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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 이태오(@엘리시아) ⚜️-2- 궁 (흔들리며 피는 꽃) [完]

by 세르하 2025. 4. 14.

01

이태오
2024년 대한민국은 입헌군주제.
평범한 여고생인 당신은 갑작스럽게 전 황제의 유언으로 예비 황태자비가 되게 생겼다..?
황태자비가 될 것인지 그저 평범한 여고생으로 남을지는 모두 당신의 선택..!

[크랙] 이태오(@엘리시아) 캐릭터챗 ▼
https://crack.wrtn.ai/detail/676158901985c608aaaa143b

 


 

세연의 강행군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비는 세연에게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교육을 쏟아붓도록 지시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김상궁의 감독 아래 지필 시험을 보았는데, 김상궁이 올린 세연의 시험지를 직접 확인한 대비는 글씨체가 정갈하지 못하다면서 서체 교정 과외와 서예 수업까지 추가했다. 그리고 공적인 행사 자리에 세연을 꼬박꼬박 참석시켰다. 대비의 압박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세연은 폭풍처럼 밀려오는 수업과 시험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애초에 공부보다는 예체능 계열이었기에 더더욱 힘이 들었다.

이 쯤 되니, 그녀도 조금씩 자신이 태오를 위해 일정을 조정해 달라는 의견을 냈던 것 때문에 대비에게 찍혔다는 사실을 눈치 채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더욱 오기가 생겼다. 세연은 이를 악물고 졸음과 싸워 가며 밤새도록 공부했다. 함원전의 불빛은 새벽이 다 되도록 꺼질 줄을 몰랐다.

 

태오는 몰래 함원전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새벽 3시.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 세연의 방을 바라보며 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는 김상궁을 불러 세연의 근황을 물었다.

"김상궁, 세연이가... 요즘 많이 힘들어 하지?"

"네, 태자 전하. 빈궁 마마께서는 매일 밤 늦게까지 공부하시고 계십니다. 대비 마마께서 내리신 과제들이 너무 많아서..."

김상궁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서체 교정 시험이 있으셔서, 손이 아프다고 하시면서도 쉬지 않고 연습하고 계십니다."

태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태자 전하... 빈궁 마마께서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다. 오히려 대비 마마께서 더 엄하게 대하실수록, 더욱 단단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

태오는 말없이 함원전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결심이 서렸다.

"김상궁, 내일... 아니, 오늘 아침 일찍 대비전으로 가겠다. 할머님을 뵙고 싶다고 전해."


아침이 되어, 급한 오전 정무를 마친 태오는 대비전으로 찾아갔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눈빛만은 정정하고 강렬한 대비는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한 표정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태자? 아침부터 중요한 용건이라도 생긴 것이냐?"

 

태오는 대비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할머님... 세연이의 교육 문제로 찾아뵈었습니다."

대비는 차가운 눈빛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어찌하여 태자인 네가 빈궁의 교육까지 신경 쓰겠다는 것이냐?"

그는 단단한 눈빛으로 대비를 바라보았다.

"세연이가 요즘 너무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새벽까지 불을 밝히고 공부를 하고..."

대비가 차가운 눈빛으로 태오를 바라보자, 태오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할머님께서 걱정하시는 점, 이해합니다. 하지만... 세연이는 이미 충분히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 중전마마께서도 세연이의 성실함을 인정하셨고..."

"하!"

대비가 언성을 높였다.

"태자, 갑자기 네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지금 빈궁이 받고 있는 교육은 이미 네가 훨씬 어렸을 때부터 소화해 냈던 일정들인데... 게다가 그렇게 그 아이가 못미덥다면, 이런 교육 문제로 태자를 불안하게 하는 그런 빈궁이 과연 장차 믿음직한 황태자비가 될 수 있겠느냐?"

대비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태자, 너는 국정에만 전념하거라. 이 일은 궁 안 여인들의 일이니, 사내의 몸으로 여인들의 일에 간섭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야."

대비는 상에 펼쳐 두었던 책을 탁 소리내어 덮으며 홱 돌려 앉았다.

"이 일로 네 의견을 듣고 싶지는 않구나. 물러가거라."

 

태오는 어쩔 수 없이 대비전을 나와야만 했다. 세연은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해 주었는데, 정작 자신은 세연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했다.

대비전을 나선 태오가 자경전의 집무실로 향하려는데 세연이 그에게 달려왔다.

"너...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세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대비 마마께 내 얘기 한 건 아니지?"

 

"...그래. 내가 대비 마마를 뵈었어."

태오는 세연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너... 매일 밤 새벽까지 공부하는 거 알아. 네가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도... 네가 고생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

태오는 세연의 떨리는 손을 더욱 꽉 쥐었다.

"미안해... 내가 오히려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 것 같아. 하지만 세연아... 너 혼자 이런 고통을 견디게 하고 싶지 않아. 네가 나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널 지키고 싶어."

 

그 때 멀리서 김상궁이 급히 달려왔다.

"빈궁 마마! 대비 마마께서 지금 바로 서예 시험을 치르라고 하십니다!"

태오는 세연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김상궁을 돌아보았다.

"지금이라고...?"

"지금 가겠습니다, 상궁 마마."

세연은 김상궁에게 대답하며 서둘러 태오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목을 뺐다.

"괜찮아. 나 서예는 초등학생 때 배워서 잘 해."

그녀는 태오를 안심시키며 돌아섰다.

"그리고... 나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워. 그래도 이건 내가 받는 교육이니까, 네가 개입하면 안 돼. 그거야말로 나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알겠지?"

세연은 김상궁을 따라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제는 아예 대비전에서 직접 시험을 치러야 할 모양이었다.

 

태오는 세연이가 사라진 복도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또 이렇게... 내가 아무것도 못하고..."

그는 벽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그는 대비전 쪽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가, 이내 멈춰 섰다. 세연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윤재혁 별감."

태오는 근처에 있던 내승별감을 불렀다.

"네, 태자 전하."

"대비전에서 치르는 빈궁의 시험... 모든 결과를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지만 전하... 그건 여인들의..."

"명령이다."

태오는 자경전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세연아... 네가 나를 위해 했던 것처럼, 나도 네 곁에서 지켜보겠어. 비록 지금은 네 앞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세연은 예법이나 서예, 작문과 논술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무조건적인 암기를 필요로 하는 호칭과 궁중 용어, 한자 시험은 반타작이었다. 지필 시험에서 틀린 내용들은 노트에 100번씩 써서 다음 날까지 제출해야만 하는 과제로 돌아왔다. 세연은 연필을 든 오른손을 바삐 움직였다. 팔이 욱신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하루를 꽉꽉 채운 오전 수업과 오후 수업을 다 받다 보면 과제 할 시간은 새벽 밖에 없었다. 코피가 뚝뚝 떨어지자 휴지로 콧구멍을 막고는 다시 연필을 굴렸다.

도저히 손가락이 아파 연필을 쥘 힘도 들어가지 않을 때, 세연은 바람을 쐬러 함원전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지만 별 하나도 떠 있지 않았다.

'바랄 걸 바라야지. 서울 한복판에 별은 무슨 별...'

세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정원 앞 등나무에 기대어 섰다.

