고 널 지키고 싶어."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호노라건 뭐건...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네가 나를 계속 밀어내도... 난 계속 네 곁에 있을 거야. 왜냐하면..."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단단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네가 날 밀어낼수록, 난 더 네가 걱정되니까."
"어리석군요."
에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소중한 것은 그렇게 함부로 만드는 게 아니에요, 사수님."
반은 에나의 말에 가슴이 찔린 듯했다.
"어리석다고...? 맞아. 난 정말 어리석은 놈이야."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호노라도 그랬어... 내가 모두에게 친절하고, 아무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고. 전에도 누군가를 잃었어. 하지만..."
그가 에나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았다.
"이번엔 달라.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날 밀어내든... 이번엔 정말로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어. 네가 위험해지기 전에, 네가 혼자 서두르기 전에... 그러니까..."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발... 날 밀어내지 말아 줘."
"...누군가를 잃었다구요."
에나의 눈빛이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그게 누군가요?"
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건... 내 어머니야."
그가 잠시 침묵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 때부터였을까... 누군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게..."
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 네가 혼자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그때의 내가 떠올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만 봐야 했던 그 때가..."
'어머니'라는 말을 들은 순간 에나의 눈빛이 동요하듯 흔들렸다.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데요?"
반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푸른 눈에 슬픔이 어렸다.
"...25년 전. 내가 태어난 직후야. 산욕열로..."
그가 목을 가다듬었다.
"어머니는 륀네르의 솔리아라고... 예쁘고 다정한 분이었대. 그리고 나랑 똑같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었다고 해. 하지만 난... 어머니의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더 그런지도 몰라... 누군가를 잃는다는 게... 그리고 지키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런 일이라면 사수님이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에나는 다시 등을 돌려 걷기 시작하면서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때 사수님은 겨우 갓난아기였으니까요. 물론 마음은 아프지만... 스스로를 책망할 만한 일은 아니에요."
그녀의 손이 어떤 기억을 이끌어내듯 주먹을 쥐었다.
"진짜 죄책감은... 슬픔과는 달라요. 자기 자신마저도 복수의 대상이 되거든요."
반은 에나의 마지막 말에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무거운 의미가 그를 숨막히게 했다.
"에나... 너..."
그가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말한 그 '진짜 죄책감'... 그건... 네가 겪고 있는 거야...?"
그의 푸른 눈동자가 걱정스럽게 흔들렸다.
"혹시... 네가 그토록 혼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가... 그래서야...?"
에나는 대답하지 않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오던 길을 되돌아 비밀 상점으로 들어선 에나는 테이블을 간단히 정리한 다음, 도시락 가방을 들고 셰이드를 품에 안았다.
"집에 가자."
셰이드는 앞발을 뻗어 에나의 어깨에 매달렸다.
반은 에나가 대답을 회피하고 상점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에나..."
그가 에나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녀가 셰이드를 안고 나가려 하자, 반이 문 앞을 막아섰다.
"...혼자 가게 둘 순 없어. 내가 데려다 줄게."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기 대신 단호함이 묻어났다.
"루스턴이 이 근처를 서성이는 걸 본 이상... 이런 밤에 널 혼자 보낼 순 없어."
"좋으실 대로..."
에나는 셰이드를 안은 채 멈추어 섰다. 반은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옆 건물로 앞장섰다.
열쇠를 꺼내 방 문을 연 에나는 그와 눈을 맞추지도 않고 셰이드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반은 에나가 문을 닫으려 하자 살짝 발을 밀어넣었다.
"...잠깐만."
그가 에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 오늘 네 말을 듣고 깨달았어. 내가 정말 어리석었던 것 같아."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네가 겪은 일이 뭔지는 모르지만... 나도 이제 이해할 것 같아. 네가 왜 그토록 혼자가 되려고 하는지... 하지만..."
그가 에나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일... 의상실에 가기 전에 꼭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 부탁이야... 들어 줄 수 있어?"
"........"
에나는 셰이드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네, 알겠습니다. 사수님."
그녀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반은 어쩔 수 없이 발을 뺐다. 에나의 방 문이 굳게 닫혔다.
문이 닫히자 반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맴돌았다.
"에나..."
그가 작게 속삭이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천천히 문에 이마를 기대었다.
"네가 나를 밀어내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아."
그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일은... 내일은 꼭..."
그는 문에 기댄 채로 잠시 더 그렇게 서 있다가,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소리에는 무거운 결심이 묻어있었다.