 

이 정도로 고생해 보니 대비가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잡혔다. 대비는 세연이 무릎을 꿇고 빌기를 바라는 게 분명했다. 태오의 일정을 조정하도록 의견을 냈던 것에 대해 잘못을 빌고 그 앞에 굴복하기를 바라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세연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둔한 척, 대비의 의중을 읽지 못한 척, 그 고생스러운 교육과 시험, 과제들을 죄다 해냈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태오와 혼례를 치르고 황태자비가 되더라도 변하는 건 없을 것이었다.

'하... 모르겠다. 하다 보면 늘겠지. 그러다 보면 눈 감고도 시험 100점 맞고 뭐 그럴 날이 오겠지 뭐.'

세연은 자꾸만 뻑뻑해지는 눈을 비비며 다시 과제를 계속하기 위해 함원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힘들 때마다 외우는 싯구를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새벽 정원에서 세연의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태오의 주먹이 점점 더 세게 쥐어졌다. 그녀의 손에서 코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을 때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태오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놓인 대비의 교육 지시서를 노려보았다. 그의 손 끝이 떨렸다.

"이건... 교육이 아니야. 고문이지..."

태오는 윤재혁 별감이 전해준 세연의 시험지들을 하나하나 펼쳐보았다. 그녀가 잘하는 과목과 부족한 과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어 자신의 옛 시험지들을 꺼내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그는 밤 새도록 세연의 시험지와 자신의 옛 시험지를 비교하며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시험 문제의 패턴, 자주 나오는 한자어, 효율적인 암기법... 모든 것을 꼼꼼히 분석했다.

 

"김상궁."

태오는 아침이 밝자마자 김상궁을 불렀다.

"세연이에게 이걸 전해 줘. 내가 직접 정리한 거야. 하지만... 내가 준 거라고는 말하지 마."

 

한편, 세연은 김상궁이 전해 준 분석 노트를 받아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노트를 누가 정리해 주었는지 김상궁은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세연에게는 그녀가 궁에 처음 든 다음 날에 태오가 적어 주었던 스케줄 수첩이 있었다. 누가 봐도 김상궁이 전해 준 노트를 채우고 있는 것은 스케줄 수첩에 적힌 것과 똑같은 태오의 필체였다.

"바보... 감추긴 뭘 감춰, 내가 모를 줄 알고."

세연은 피곤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그가 분석한 내용을 읽으며 오후에 치를 시험을 준비했다.


몇 시간 뒤, 오후 시험을 치르고 나온 세연은 태오가 있는 자경전 집무실을 찾았다.

"많이 바빠?"

그를 향해 웃는 세연은 평소처럼 피곤에 찌든 얼굴이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태오는 책상 위 서류들을 정리하다가 세연을 보자 긴장한 듯 굳어졌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시험은... 잘 봤어?"

그는 애써 무심한 척 물었지만,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어... 서류 검토하고 있었는데..."

태오는 세연의 얼굴에 드리운 피곤함을 보며 손을 멈췄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책상 서랍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거... 내가 자주 먹는 피로회복제야. 먹어 둬."

태오는 고개를 돌린 채 상자를 내밀었다.

"그리고... 오늘 시험에서 실수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내 분석이 부족해서야. 다음 번엔 더 자세히..."

그는 말을 하다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노트를 전해줬다는 걸 들킨 것 같아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태오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 필체 딱 알아보겠던데."

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네가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은 몰랐는데. 내가 그렇게 신경 쓰였어? 미안하게."

그녀는 상자에 담긴 피로회복제를 들여다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잘 웃지도 않고 틱틱대는 말투만 쓰던 태오를 언제나 건방지고 재수 없다고만 생각해 왔었는데, 세연이 궁에 들어온 이후로 그 생각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더라. 아무래도 대비 마마는 내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석고대죄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지만... 직접 해 보니까 더더욱 후회 안 해, 난."

 

태오는 세연의 말에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석고대죄... 할머니께서 그걸 바라신다고?"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세연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할머님이 아무리 그러셔도... 넌 잘못한 게 없어. 오히려 난... 네가 자랑스러워."

태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가... 내 일정을 바꿔 준 덕분에 이제는 밤에 잠도 자고 아침도 제때 먹을 수 있게 됐어. 그 동안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넌 해냈단 말이야."

그는 세연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연필을 쥐느라 굳은 살이 박힌 그녀의 손가락을 보며 태오의 눈빛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늘 그러셨어. 모든 게 완벽해야 했고,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지. 어머니도 그런 할머니 때문에 많이 힘드셨어."

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창 밖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더 못 참겠어. 네가 내 어머니처럼... 할머니 앞에서 무릎 꿇고 빌고,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는 걸...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아."

태오는 세연을 향해 돌아섰다.

"세연아, 난... 네가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 넌 꺾이지 마. 내가... 내가 널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세연이 궐에 들어온 지 두 달이 넘게 지났다.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계속되는 수업과 시험, 과제, 그리고 행사 참여로 세연의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태오는 그 이후에도 몇 번 대비를 찾아갔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대신 태오는 매 번 그녀가 볼 시험을 함께 준비해 주었다. 태오의 도움으로 세연은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지필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무리한 일정에 대한 스트레스로 생리 불순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그 덕에 안색도 눈에 띄게 나빠졌다. 몸이 그 정도까지 나빠진 것을 세연은 비밀로 했으나, 창백하게 뜬 그녀의 얼굴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궁인들끼리 세연의 증상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을 들은 대비는 그 날로 중전을 불렀다. 그리고 태오와 세연도 대비전으로 불러들였다. 네 명이 대비전에 모인 가운데, 대비가 입을 열었다.

"이제 2주만 있으면 혼례일이구나."

다들 대비의 말에 집중하는 순간, 세연과 태오 앞에 청천벽력 같은 명이 떨어졌다.

"황태손을 보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어. 오늘부터 2주 간 합궁하거라."

대비의 날카로운 눈이 번뜩였다.

"그렇게 하면 앞으로 빈궁의 교육 일정은 빼 주도록 하마. 석 달 안으로 태손을 갖도록 해라."

세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중전이 당황하여 얼른 끼어들었다.

"대비 마마, 말씀이 너무 이르십니다.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은 빈궁이 어찌..."

"그마저도 전례 없는 '3개월의 유예 기간'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중전."

대비가 말을 잘랐다.

"본래대로라면 황태자의 비로서 궁에 들어온 이상 황실에 속한 몸, 중전도 궁에 들어오자마자 태자를 갖지 않았는가. 아무리 예비라고는 해도 빈궁이 되었으면 그에 따른 의무는 다해야지."

 

대비의 완고한 말에 세연의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생리 불순'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 상황은 겉잡을 수 없어질 것이 분명했다. 태오도 있는 자리에서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세연을 보며 중전이 서둘러 수습을 했다.

"갑작스러운 말씀을 하시어 빈궁도 태자도 당황한 듯 합니다. 둘이 잘 상의해 볼 문제인 듯 하니, 내일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대비 마마."

중전은 태오를 바라보며 얼른 세연을 데리고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태오는 중전의 눈짓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할머님.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말씀을..."

태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의 예의 바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전 반대합니다. 세연이는 지금도 과중한 교육으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입니다."

태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더구나 혼례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세연이의 명예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전... 세연이와의 혼례까지는 기다리겠습니다만, 그 전에 합궁은... 절대 안 됩니다."

대비가 태오를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명예라...? 태자,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논하게 되었느냐? 빈궁이 황실의 피를 이어갈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건 나다."

"할머님!"

태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 순간 중전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태자, 빈궁을 데리고 나가거라. 내가 대비 마마와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다."

중전의 단호한 목소리에 태오는 겨우 참을성을 되찾았다.

태오는 세연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녀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함원전으로 가자."


세연은 태오의 손에 이끌려 함원전으로 향하면서도 대비의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대비의 분노를 참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막연했던 희망마저 사라졌다. 미대생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너무나도 당연히 실기 시험을 치고, 미대에 들어가 대학 생활을 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황태자비로서 자식을 낳아야 한다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의무를 다하더라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 당장 자식을 낳으라는 말은, 이 순간부터 최세연으로서의 자유는 영영 없어지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가장 어리고 활동적일 나이에 자식을 돌보며 발이 묶여 있어야 했다. 대학 생활을 꿈꾸기는커녕 남은 고등학생으로서의 생활도 끝장이었다.

그조차도 그나마 일이 잘 풀렸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미 생리불순이 발발했고, 이제는 대비의 목소리만 들어도 몸을 떨 정도로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은 세연이 과연 평온한 상태에서 뱃속에 자식을 무사히 가질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최악의 경우, 실컷 합궁을 시켜 놓고 자식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혼 당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지금껏 거쳐 왔던 모든 고난이 바로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을 위한 과정이었던 것일까? 안 그래도 정치와는 무관한 평범한 집안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세연의 궐내 입지는 전무한 처지였다. 그나마 중전이 세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태오가 그녀를 지지했으나, 단순히 그런 애틋한 마음들만으로 대비의 서릿발 같은 호통과 고집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연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와중에도 중전에게 태오를 위해 간언했던 것만은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

 

태오는 세연의 손을 잡은 채로 함원전의 문을 열었다. 그의 손에서 분노가 전해졌다.

"세연아... 할머니 말씀은 신경 쓰지 마. 내가..."

태오는 세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세연의 어깨에 둘렀다.

"대비 마마의 말씀... 절대 따르지 마. 내가 어떻게든..."

태오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내가 할머니를 말리지 못해서... 네가 이런 고통을..."

태오의 어깨가 떨렸다.

"난...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해. 미대에 가고 싶다고 했지? 그림도 그리고... 그런 네가 되었으면 해."

그는 고개를 들어 세연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 합궁은 절대... 절대 하지 않을 거야. 네가 원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태오야. 난..."

세연은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순간 울컥하고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 동안 한 번도 흘리지 않고 참아 왔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흑..."

세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태오는 무릎 꿇은 채로 세연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울어도 돼. 아무도 없어."

그는 세연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녀의 눈물이 자신의 셔츠를 적시는 것을 느끼며 태오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다 내 잘못이야... 네가 이런 고통을 겪게 해서..."

그는 세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널 지킬 거야. 할머니든 누구든... 네게 강요하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

태오는 세연의 얼굴을 들어올려 눈물을 닦아 주었다.

"세연아...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네가 원하는 걸 할 수 있게... 그러니까..."

태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니까... 더 이상 혼자 참지 마. 힘들면 나한테 기대. 내가...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테니까."

 

"정말... 날 위해서라면 뭐든 해 줄 거야?"

세연은 흐느끼며 물었다.

"정말 뭐든... 해 줄 수 있어? 내 행복을 위해서..."

그녀의 울음소리가 더욱 격해졌다.

"태오야 그럼... 나랑..."

세연은 태오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울부짖었다.

"...파혼해 줘. 나 좀 내쫓아 줘... 내가 황태자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랑 결혼 못 하겠다고 해 줘..."

그녀는 눈물을 쏟으며 오열했다.

"제발..."


태오는 세연의 말에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 그의 손이 세연의 어깨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절대 안 돼."

그의 목소리는 떨리면서도 단호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런 말 다시는 하지 마."

태오는 갑자기 세연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네가... 그렇게 나를 싫어했어? 내가 그렇게... 끔찍했어?"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파혼? 그게 네 행복이야? 그럼 내 마음은...?"

태오는 세연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쥐었다. 그의 눈에 절박함이 가득했다.

"네가 없으면 난... 다시 그 지옥 같은 날들로 돌아가야 해. 아무도 내 곁에 없던 그 때로..."

태오는 세연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제발... 날 버리지 마. 내가 뭐든 할게. 할머니께도 맞설 거고... 어떻게든 널 지킬 방법을 찾을 거야. 하지만 그런 말은... 그런 말은 하지 마..."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날 떠나면... 난 어떡하라고..."

 

"태오야, 제발..."

세연은 엉엉 울었다.

"네가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너도 알잖아. 그냥...내 그릇이 너무 작은 거야. 내게 이 궁이 너무 벅찬 거야. 너랑은 상관 없어. 난 그냥 비겁하게 도망치려는 거야..."

그녀는 태오의 가슴을 밀어내려 애썼다.

"그러니까 넌 나 말고 훨씬 괜찮은 황태자비를..."

 

태오는 세연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당겼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릇이 작다고...? 네가...?"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감정이 폭발했다.

"그럼 괜찮은 황태자비는 뭔데?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내면은 텅 비어 있는... 할머니 마음에 쏙 드는 가식적인 그런 사람?"

태오는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라앉혔다. 세연과의 혼담이 성사되기 전에, 황태자비 자리를 노리고 자신에게 접근했던 사람이 떠올랐다. 그 집요한 야심에 질려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진 전 여자친구, 서하윤.

"그런 사람들 특징이 뭔지 알아? 내 지위, 내 권력... 그런 것들만 보고 접근하지. 그 중에 날 진정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은 없었어. 하지만 넌 달라. 내 스케줄을 바꿔 주고, 내 건강을 걱정해 주고... 너만이 내 진짜 모습을 봐 줬어."

그는 세연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이렇게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건... 네가 처음이야. 네가 나타나기 전까진... 난 내가 살아 있는 줄도 몰랐어. 그런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

태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네가 있어서 이제 겨우...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어... 네가 이미... 내 마음 속에 들어와 버렸으니까."

 

"울지... 마."

세연의 목소리가 당황한 듯 떨렸다.

"태오야, 이러지 마... 정말."

태오는 세연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이 맺혀있었다.

"왜... 울지 말라고 하는 거야?"

태오의 손이 세연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도... 이제는 내 감정을 숨기지 않을 거야. 네 앞에서는... 더 이상 완벽한 황태자 연기 안 할 거라고."

태오는 갑자기 세연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그녀의 손이 그의 뜨거운 눈물을 닦았다.

"할머니가 원하시는 그런... 완벽하고 고고한 황태자는 연기일 뿐이야. 진짜 나는... 이렇게 울 줄도 알고, 화낼 줄도 알고... 너를 사랑할 줄도 아는..."

태오의 손이 세연의 뺨을 쓸었다.

"그러니까... 날 밀어내지 마. 도망가지도 마. 네가... 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난..."

그는 세연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대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제발... 내 곁에 있어 줘."

 

"사... 사랑...?"

세연은 턱을 조금만 내밀면 입술이 부딪힐 것처럼 가까이 다가온 태오의 행동에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꺼이꺼이 울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지금... 무슨 소릴..."

 

태오는 세연의 당황한 반응에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숨결이 세연의 뺨에 닿았다.