방에 들어온 에나는 셰이드를 내려놓고, 낮에 반이 주었던 포도 사탕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 날 아침, 반이 눈을 떠 보니 에나가 여느 때처럼 청소를 마치고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방 문단속을 잘 하셔야겠어요, 사수님."
에나는 토스트기에 식빵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니면 아인슈페너가 마음에 드셨나요?"
그녀는 커피를 잔에 따랐다.
"씻고 나오세요. 식기 전에 드시려면."
반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또 이런 식이구나."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제 그렇게 날 밀어내더니... 오늘은 또 이렇게 다정하게... 넌 정말..."
그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래도... 네가 만든 커피라면..."
반은 욕실로 향하며 에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잠깐만 기다려. 금방 씻고 나올게. 그리고...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할 말도 있고."
그의 목소리에는 어제와는 다른, 단단한 결심이 묻어있었다.
"그러니까 도망가지 마..."
반은 머리카락에서 물을 떨어뜨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셰이드를 데려온 에나가 바닥에 접시를 놓고 아침을 먹이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그녀가 준비해 놓은 아인슈페너와 토스트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올라와 있었다.
"아침 커피로 아인슈페너는 좋지 않아요. 이런 걸 좋아하시니까 만들어 드렸지만... 내일부터는 달지 않은 카페라떼를 드세요."
반은 젖은 머리를 털며 웃었다.
"아침부터 잔소리라니... 마치 어머ㄴ..."
그가 말을 하다 멈칫했다. 어제의 대화가 떠올랐는지 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이내 평소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되찾았다.
"그래도 이렇게 맛있는 걸 만들어 주는데 뭐. 잔소리는 덤으로 받아야지."
그가 테이블에 앉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근데 말야, 에나..."
그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어제 얘기했던 대로... 할 말이 있어. 도망가지 말고 들어줘."
그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에나를 바라보았다.
"난... 네가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부터라도 내가 네 곁에서... 진심으로 널 지키고 싶어."
"사수님..."
에나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쁘거나 수줍은 그런 의미의 미소가 아니었다.
"제가 사수님께 너무 깊이 관여한 모양이네요. 점장님께 했던 것처럼, 감사 표시를 한 것 뿐이었는데."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건 그만 두죠."
반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감사... 표시...?"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서 이런 거였어...? 내가 널 걱정하고, 네 곁에 있으려 할 때마다 날 밀어내던 이유가..."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냥 헥스한테 하듯이... 업무상 예의를 지키는 거였다고? 그럼 내 마음은... 내가 널 걱정하는 마음은..."
반이 갑자기 에나의 어깨를 잡았다.
"거짓말이야... 네가 지금 하는 말... 전부 거짓말이지? 어제 네가 보여준 그 표정들... 그 슬픔은... 그건 진짜였어. 난 알아..."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맞아요. 제게는 '슬픔'이 있어요."
에나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이건 제 몫이에요. 어느 누구와도 나누지 않아요."
아침을 다 먹은 셰이드가 야옹거리며 에나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 인간이거든요."
에나는 셰이드를 안아 들었다.
"밖에서 기다릴게요. 식사하시고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사수님."
반은 에나가 문 밖으로 나가는 걸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얼굴에는 좌절감이 가득했다.
"자격이 없다고...?"
그가 커피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누가 그런 걸 정하는 건데...?"
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벽을 세게 쳤다.
"젠장... 또 이런 식이야. 누군가를 밀어내고... 항상 혼자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게... 그게 뭐가 좋다고..."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갑자기 결심한 듯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번엔... 이번만큼은 네가 도망가게 두지 않을 거야."
항상 똑같이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에나는 셰이드를 안고, 에너지 바가 들어있는 도시락 가방을 든 채 그의 방 앞 복도에 서 있었다.
"가시죠."
그가 나오자 에나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반은 평소와 달리 무거운 표정으로 에나의 뒤를 따랐다. 그의 발걸음은 무겁고 단단했다.
"...에나."
그가 갑자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오늘 호노라를 만나러 가기 전에... 잠깐 어딜 들르고 싶은 데가 있어."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기 대신 진지함이 묻어났다.
"륀네르... 거기 잠깐만 들르자. 내가... 널 만나기 전에 있었던 곳이야. 네가 알아줬으면 하는 게 있어."
"........"
에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사수님."
오전 영업 준비를 간단히 끝내고, 에나는 헥스에게 샬럿의 심부름을 위해 실비엣 의상실에 간다고 보고한 후 가게를 나섰다. 그 뒤를 반이 따랐다.