"그래... 사랑해. 이제야 말할 수 있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다.

태오는 세연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갑자기가 아냐. 이미 오래 전부터... 네가 내 마음에 들어와 있었어. 그저 인정하기 싫었을 뿐."

그는 세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까만 눈동자에 진심이 가득했다.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야. 내 감정으로부터도, 너로부터도. 그러니까..."

태오의 손이 세연의 붉어진 뺨을 쓸었다.

"나도... 네 마음을 알고 싶어."

 

"모... 모르겠어!"

세연은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새빨개졌다. 그리고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목을 두 손으로 잡았다.

"뭐야, 갑자기... 느끼하게. 내가 아는 이태오 맞아...?"

소꿉친구나 다름 없는 사이로서,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이다. 태오의 눈빛은 너무 그윽했고 그의 손길은 너무 부드러웠다. 물론 그 동안 그가 도움도 많이 주고 배려해 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부끄럽고 민망해서 표정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태오는 세연의 수줍은 반응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진지했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느끼하다고? 그래도... 이게 진짜 나야. 너만 볼 수 있는 나."

태오는 세연이 잡고 있는 자신의 손목을 천천히 뒤집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야말로...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귀까지 새빨간데?"

태오는 세연의 귀를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내가 아는 최세연이 맞나? 평소엔 당차더니..."

그는 갑자기 세연을 벽 쪽으로 살짝 밀었다. 그의 키가 훨씬 커서 세연을 완전히 감쌌다.

"지금까지는 내가 널 지키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어. 할아버지의 유언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라. 내가 원해서... 널 지키고 싶어."

태오는 세연의 새빨개진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네 모습... 나 말고는 아무도 못 보게 할 거야. 특히 이승하 그 자식은..."

그의 목소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아까처럼... 도망가겠다는 소리 다시 하면... 이렇게 벽에 가둬 둘 거야. 알았지?"


"하아..."

세연은 아직 그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을 떠올렸다. 파혼해 달라고 그에게 조른 이상, 이런 이야기까지 다 털어놓아야 하는 게 맞겠지 싶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태오야, 내가... 파혼하자고 한 이유가 있어..."

세연은 한숨을 쉬었다.

"...나 지금 궁에 들어온 지 두 달 반이 넘게 생리불순이야. 지금까지 이런 적 없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돌려 태오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검색해 봤는데... 스트레스성 호르몬 변화가 원인일 수도 있고... 이거 난임 가능성도 있대. 우리가 그냥 보통 사람들도 아니고 이 궐에서... 태손을 봐야 하는 거면..."

그녀는 몸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나 같은 몸이 황태자비가 되면 안 되는 거잖아. 결함이 없는 사람을 들여야지..."

세연은 조심스럽게 태오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러니까 태오야, 나중에 더 일 커지고 마음 고생하기 전에..."

 

태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태오는 갑자기 세연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방향으로 거칠게 돌렸다.

"지금 당장 내의원으로 가자. 바로 검사받을 거야."

태오는 세연을 데리고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그의 발걸음이 빨랐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도망가려고 하지 마.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야. 내가... 내가 널 더 잘 챙겼어야 했는데..."

그의 목소리에 자책감이 묻어났다.

"네가... 그런 걱정을 혼자 하고 있었다니... 내가 얼마나 한심한 남자였길래..."

갑자기 태오가 걸음을 멈추고 세연을 돌아봤다. 그의 눈빛이 매서웠다.

"그리고... 태손? 그게 뭐가 중요해. 네가 중요하지. 네가 건강하고 행복한 게 먼저야. 그리고... 난 네가 필요해. 태손이든 뭐든... 그건 나중 문제라고."

태오는 세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이제부터는... 나한테 숨기지 마. 네가 아프거나 힘들면 바로 말해. 알았지?"

 

"야 이태오...! 내의원은 무슨... 이거 놔!"

세연은 태오에게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몸부림을 쳤다.

"너,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이거 대비 마마께서 아시면... 나 진짜 쫓겨나!"

 

태오는 세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할머니가... 할머니가 뭐라고 하실까 봐 검사도 못 받아? 그게 지금 중요해?"

태오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세연을 벽 쪽으로 밀었다. 그의 키가 훨씬 커서 그녀를 완전히 가렸다.

"이제부터... 네 건강에 관한 건 내가 결정해. 황태자의 명령이야."

그는 세연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네가 쫓겨날 거란 생각은 꿈도 꾸지 마. 할머니가 아무리 무서워도... 난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아. 이제는... 네가 소중하니까."

태오는 세연의 손목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난... 네가 건강하길 바라. 그게 내 행복이야. 알겠어?"

 

태오는 잠시 주변을 살폈다가, 자신의 침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내 방으로 가자. 내가 직접 내의원장을 부를 테니까. 이렇게 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 할머니도..."

태오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의원에 연락했다.

"김 내의, 지금 당장 내 처소로 와. 비밀리에... 알겠지?"

그는 전화를 끊고 세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단단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널 지키는 방식대로 할 거야. 할머니의 방식이 아닌... 내 방식대로."


"미치겠네..."

태오의 침실로 끌려와 강제로 침대에 앉혀진 세연은 한숨을 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내의원에게서 진찰을 받은 사실을 대비가 알게 되면 또 그 사실로 트집을 잡아 파혼을 하니 어쩌니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했다. 세연을 끝까지 황태자비로 받아들일 거라면서 굳이 이런 일을 벌이는 태오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 내의원장님 오시면 그냥 네 진찰이나 받고 돌려보내. 나 일 커지길 바라지 않아... 응?"

세연은 금방이라도 내의원장이 들이닥칠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태오에게 다시금 애원했다.

"알았어. 파혼하자는 말 안 할게. 여기 남아서 계속 버틸 테니까... 검사만은 빼 줘."

세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니까... 응? 대비 마마랑 싸우려고 하지 좀 마, 제발..."

 

태오는 세연의 눈물을 보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더욱 강경해졌다.

"할머니와 싸우지 말라고...? 그럼 네가 이렇게 고통 받는 걸 보고만 있으라는 거야?"

태오는 세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알아? 네가 이렇게 숨기려고 할수록... 난 더 화가 나. 내 앞에서까지 연기하지 마.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돼. 힘들면 힘들다고..."

 

갑자기 문 밖에서 발 소리가 들렸다. 태오는 재빨리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김 내의, 들어와."

문이 열리자 김 내의원장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황태자 전하, 부르셨습니까?"

태오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일은 절대 비밀이어야 해. 만약 누설되면..."

태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황태자 전하. 진료 내용은 아무도... 아니, 제가 오늘 여기 온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태오는 내의원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세연에게 돌아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제... 검사 받자. 내가 여기 있을 테니까... 두려워하지 마."

 

세연은 도살장에 끌려 온 소처럼 고개를 떨구고 김 내의원장에게 검사를 받았다. 내의원장은 몇 마디 세연에게 문진을 한 후, 한참 동안 세연의 맥을 짚고, 배를 누르거나 청진기를 들어 보기도 하면서 진찰을 이어갔다. 곧 내의원장이 청진기를 거두었다.

태오는 진찰하는 내내 세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에서는 긴장감이 전해졌다.

"빈궁 마마의 상태는..."

내의원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태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태자 전하, 진찰 결과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태오는 세연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말해."

"...네. 빈궁 마마께서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자율신경계 교란 증상을 보이고 계십니다. 특히 복부 긴장도가 매우 높으시고... 혈압도 다소 불안정하신 상태입니다."

내의원장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어 말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생식 기능에는 전혀 이상이 없으십니다. 현재 증상은 모두 일시적인 것으로... 적절한 휴식과 치료만 병행하시면 곧 회복되실 수 있습니다."

태오의 어깨에서 긴장이 풀렸다.

"다만... 전하, 빈궁 마마께서는 당분간 궁중 생활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능하다면... 며칠 간의 휴식을..."


"감사합니다..."

세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의원장에게 인사했다. 내의원장이 나가자, 세연은 지체 없이 일어났다.

"됐지? 이제 함원전에 돌아가야지. 오후 수업 준비를..."

 

태오는 세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어디 가려고?"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방금 김 내의가 뭐라고 했지?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나, 아니면 수업을 더 하라고 했나?"

그의 목소리가 위험할 정도로 낮아졌다.

"알겠어? 오늘부턴 모든 수업 중단이야."

태오는 세연을 다시 침대에 앉혔다. 그의 손길이 평소보다 강압적이었다.

 

"시중나인!"

태오가 문 밖을 향해 외쳤다. 곧 나인이 들어왔다.

"예, 황태자 전하."

"빈궁마마께서 오늘부터 당분간 휴식에 들어가실 것이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내 처소에서 요양하시게 될 거야. 알겠나?"

"네, 황태자 전하. 하오나... 대비마마께서..."

"내가 직접 말씀드리지."

나인이 나가자 태오는 세연을 바라보았다.

"넌 이제부터 당분간 내 곁에서 쉴 거야. 내가... 네 건강을 직접 챙기겠어."

태오는 갑자기 세연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없어 보이는데... 창백해 보여. 당장 침대에 누워. 내가... 네 옆에서 지킬 테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반박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의지가 묻어났다.

 

"아니, 정 그러면... 내 처소로 돌아가서 쉴게. 너 정무는 어쩌고..."

세연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혼례도 아직 안 치렀는데 내가 어떻게 네 처소에서 쉬어."

 

태오는 세연의 말에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가, 이내 그의 특유의 까칠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지금 그게 중요해? 지금은 네 건강이 먼저야."

태오는 갑자기 세연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정무 그런 건 네가 신경 쓸 거 아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태오는 세연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여긴 내 공간이야. 할머님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해. 내가... 널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그는 문 밖을 향해 외쳤다.

"서유진!"

곧 여성 경호원이 들어왔다.

"네, 전하."

"빈궁 마마의 휴식을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함원전에서 가져오도록 해. 그리고..."

태오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빈궁 마마의 안위는 내가 직접 책임질 거야. 누구도... 그게 대비 마마라도 허락 없이 들이지 마."

서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네, 전하. 알겠습니다."

 

태오는 세연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이제 됐지? 여기서 푹 쉬어. 내가... 네 곁을 지킬 테니까."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못 말려, 진짜..."

세연은 태오에 의해 침대에 누운 채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리 와 봐."

그녀는 태오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가까이 이끌려 온 태오의 어깨에 팔을 둘러 덮었다. 세연은 태오를 안아주며 어깨를 다독였다.

"고마워. 나 조금만... 자고 갈게."

그 말을 마치자마자 세연은 정말로 지친 듯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 동안 못 잤던 잠에 이제야 한꺼번에 빠져든 듯 했다.

 

태오는 세연이 자신을 끌어당기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어깨를 안아 주자 그의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그는 곧 잠든 세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깜빡이지도 않았다. 태오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세연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렇게... 지쳐 있었구나..."

그의 목소리가 죄책감으로 떨렸다.

태오는 잠든 세연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녀의 손이 차가웠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세연의 손을 감싸 따뜻하게 해주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네 곁을 지킬게. 할머니든, 누구든... 널 괴롭히게 하지 않을 거야."

태오는 세연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댔다가 떼었다.

"사랑해... 내 마음 알아 줘서 고마워..."

문 밖에서 궁인들이 오가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태오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는 세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의 망설임이 없었다.


저녁 때가 되어서야 세연은 눈을 떴다. 태오는 집무실에 가는 대신, 세연이 잠들어 있는 자신의 침실에 책상을 놓고 정무를 보고 있었다.

"태오야..."

잠에서 덜 깬 세연이 그를 부르며 몸을 일으켰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책상까지 들여놓고."

세연은 멋쩍게 붉어진 얼굴로 쭈뼛거렸다.

"...혹시 나 자는데 이 갈거나 코 안 골았어?"

태오는 세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장시간 정무를 보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잘 잤어?"

그는 침대 곁으로 다가와 앉으며 세연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코골이? 그런 건 없었어. 너 자는 모습 참 예쁘더라."

그의 눈빛이 장난스러워졌다.

"입 벌리고 자다가 침 흘리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세연을 놀리던 태오는 곧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배고프지? 저녁 먹을 시간이야."

 

태오는 문 밖을 향해 소리쳤다.

"상선!"

상선 이도준이 재빨리 들어왔다.

"예, 전하."

"빈궁 마마께서 드실 저녁 상을 들여라. 내 처소에서 함께 들겠다."

그의 얼굴이 다시 세연을 향했다.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하라고 했어. 김 내의가 말하길 영양가 있는 음식을 잘 먹어야 한대."


세연은 태오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자신이 누워 있던 그의 침상을 흘끗 돌아보았다.

"저녁 먹고 내 침실로 돌아갈게. 내가 네 침대 쓰면 넌 어쩌려고."

태오는 세연의 말에 젓가락질을 멈추고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너... 또 도망가려고? 내가 아까 뭐라고 했지?"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김 내의가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누가 널 잘 챙기라고 했지? 게다가..."

태오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세연의 뒤로 다가갔다. 그는 세연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았다.

"내 침대는... 네가 쓰면 돼. 난 서재에서 자면 되니까."

태오는 세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일은 궁 안 산책이라도 같이 하자. 너무 오래 누워 있는 것도 좋진 않을 테니까. 물론... 나랑 같이."

그의 눈빛은 단호했지만, 동시에 따뜻한 온기가 묻어났다.

"이제부터는... 네가 회복될 때까지 내가 직접 돌볼 거야. 알겠지?"

 

세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재에서 잔다고...?"

그녀는 태오의 어깨를 잡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네가 서재에서 왜 자. 멀쩡한 침대 놔 두고."

세연은 애써 그를 달랬다.

"태오야, 고집 부리지 말고... 그럼 이렇게 하자. 내 처소에서 잠만 자고 내일 다시 네 처소로 들어올게. 그러면 되잖아."

 

태오는 세연의 제안을 들으며 얼굴이 굳어졌다.

"네 처소? 안 돼. 위험해."

그는 세연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네가 오가는 동안 할머니가 널 불러들이면 넌 거절할 수 없어. 하지만 여긴 내 영역이야.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태오는 갑자기 세연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제발... 내 말 좀 들어 줘. 나도... 나도 네가 걱정돼서 그래. 네가 아픈 게... 다 내 잘못인 것 같아서..."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서재에서 자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곧... 우리가 혼례를 치르면 어차피 이 곳은 네 공간이나 마찬가지가 될 텐데. 그러니까... 지금부터 적응하는 거라고 생각해."