반은 에나를 륀네르로 이끌었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평소와는 달리 말이 없었다.
"여기야..."
그가 륀네르의 뒷문 앞에 멈춰 섰다.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은 곳이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난 여기서 자랐어."
그가 문을 살짝 두드리자 벤저튼이 문을 열었다.
"어라? 꼬맹이 반이 아닌가!"
벤저튼이 반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벤저튼 아저씨... 잠깐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나요? 제가... 누군갈 소개하고 싶어서요."
반의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진지함이 묻어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나'라고 합니다."
에나는 벤저튼을 향해, 평소처럼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벤저튼은 에나의 공손한 인사에 눈을 크게 뜨고 반을 한번 쳐다보았다.
"호오... 이런 귀한 아가씨를... 꼬맹이 반이 데려왔다고?"
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에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침부터 손님은 없으니 들어오시게. 차라도 한잔할까?"
벤저튼이 문을 활짝 열어 주며 말했다.
"얘가 말이야, 여기서 자랄 때는..."
그가 말을 꺼내려 하자 반이 얼굴을 붉히며 끼어들었다.
"아저씨! 그런 얘기는... 제가 직접 할게요."
"........"
에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사수님? 이 곳에 절 왜 데려오셨는지..."
반은 잠시 망설이다가 에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자격이 없다고 했잖아. 혼자여야 한다고. 하지만 봐..."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도 혼자였어.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모르는... 하지만 이곳에서 난 가족을 만났어. 벤저튼 아저씨도, 마담도... 그리고 지금은 마스터와 헥스도."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네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누구나 새로운 시작을 할 자격이 있어. 난... 그걸 보여주고 싶었어."
"그 얘길 하기 위해... 여기로?"
에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사수님... 저는 사수님과 달라요. 사수님의 삶의 방식은 옳아요. 하지만 제게는 제 위치가 있어요. 이런 곳과는 다른..."
그녀는 벤저튼을 잊지 않고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공손히 인사했다.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벤저튼 님.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곧장 등을 돌려 걸어나갔다.
반은 에나가 등을 돌리자 황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잠깐... 잠깐만!"
그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네 위치가 뭔데? 혼자 고통받는 게 네 위치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반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하면 널 설득할 수 있을까? 네가 그토록 혼자이고 싶어하는 이유가... 도대체 뭔데?"
그가 에나를 돌려세우며 절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적어도 나한테는 말해 줘. 난... 네 곁에 있고 싶어."
그는 벤저튼을 향해 잠시 고개를 돌렸다.
"벤저튼 아저씨, 잠시만요. 에나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어요. 제가 어떻게 여기서 자랐는지... 그리고 어떻게 마스터를 만났는지..."
그가 에나를 향해 애원하듯 말했다.
"부탁이야... 조금만 더 시간을 줘."
에나는 이런 것이 모두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한 번만 져 주기로 했다.
"...알겠어요."
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에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벤저튼이 자리를 내어주자, 그는 에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기서...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저 술집 여자의 사생아... 하지만 마담과 벤저튼 아저씨가 날 키워주셨지."
그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며 추억에 잠겼다.
"처음엔 난 그저... 이 곳의 짐이었을 뿐이야. 하지만 그분들은 날 가족처럼 대해 주셨어. 그리고..."
그가 에나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나중에 마스터를 만나고 나서야... 난 진정한 내 자리를 찾았어. 그러니까... 넌 혼자가 아니야, 에나. 네가 어떤 과거를 가졌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에나는 그를 위로하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사수님, 사수님이 지금 계신 자리는 옳아요. 스스로의 삶이 불확실해서 잘 모르겠다고 하셨지만, 그건 지금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찾아나가시면 돼요. 그러다 보면 행복해지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테이블을 조용히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그리고 제 자리는... 이런 곳이 아니에요."
그녀의 눈빛에서 온기가 가셨다.
"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고, 스스로가 정한 제 자리. 그 곳은 따로 있어요. 사수님께서 관심을 가질 만한 자리가 아니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벤저튼 님. 바쁘신 중에 폐를 끼쳤습니다. 그럼 안녕히..."
에나는 다시 한 번 벤저튼에게 인사한 후,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반은 에나가 나가는 것을 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나! 잠깐만..."
그때 벤저튼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꼬맹이... 그 아가씨, 뭔가 있는 것 같구나."
반은 벤저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저렇게까지..."
벤저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네가 여기서 자랄 때부터 봐 왔지만... 그 아가씨의 눈빛은 달라. 마치... 뭔가를 결심한 사람 같아."
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서 더... 더 걱정되는데... 아저씨, 전 가 봐야겠어요."
그가 벤저튼에게 인사하고 에나를 뒤쫓아 나갔다.
"에나! 기다려!"
에나는 샬럿이 말해 준 대로, 산책로 우측의 두 번째 골목을 향했다. 실비엣 의상실은 귀족 부인들이 즐겨 찾을 만한 살롱처럼 간판과 입구부터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다. 그녀는 잠시 그 곳에 멈추어 섰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 호노라라는 분이 계실 텐데."
에나는 반에게 언뜻 물었다.
"불편하시다면, 바깥에서 기다려 주세요. 저 혼자로도 충분해요."
반은 에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다고? 그래... 불편하긴 하지. 하지만..."
그가 실비엣 의상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네가 혼자 가는 게 더 불편해. 게다가..."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호노라는... 좀 까다로운 성격이야. 네가 혼자 가면 어떤 꼬투리를 잡을지 모르거든. 내가 같이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반은 에나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난 이미 그 일은 지나간 일이니까. 그리고..."
그가 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지금은 네가 더 중요해."
반이 의상실의 문을 열었다. 에나가 들어서자, 이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듯 호노라가 그녀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온 반도 알아보았다.
호노라는 반을 보자 순간 얼굴이 굳었다가, 이내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머... 반? 오랜만이네..."
그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움이 묻어있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아, 혹시 이 아가씨와 함께...?"
호노라는 에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차갑게 말했다.
"샬럿 언니가 말씀하신 분이시군요. 카탈로그는 준비해 뒀어요. 잠시만요..."
그녀는 에나를 향해 말하면서도 계속 반을 흘끗거렸다.
"반... 넌 여전히 그렇구나. 누구한테나 친절하고... 이번엔 이 아가씨를 에스코트하는 거야?"
그녀의 말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에나는 두 사람에게 신경을 끄고 아델라 귀족부인을 찾아 보았다. 응접실에 아델라 귀족부인이 차를 마시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맞추게 될 드레스는, 환한 색이 좋아요. 뭐니뭐니 해도 락타리온의 군주가 여는 파티니까요. 보석도 잔뜩 붙이고..."
"잘 알겠습니다, 마님. 어차피 오늘부터 매일 이 시각에 오실 테니, 제작 과정을 하나하나 보여 드리죠."
반은 호노라의 가시돋힌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호노라... 이건 업무야. 샬럿이 부탁한 일이고, 에나도 마스터의 허락을 받은 거고."
그가 아델라 귀족 부인이 있는 응접실 쪽을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투는 좀 그만둬. 이젠 우리 서로한테 아무것도 아니잖아."
호노라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래, 난 네게 아무것도 아니었지. 넌 늘 그랬어. 모두에게 친절하고...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반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호노라. 여긴 네 일터야. 개인 감정은 밖에서 해결하자."
"호노라 님, 저기 아델라 귀족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분이 의상실의 오너이신가요?"
에나가 고개를 돌려 호노라에게 물었다.
호노라는 잠시 에나를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저분이 마담 실비엣이세요. 이 의상실의 오너시죠."
그녀가 손톱으로 카운터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손님과 상담 중이시니 기다리셔야 할 것 같네요. 그동안..."
그녀가 반을 흘긋 보며 말했다.
"반, 넌 밖에서 기다리는 게 어때? 여긴 여성 전용 의상실이야. 남자가 있으면 손님들이 불편해하실 텐데..."
반이 에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시는 게 좋겠네요, 사수님. 일이 끝나면 나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에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호노라에게 말을 이었다.
"저는 비밀 상점 술집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고, 이 쪽은 제게 일을 가르쳐 주신 사수님이신데 샬럿 님의 부탁으로 함께 오게 됐어요. 두 분께서 구면이신 줄 몰랐네요. 괜찮으시면 두 분이서 이야기 나누세요."
반이 순간 불편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에나... 그래도..."
호노라가 반의 말을 자르며 에나를 향해 갑자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래요? 그럼 샬럿 언니가 말씀하신 분이 바로 당신이시군요. 맞아요, 반과는... 잠깐 인연이 있었죠."
그녀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반, 잠깐 나랑 얘기 좀 할래? 어차피 아델라 부인 상담이 끝날 때까진 시간도 남았잖아."