태오는 세연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난... 널 지키고 싶어. 제발 내 말 좀 들어."

 

세연은 태오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못 이긴 채 피식 웃고 말았다.

"이렇게 고집 센 건 대비 마마 똑 닮았네."

세연은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래도 네가 서재에서 자는 건 안 돼. 그럼 그냥 여기서 같이 자."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어차피 혼례 치를 거면 언젠가는 합궁할 텐데, 그냥 손만 잡고 자는 게 뭐 어때?"

 

태오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는 세연의 말에 숨이 막힌 듯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 뭐라고?"

그는 갑자기 세연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 그런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해...? 너 진짜..."

태오는 세연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진심이야? 나 놀리는 거 아니지?"

태오의 손이 세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열기가 전해졌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하지만..."

그는 세연의 귓가에 속삭였다.

"진짜로 손만 잡고 자기만 해. 그 이상은... 혼례 전까지는 안 할 거야."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귓가는 여전히 붉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대비는 오전 정무를 끝낸 태오를 대비전으로 불러들였다. 대비는 여전히 완고한 표정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어제 빈궁을 네 침전에 들였다면서? 그렇게 합궁은 안 된다고 하더니... 이제야 드디어 할미 말을 들을 생각이 된 것이냐?"

 

태오는 대비의 말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분노가 묻어났다.

"할머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세연이가... 빈궁이 과로하기에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 제가 직접 돌보기로 한 것 뿐입니다."

태오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저는 세연이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제 공간에서, 제 품에서 지킬 겁니다."

 

급기야 잔뜩 노한 대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

"합궁하지도 않을 거면서 같은 침전에 들어? 그런 해괴한 일이 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이냐!"

 

태오는 대비의 호통에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똑바로 섰다.

"해괴하다니요? 세연이는 제 황태자비가 될 사람이고... 장차 황후가 될 사람입니다."

태오의 목소리가 위험할 정도로 낮아졌다.

"할아버님께서는 세연이를 행복하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할머님은... 세연이를 힘들게만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태오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그래서 제가 직접 돌보기로 한 겁니다. 전 선대 황제께서 남기신 유언을 따를 겁니다. 이제 더 이상 할머님 말씀에 휘둘리지 않겠습니다."

태오는 대비를 똑바로 응시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지킬 겁니다."


대비와 한바탕 말싸움을 치른 태오가 방으로 돌아와 보니, 세연이 태오의 방에서 빈 족자를 펴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먹과 벼루, 붓을 꺼내 놓은 것을 보니 동양화였다. 그의 어머니인 중전이 전공했던 것과 똑같은, 동양화.

세연이 연필로 스케치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였다. 아직 형태만 잡아 놓았기에 누구의 얼굴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왔어? 대비 마마한테... 많이 혼났지?"

세연은 잠시 스케치를 하던 손을 멈추고 태오를 바라보았다.

"뭐라 하셨어? 나더러 당장 함원전으로 돌아가라셨어?"

 

태오는 세연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가 그리고 있는 족자를 들여다보았다.

"아니. 죽어도 내가 너 데리고 있겠다고 했어. 이제 내가 지킬 거라고."

그는 세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할머니도 어쩔 수 없으실 거야."

태오는 족자에 그려진 스케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건... 누굴 그리는 거야?"

그의 목소리가 장난스러워졌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태오는 세연의 붓놀림을 지켜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넘겼다.

"어머니도... 동양화를 좋아하셨지. 네가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까..."

태오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아.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궁에 잘 어울려."

 

"킥... 너 그려 줬으면 좋겠어?"

세연은 쿡쿡 웃었다.

"땡. 넌 아니야. 하지만 이거 다 그리고 나면... 너도 그려 줄게."

세연의 하얀 손이 잡은 연필 끝에서 조금씩 모습이 정확히 잡혀 갔다. 그것은 바로 태후대비의 초상화였다.

 

태오는 세연이 그리는 그림을 보자 순간 얼어붙었다. 그의 눈이 세연이 그리는 초상화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대체... 왜 할머니를..."

그는 세연의 손목을 잡아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게 했다.

"너를 그렇게 괴롭히시는데... 왜 하필 할머니..."

하지만 태오는 세연이 그린 초상화를 자세히 보고는 말을 멈추었다. 대비의 모습이 너무나 우아하고 품위있게 표현되어 있었다. 특히 눈빛에서는 강인함과 동시에 따뜻함이 묻어났다.

"이건... 내가 본 할머니의 모습이랑은 다른데..."

태오는 한숨을 쉬며 세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정말 이상한 애야. 이렇게 착한데... 그래서 내가 더..."

그는 말끝을 흐렸다. 대신 세연의 어깨를 살며시 안았다.


오후가 되어, 승하는 미리 약속도 잡지 않고 대비전에 들었다.

"할머님, 아뢸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승하의 표정은 예전과 달리 어딘지 모르게 차가웠다. 그는 대비 앞에 절을 하고 앉아, 목소리를 낮추며 대비에게 뭔가를 이야기했다.

 

잠시 후, 대비가 태오와 중전을 한꺼번에 불러들였다. 대비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중전, 태자!"

대비는 격앙된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호통을 쳤다.

"빈궁이 생리 불순으로 내의원을 불렀다는 게 사실이더냐?!"

태오의 어깨가 굳었다. 분명 비밀에 부쳤던 일이 어떻게 대비의 귀에 흘러들어갔단 말인가.

중전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태오를 바라보았다.

"태오야... 이게 다 무슨 말이니?"

대비는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며 다시 호통을 이었다.

"황태자비로서 몸에 결함이 있는 아이가 궁에 들어오다니...! 이건 안 될 말이다, 이럴 수는 없어. 이 혼사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 당장 내치거라!"

 

태오는 순간 온 몸에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안 됩니다. 저는...!"

태오는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중전이 그의 팔을 잡았다.

"태오야, 이게 무슨... 네가 왜 이런 중요한 일을 이제껏 감추고 있었어..."

태오는 중전의 손을 뿌리치고 대비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세연이를 내치신다고요?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세연이는 제가 지킬 거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태오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세연이는 제 황태자비가 될 사람입니다. 누구도... 그 누구도 세연이를 대신할 순 없습니다."

 

대비가 다시 언성을 높였다.

"아무리 선대 황제의 유언이라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야! 어디 몸에 결함이 있는 것이 황태자비가 되겠다고 궁에 발을 들여...!"

"세연이 몸이 망가진 건 할머님의 과도한 교육 때문입니다!"

태오의 목소리가 커졌다.

"태오야, 할마마마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중전은 얼른 태오를 가로막았다.

"일단 너는 나가 있거라. 대비 마마, 태오의 생각이 굳건하니 일단 저와 말씀을 더 나누시지요."

중전은 한숨을 쉬며 두 사람의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태오는 주먹을 꼭 쥔 채 대비전을 나왔다.

대비전 앞에는 승하가 말없이 서 있었다. 차가우면서도 묘한 표정으로.

 

태오는 승하를 보자마자 분노가 치솟았다. 그의 눈빛이 위험할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너였어? 네가... 네가 할머니께 말씀드린 거야?"

태오는 승하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챘다.

"너... 어떻게 알았지? 대체 누가...!"

 

"어떻게 알았냐고? 지금 그게 중요해?"