반은 에나를 향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정말... 괜찮아? 난..."
에나는 개의치 않고 천천히 마담 실비엣과 아델라 귀족부인이 이야기하는 응접실로 다가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담 실비엣. 그리고 아델라 마님."
반은 어쩔 수 없이 호노라와 함께 잠시 밖으로 나갔다.
반은 호노라와 함께 의상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자꾸만 안쪽을 신경 쓰며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할 말 있다며. 뭔데?"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반... 넌 정말 변한 게 없구나."
호노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전히 누구한테나 친절하고... 누구든 챙기려 들고... 그래서 난..."
그녀가 반의 팔을 잡으려 하자 반이 한 발짝 물러섰다.
"호노라, 우린 이미 끝났잖아. 네가 먼저 끝내자고 했고."
"그래... 내가 끝내자고 했지. 하지만 그건... 네가 날 붙잡아주길 바래서였어! 근데 넌... 넌 그냥 웃으면서 '그래, 잘 지내' 라고만 했잖아!"
호노라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반은 호노라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호노라... 넌 날 정말 모르는구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누군가를 붙잡을 자격이 없어. 내가 모두에게 친절한 건, 그게 내 일이자 내 삶이니까. 넌 그걸 이해 못했던 거고. 난 그 때도, 지금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어. 그래서 네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미안하지만 붙잡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어."
그가 의상실 안쪽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에나를 걱정하니까,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
호노라는 숨을 몰아쉬며 반을 노려보았다.
"그래, 그게 너지."
그녀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어차피 저 애도 똑같겠지. 이번에도 진심이 아니겠지... 그렇게 사람 가지고 놀면서 사는 게 재미있어?"
반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호노라. 그만해."
그의 목소리에서 평소의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가지고 논다고?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난 늘 진심이었어. 그저... 내 진심이란 게 네가 바라는 그런 진심이 아니었던 거지."
그가 호노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에나는...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더 이상 이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아."
"잠깐!"
반이 몸을 돌려 의상실로 들어가려 하자, 호노라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잘 들어. 그 애도... 결국 나처럼 될 거야. 넌 절대 변하지 않을 테니까..."
호노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마. 네 본질은 변하지 않아. 넌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을 거야."
그녀는 일부러 반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그리고 널 꼬박꼬박 '사수님'이라고 부르던데... 애초에 너한테 관심도 없지? 그럼 그냥 놔 주는 게 좋을 텐데. 가만히 있는 애 괜히 상처 주지 말고."
반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호노라... 넌 정말 대단해. 이렇게까지 남의 마음을 뒤흔들려고 하다니."
그가 호노라의 손을 강하게 떼어내며 말했다.
"네 말대로 난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내 문제야. 그리고 에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
반이 호노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나를 건드리지 마. 그 애는 네가 상상도 못할 만큼 강하고... 특별해. 그리고... 내가 에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그가 의상실 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이제 그만 하자. 더 이상 이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
반이 의상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담 실비엣과 아델라 귀족부인이 에나를 앞에 두고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었다.
"어쩜, 비밀 상점 술집이라고 했죠? 메이드 출신의 이런 고상한 아가씨가 그런 곳에서 일하고 있을 줄이야."
"차라리 우리 의상실에서 일하는 게 어때요? 오히려 이 쪽 일이 더 결이 맞는 것 같은데. 술집 일은 고될 텐데. 그리고 좀... 천박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에나 양이 블렌딩해 준 이 차, 정말 맛이 특별하군요. 매일 마시고 싶을 정도예요."
에나는 두 여인에게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마님. 그리고 마담. 이미 일하고 있는 직장을 바꿀 수는 없지만, 륀네르의 샬럿 님 심부름으로 당분간 매일 아침 찾아 올 생각이기 때문에, 괜찮으시다면 그 때마다 제가 차를 올리겠습니다."
"호호호... 내일 오전도 기대할게요."
에나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응접실을 걸어나오며 반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 때 호노라가 에나에게로 다가와 카탈로그를 건넸다.
"여기요. 약속한 카탈로그예요. 샬럿 언니에게 전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내일 아침, 샬럿 님의 의견을 받아 찾아오겠습니다."
에나는 호노라를 향해 곱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반과 함께 실비엣 의상실을 나왔다.
반은 의상실을 나오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의 표정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옛날 일을 좀 정리했을 뿐이야."
그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보다 네가 마담 실비엣이랑 아델라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봤어. 잘 됐나 봐? 그들이 널 좋아하는 것 같던데."
반은 에나를 흘깃 보며 말을 이었다.
"혹시... 정말로 여기서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아까 마담이 제안했다며..."
에나는 의상실 간판과 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가 이 의상실에서 일하기를 바라세요?"
반은 에나의 말에 순간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난 그저... 네가 편안해 보여서... 여기 사람들도 널 좋아하고. 네가 우리 술집에서 위험을 무릅쓰며 험한 일 하는 것보다... 여기가 더 안전해 보여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반이 에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난 그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가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사실은... 네가 우리와 함께 있는 게 더 좋아."
"...생각해 볼게요. 하지만... 직장을 또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마스터가 허락하실 것 같지도 않고..."
에나는 카탈로그를 끌어안고 륀네르를 향해 미끄러지듯이 걸었다.
반은 에나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에나의 옆에서 함께 걸으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마스터가 허락하실 리가 없지."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에나... 넌 정말 대단해. 방금 본 것처럼 어디서든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도 우리와 함께 있겠다니..."
반이 에나 옆으로 다가가 천천히 걸음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네가 우리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가 우리와 함께 있는 게 좋다고 한 건 진심이야. 마스터도 널 믿고 있어. 그러니까..."
그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혹시... 오늘 밤 시간 되면,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술 한 잔 하면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술을 마시지 않아서요, 사수님."
에나는 앞만 보고 걸으며 말했다. 반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려는데,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들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반은 에나의 말에 잠시 실망한 듯 보였지만, 곧 평소의 밝은 표정을 되찾았다.
"아, 그랬지... 미안해."
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야기는 들어 준다니 고마워. 음... 그럼 우리 비밀 상점 옥상은 어때? 거기서 별도 보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반이 에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네가 우리와 함께 일하면서 어떤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어보고 싶었어. 그리고... 네 과거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어. 물론, 네가 말하고 싶은 만큼만."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과 호기심이 묻어났다.
륀네르에 도착해서 샬럿을 찾은 에나는 그녀에게 카탈로그를 건넨 후 모든 이야기를 전했다.
"아델라 귀족부인께서는 지난 해 사별하셨고, 얼마 전 원정 도박을 위해 락타리온을 찾으셨다가 빌렌 군주와 만나게 된 모양입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일주일 뒤 락타리온의 귀빈관에서 있을 파티는 빌렌 군주가 아델라 귀족부인의 생일을 맞아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준비한 파티라는군요. 아델라 귀족부인은 파티와 같은 사교 자리를 좋아하신다고 합니다. 페시튼, 어시빌의 고위직 인사들도 많이 초대되었다고 하니, 말 그대로 아델라 귀족부인을 위한 자리가 될 겁니다."
에나가 조용히 샬럿을 바라보았다.
"지금 샬럿 님께서 준비하고 계신 드레스도, 그 파티에 참석하기 위한 것인가요?"
샬럿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에나,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런 중요한 정보를 얻어오다니..."
그녀는 에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아델라 귀족부인과 빌렌 군주가 심상치 않은 사이처럼 보여서, 그에 대한 정보가 좀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렇다고 직접 찾아간다고 해도, 귀족부인은 륀네르의 여자를 천시하시니까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을 것 같고... 그래서 에나, 당신에게 이 일을 부탁했어요. 귀족부인이 썩 마음에 들어 하시죠? 메이드 출신인 당신을."
샬럿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에나, 당신에게 부탁이 하나 더 있어요. 그 파티에 당신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메이드로 위장해서 말이에요. 귀족부인이 당신을 좋아하시니, 그분의 시중을 들면서 파티장 안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가 에나의 반응을 살피며 덧붙였다.
"물론, 위험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생각해요?"
"제 의지를 물으신다면... 메이드로서 파티장에 들어가는 것은 괜찮습니다. 귀족부인께 말씀드리면 파티장에서의 전속 메이드로 동행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에나는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이 또한 마스터의 허락을 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녀는 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수님, 이 일을 마스터께서 허락해 주실까요?"
반은 에나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음... 마스터는 네가 그런 위험한 일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하지만..."
그가 샬럿을 힐끗 보고 다시 에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건 중요한 정보이긴 해. 빌렌과 아델라 귀족부인의 관계, 그리고 다른 도시 고위 인사들의 동향... 이런 정보들은 마스터에게도 꽤 중요할 테니까."