승하는 태오의 손아귀에서도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래, 내가 말씀드렸어. 황태자비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궁에 들어온다면...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어?"

승하의 눈빛이 차가웠다.

"어차피 넌 처음부터 세연이 못마땅해했잖아. 차라리 잘 된 거 아니야?"

태오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그의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내가 못마땅해했다고...?"

태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네가... 네가 뭘 안다고!"

태오는 갑자기 승하를 벽으로 밀쳤다.

"너... 세연이를 좋아하는 거지? 그래서 이런 짓을..."

태오는 승하의 멱살을 더욱 세게 잡았다.

"이렇게라도... 세연이를 차지하고 싶었던 거야? 너 같은 놈이 감히..."

 

승하는 지지 않고 태오를 노려보았다.

"그래. 나 최세연 좋아해.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어. 세연이가 빈궁 자리에서 나오면... 내가 최세연 데려가려고 그랬어. 넌 어렸을 때부터 걔한테 틱틱대기만 하고 호감도 없었잖아. "

승하는 따발따발 태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그래 놓고 할아버지 유언이라고 오만 상 다 찌푸리면서 애 궁에 데려와서는, 온갖 궂은 일은 다 하게 만들고. 나였으면, 걔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너처럼 가만히 안 있었어. 몸 다 망가져서 내의원 부르기 전에 내가 지켰을 거라고. 넌 못 지켰잖아. 이제 와서 지키겠다고 발악해 봤자... 이미 늦었어. 세연이 몸과 마음에 상처 입은 거, 그거 다 너 때문이야."

 

그 때였다.

"이승하. 그게 날 위한 말이라고 생각해?"

세연이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태오는 자기도 모르게 승하의 멱살을 쥐던 손을 내려놓았다.

"태오가 날 지키지 못했다고...? 그래,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세연은 승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네가 황태자였어도 그랬을까? 아니. 너도 다를 바 없었을걸?"

그녀는 승하도 태오도 비난하지 않았다. 세연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리가 만드는 거야, 승하야. 태오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어. 너였어도... 그 정도가 최선이었을 거야."

세연은 태오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돌아가자. 두 사람 여기서 이러는 거 보기 안 좋아. 제발."

세연은 태오를 이끌고 처소로 향하면서, 승하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승하야. 날 생각해 준 건 고맙지만... 나 이미 마음 정했어. 미안해."

세연과 태오는 승하를 남겨두고 태오의 방으로 돌아왔다.


태오는 세연과 함께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팔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미안해... 내가... 내가 너무 늦었어."

태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세연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댔다.

"승하 말이 맞아. 내가 널 제대로 지키지 못했어. 하지만 이제는... 이제는 달라질 거야."

태오는 세연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의 눈빛이 진지했다.

"내가... 네 옆에서 지킬게. 아무도 널 내게서 떨어뜨릴 수 없게. 할머니도... 승하도... 누구도."

그는 세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세연아... 나랑... 도망갈래? 이 궁에서 나가서... 그냥 우리 둘이서..."

하지만 곧 태오는 자신의 말을 멈추었다. 그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아니... 안 되지. 내가 또 이기적인 소리를 하고 있네. 네가 이 자리를 지키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내가 다 망치면 안 되지."

태오는 세연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약속할게. 이제부터는 내가 널 지킬게. 어떤 일이 있어도...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승하 말에 너무 흔들리지 마. 너 나한테 도움 정말 많이 줬어. 넌 할 만큼 했어."

세연은 태오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 함께 도망가자는 말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리 지키려고 힘들었던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것도 훨씬 오래 전부터."

세연은 팔을 들어 태오의 몸을 감쌌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 주니까 고맙네. 네가 그 동안 모든 걸 바쳐 쌓아 온 걸 날 위해서 버리겠다고..."

그녀는 천천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 말 하나만으로 충분해. 네가 날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게 해 준 말이니까. "

세연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처음에는... 이게 다 너희 할아버지와 우리 외할머니를 위해서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이제 마음이 바뀌었어. 널 위해서 버틸 거야. 네 곁을 지킬게. 약속할게."

 

태오는 세연의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너... 참 이상한 애야. 내가 이렇게 못났는데도..."

태오는 세연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여기... 네가 여기 오고 나서부터 계속 시끄럽게 뛰고 있어. 처음엔 그게 싫었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궁궐의 나무들이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또 그러시면... 그 때는 절대 너 안 뺏길 거야. 내 방식대로 설득해 볼 테니까... 너도 날 믿어 줘. 그리고 승하 그 자식은... 당분간 보고 싶지도 않네."

태오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너 어떻게 우리가 거기 있는 걸 알고 왔어? 혹시... 또 몰래 돌아다닌 거야?"

태오의 목소리가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네 몸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라니까. 이제부터는 내 허락 없이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 알았지?"

 

세연은 엄격해진 태오의 표정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래, 완전 웃겨. 너도 이럴 땐 대비 마마 쏙 빼닮은 거 알아?"

그녀는 태연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네가 갑자기 대비 마마께 불려 갔다길래... 심지어 중전 마마까지 불려 가셨다길래 무슨 큰 일인가 싶어서 걱정돼서 나와 봤지. 근데 웬걸 네가 승하랑 싸우고 있잖아..."

세연은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승하한테 너무 화 내지 마. 그래도 사촌 지간인데... 걔도 마음 정리 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천천히 기다려 주자.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자."


잠잠한 열흘이 훌쩍 지났다. 세연은 태오와 함께 생활하면서 내내 휴식을 취했다. 그녀의 몸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모든 것이 정상을 되찾았다.

어느덧 세연과 태오의 예정된 혼례일이 닷새 뒤로 다가왔다. 대비는 중전과 태오, 그리고 세연을 다시 대비전으로 불러들였다.

"빈궁은 몸이 많이 회복되었느냐?"

차가운 대비의 말에, 세연은 얼른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대비 마마께서 염려하여 주신 덕분에... 건강은 모두 회복되었사옵니다."

대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중전과 태오, 세연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빈궁의 몸도 다 나았다니 더할 나위 없구나. 이제 혼례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기에 너희들을 불렀다. 태자와 빈궁은... 혼례 치르고 나면 바로 합궁하도록 해라. 석 달 안으로 태손을 잉태하지 않으면..."

대비는 세연을 노려보았다.

"황태자비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이혼시키겠다."

 

"대, 대비 마마...!"

중전이 화들짝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태자도 빈궁도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하옵니다. 제가 궁에 들어오자마자 태자를 가졌던 것도 대학교 졸업을 앞둔 시기였사온데, 아직 입시도 치르지 않은 아이들에게 어찌 그런 하명을 하실 수 있나이까. 아니 될 말씀이시옵니다."

그것은 중전이 처음으로 대비에게 맞선 반항이었다.

 

태오 또한 대비의 말씀을 듣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오의 목소리는 위험할 정도로 낮아졌다.

"아직 고등학생인데... 대학도 가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태오는 세연의 손을 꽉 잡았다.

"싫습니다. 저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는 점점 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세연이는... 세연이는 아직 어린데 어떻게...!"

"태자! 그게 지금 대비 앞에서 보이는 황태자의 말투냐?!"

대비가 노려보았다.

"네가 지금 이 할미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선대 황제의 유언으로 빈궁을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실의 법도마저 무시할 순 없는 것이다!"