그가 에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에나... 마스터가 허락하신다고 해도 이 일은 위험해. 의도를 들키면 큰일 날 거야. 정말 괜찮아? 꼭 네가 아니어도..."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전 괜찮아요."
에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샬럿 님과 마스터께 동시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하겠어요. 이 일을 피할 이유는 없죠."
그 때, 샬럿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반, 너도 초대 받은 아가씨인 것처럼 따라 들어가면 되잖아? 네 특기... '그거' 있잖아."
반은 샬럿의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 샬럿. 괜찮은 아이디어인데? 그래, 그렇게 하면 에나도 좀 더 안전할 거야."
그가 에나를 향해 윙크를 날리며 말을 이었다.
"에나, 네 옆에서 귀족 아가씨 역할을 하면서 너를 보호할 수 있을 거야. 걱정 마, 내 변장 실력을 믿어도 좋아."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마스터한테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마스터, 제가 여장하고 파티에 가도 될까요?'라고 하면... 흠."
반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래도 중요한 정보를 위해서라면 마스터도 허락해 주실 거야. 내가 한번 마스터께 말씀드려 볼게. 에나, 너도 함께 가자. 우리가 함께 설명하면 더 설득력 있을 거야."
륀네르를 나와서 반과 함께 걸으며, 에나가 입을 열었다.
"그런 특기가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태연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여성과의 연애는 지향성에 안 맞으셨던 거군요. 호노라 님께서 화를 내신 것도 무리는 아니죠."
반은 에나의 말에 놀란 듯 걸음을 멈추었다. 새빨개진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뭐...?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건 그냥... 정보 수집을 위한 특기일 뿐이야. 여자로 변장하면 더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거든. 그리고 호노라와는..."
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에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에나, 난 그저... 아직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했을 뿐이야. 하지만 언젠가는 찾을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그나저나, 이번 임무... 정말 괜찮겠어? 난 네가 걱정 돼."
애쉬의 집무실에 들어간 반과 에나는 그에게 이 일에 대해 허락을 구했다.
애쉬는 반과 에나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서늘한 잿빛 눈동자가 두 사람을 번갈아 훑었다.
"무슨 일이지?"
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반이 앞으로 나서며 설명을 시작했다.
"마스터, 중요한 정보를 얻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빌렌 군주와 아델라 귀족부인의 관계, 그리고 다른 도시 고위 인사들의 동향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애쉬가 흥미로운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 어떤 방법으로?"
반이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일주일 뒤에 있을 파티에 에나가 메이드로 위장해 들어가고... 제가 여장을 해서 귀족 아가씨로 동행하는 겁니다."
애쉬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오, 그래? 반, 네 특기를 발휘할 때가 왔군."
그가 에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나, 너는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에나는 또박또박 대답했다.
"마스터께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하겠습니다. 제게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애쉬는 에나의 대답을 듣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 허락하지."
그가 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 네 변장 실력은 이미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이번엔 더 조심해야 해. 빌렌이나 다른 귀족들에게 들키면 큰 일이니까."
그가 다시 에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에나, 너는 메이드 역할에 충실해. 하지만 귀족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는 것도 잊지 마. 특히 빌렌과 아델라 귀족부인의 관계... 그리고 다른 도시 고위 인사들의 동향에 주목해."
애쉬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이번 정보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해. 성공한다면... 너희들에게 좋은 보상이 있을 거야."
그가 뒤돌아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반, 네 여장 모습... 꽤나 기대되는군."
그 날 밤, 반은 가게를 마감한 후 약속한 대로 에나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장난기 어린 미소가 머물러 있었지만, 눈빛은 진지해 보였다.
"에나, 이야기 할 시간이 됐네. 옥상으로 갈까? 거기서 별도 보고..."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에나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면 다른 곳이 더 좋다면 그렇게 해도 돼. 어떤 게 편해?"
반은 에나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길 바라는 듯했다.
"네, 그렇게 하죠. 뭐 드시겠어요?"
에나는 바 카운터로 들어가 칵테일 원액 재고를 둘러보며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시는 걸로 만들어 드릴게요."
반은 에나의 제안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와, 네가 직접 만들어 준다고? 그럼... 달콤한 걸로 부탁해. 음... 벌꿀 맥주는 어때? 아니면 네가 추천하는 걸로 해도 좋고."
그가 바 스툴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에나, 넌 정말 대단해. 술은 안 마시면서도 이렇게 칵테일을 만들 줄 알다니."
반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에나의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사수님, 단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는 것 아닌가요."
에나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맥주 원액에 벌꿀과 메이플 시럽을 섞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위에 달콤한 크림을 부드럽게 부었다.
"특히 아침에 단 음료를 드시면 혈당에 좋지 않아요. 물론 평소에 몸을 많이 움직이시니 그나마 좀 낫겠지만..."
에나는 먹음직스럽게 완성된 벌꿀 맥주와, 자신이 마실 물 한 컵을 쟁반에 올렸다.
"가시죠... 옥상으로."
반은 에나가 만들어 준 벌꿀 맥주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가 일어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에나, 너 정말 잔소리가 심해지는 것 같아. 헥스랑 많이 닮아가는 걸?"
그가 가볍게 웃으며 에나를 따라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 도착한 반은 난간 쪽으로 걸어가 락타리온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여기 밤 풍경 정말 멋지지 않아? 난 이 도시가 좋아. 복잡하고 위험하긴 해도... 이상하게 정이 가."
그가 에나를 향해 돌아섰다.
"에나, 넌 어때? 락타리온은... 네게 어떤 곳이야?"
"........"
에나는 말없이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현란한 조명과 색색깔의 간판등이 한데 섞여 화려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잠시 후 내뱉은 말은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제 무덤이 될 곳이요."
반은 에나의 소름 끼치는 말에 충격을 받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걱정과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에나... 무슨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지?"
그가 조심스럽게 에나에게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너... 여기서 죽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반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에나, 제발... 나한테 말해 줘. 내가 널 도와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넌... 혼자가 아니야."
"혼자가 아니라고 쉽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에나는 손에 든 컵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전 혼자여야 해요. 즐거움도, 소중함도 만들 수는 없어요."
그녀는 반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걸 만들면 잃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도 함께 생겨요. 전 그런 두려움을 만들 생각이 없어요. 제가 할 일은 따로 있으니까. 그리고 그 일에...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어요."
반은 에나의 차가운 말에 잠시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 깊은 고민의 흔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그는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에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에나... 그 누구도 혼자여서는 안 돼.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게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넌 지금 네 삶을 포기하고 있는 거야. 그건...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반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났다.
"네가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게 뭐든, 혼자 하는 것보단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더 나을 거야. 예를 들면... 나라든가."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난 네 곁에 있고 싶어.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에나... 넌 내게 특별해. 네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특별하다고요..."
에나가 안쓰러운 듯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그 감정을 지워 버리세요."
반은 에나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말을 잃었다. 그의 눈에 깊은 상처와 혼란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다시 에나를 바라보았다.
"에나...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야. 넌 나에게 특별해. 그리고 그 감정을 지우고 싶지 않아."
그가 에나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난... 네가 겪은 고통, 상처... 너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싶어."
반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묻어났다.
"에나...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난 이미 너에 대한 감정을 지울 수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반의 목소리가 간절함해졌다.
"제발 나를 밀어내지 마. 난 네 곁에 있고 싶어. 네가 하려는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을 함께 할 수 있게 해 줘."
"사수님,"
에나는 물컵을 손에 든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며 락타리온의 야경을 비추고 있었다.
"고마워요."
에나는 반을 향해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마스터도, 점장님도, 모두... 고마우신 분들이에요."
그리고 다시 락타리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죄송해요."
에나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야기는 충분히 나눈 것 같으니... 먼저 내려가 볼게요. 내일 뵙겠습니다."
반은 에나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에나..."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반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에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손에 들고 있던 벌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하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반은 난간에 기대어 락타리온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결심이 서린 듯했다.
"에나...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네가 어떤 일을 하려는 건지, 왜 그렇게 혼자이고 싶어 하는지... 모두 알아낼 거야. 그리고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는 마지막으로 벌꿀 맥주를 다 마시고 옥상을 떠났다.
-continue
호노라와 대화를 좀 나눠 보니 반의 그 동안 연애가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식으로 가벼운 흐름의 연애였던 것 같아서, 옳커니, 역시 에나 같은 철벽녀가 오히려 더 맞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얘도 지 좋다는 여자애 그냥 ㅇㅇㅋ 하고 받아주는 게 아니라, 내 쪽에서 자꾸 신경 쓰이고 마음이 가는데 상대방은 자꾸 거절하고 차고... 그러면서 가슴앓이도 하고 힘겹게 붙잡아 봐야 사랑이란 게 뭔지 배우겠지.
크랙 :: 세르하 유스카✨Serha Jouska
구(久) 뤼튼 :: 세르하의 환상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