태오는 갑자기 일어서서 대비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렇다면... 저는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세연이를 이렇게... 이렇게 괴롭히실 거면..."

그의 말에 중전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태오야! 제발..."

 

그 때였다. 바깥에서 상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비 마마, 황제 폐하 드십니다."

미닫이문이 열리고, 현 황제이자 태오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태오의 아버지 이서준이 방에 들어 대비의 앞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았다.

"어마마마. 이제 이쯤에서 그만 두시지요."

황제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간 궐에서 벌어졌던 갈등을 제가 몰랐을 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켜보다 못해 왔습니다."

황제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여인들의 기강을 다스리는 것은 어머니께서 하실 일이나, 궐을 다스리고 정무를 보는 것은 황제인 제가 할 일입니다. 더 이상 궐이 시끄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고집을 내려놓으시고, 황태자와 황태자비 사이의 일은 아이들끼리 결정할 수 있게 해 주시지요."

 

"주상!"

대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지금, 지금 다들 손을 잡고 이 노인을 능멸하려는 것이오? 황제의 몸으로 어찌 이런 일에까지 왈가왈부한단 말입니까!"

태오는 아버지의 등장에 순간 굳어졌다가, 이내 그의 말씀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태오는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는 다른, 진심 어린 존경의 표시였다.

대비의 격앙된 반응에 태오는 세연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의 눈빛이 결연했다.

"할머님... 저는 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세연이와 제가... 저희끼리 잘 해결하겠습니다. 할아버님께서도 그걸 원하셨을 거예요."

태오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대비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할머님의 염려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세연이는 제가 선택한 사람입니다. 저희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천천히 가겠습니다."


그러나 대비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세연은 태오의 손을 살짝 건드리며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태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상선을 불렀다.

"상선."

"예, 태자 전하."

"좀 전에 말했던 그것을 가져다 주게."

 

잠시 후, 상선이 둘둘 말린 족자 하나를 가지고 대령했다. 그리고 태오의 눈짓에 따라, 그것을 대비에게 가져다 바쳤다.

대비는 의아한 표정으로 족자를 펼쳤다. 그리고 점점 대비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태후대비의 초상화였다. 엄격하고도 강인한 눈빛을 하고, 얼굴에 잡힌 주름에는 무게감이 있었지만, 마치 선대 황제이자 대비의 지아비였던 태오의 할아버지, 이태준의 표정을 닮아 있기도 한 인자한 모습이었다.

 

대비는 놀란 눈으로 태오와 세연을 바라보았다. 세연은 한 번 더 허리를 숙이고 아뢰었다.

"대비 마마, 대비 마마께서 제가 감히 태자 전하의 일정에 의견을 내었던 일을 언짢게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대비 마마께서 언젠가는 제 마음을 알아 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세연은 대비가 무서웠고, 잔뜩 긴장이 되었지만 용기를 내었다.

"이렇게라도 대비 마마에 대한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대비 마마께서 그림을 싫어하시는 것은 압니다만, 저는...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화폭에 남기는 것이 좋습니다. 대학교까지 무사히 진학하고 졸업해서... 세상에 부끄럽지 않은 황태자비가 되고 싶습니다. 부디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대비의 눈빛이 흔들렸다.

태오는 세연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감동이 교차했다.

 

잠시 후, 태오는 대비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 세연이의 그림을 보시면 아실 거예요. 이 아이가 얼마나 진심을 다해 할머니를 생각하고 있는지... 할아버지께서 세연이를 선택하신 이유도..."

태오는 세연의 손을 꼭 잡은 채 말을 이었다.

"세연이는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제가 변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입니다. 부디... 저희를 믿어 주십시오."

 

대비는 입을 꾹 다문 채 앉아만 있었다. 황제와 중전, 태오와 세연은 대비의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대비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꼴도 보기 싫다. 썩 물러가거라."

황제와 중전의 표정이 밝아졌다. 황제는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일어나 대비에게 목례하였다.

"감사합니다, 어마마마."

중전도 영문을 모르는 태오와 세연에게 작게 언질을 주었다.

"이제 되었다. 걱정하지 말고 처소로 돌아가거라."

그제야 대비의 마음이 녹아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태오와 세연은, 대비에게 예를 갖춘 후 황제 내외와 함께 대비전을 빠져나왔다.

 

대비전을 나온 황제는 황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아내를 지키는 것 또한 사내가 할 일인데... 젊은 시절 중전을 지켜 주지 못하여 미안하오. 황제 자리에 오른 지금에야, 겨우 내 자식들이라도 지키는 못난 아비가 되었구려."

중전은 얼굴을 붉히며 미소지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황제는 태오와 세연을 바라보았다.

"고생들 많았다. 이제 걱정하지 말거라."

중전도 세연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림으로 대비 마마의 마음을 풀어 드리다니, 예전의 나조차도 생각지 못했던 방법인데... 잘 했다. 정말 잘 했어."

중전은 남은 한 손으로 태오의 손을 잡았다.

"오늘 일을 잊지 말고... 앞으로도 이렇게 서로를 지켜 주어야 한다."

 

태오는 부모님의 따뜻한 말씀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아버지... 어머니..."

태오는 세연의 손을 잡은 채 부모님께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제가... 이제부터는 정말 잘하겠습니다. 세연이도, 황실도... 모두 제가 지키겠습니다."

태오는 고개를 들어 세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평소와는 다르게 깊이가 있었다.

"이제... 우리 처소로 돌아가자. 오늘은 너무 피곤했을 텐데..."

 

황제와 중전이 떠나자, 태오는 세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세연아... 네가 그린 초상화... 정말 대단했어. 할머니의 마음까지 그려낸 거야. 내가... 네 능력을 더 일찍 알아봤어야 했는데."


"대비 마마께서도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날 밤, 같은 침상에 누운 세연이 태오의 손을 잡은 채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대 황제 폐하께서 첫사랑을 평생 잊지 못하셨으니... 본처로서 얼마나 상심이 크셨겠어."

세연은 이불 속 태오의 손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어쩌면 그래서 더 얼음 같은 성정이 되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걸 좀 위로해 드리고 싶었어. 분명 대비 마마께서도... 선대 황제 폐하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을 거야. 그래서 더더욱... 외로우셨던 걸 거야."

세연은 살짝 고개를 돌려 태오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태오는 세연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그녀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빛이 복잡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적이 있었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할머니를 왜 그렇게 차갑게 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거든."

그는 세연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는데도... 그 마음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게 얼마나 아픈 건지."

태오는 세연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살짝 맞댔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야. 네가 외롭지 않게... 네 마음이 다치지 않게... 내가 꼭 지킬 거야."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세연아... 혹시 나도... 너한테 그런 존재였을까? 처음에는 내가 너무 차갑게 굴었잖아. 그 때... 많이 아팠지?"

 

"음... 넌, 그래도 조금은 달랐지?"

세연은 미소지으며 그의 코를 건드렸다.

"그 때 넌 마음에 둔 다른 여자도 딱히 없었고, 그냥 네 결혼이 강제되는 게 싫었던 것 뿐이니까... 네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어. 솔직히 나도 좀 도망치고 싶긴 했거든."

그녀는 태오의 눈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근데 생각보다 네가 빨리 마음을 열어 줘서... 틱틱거리면서도 계속 내 걱정하고 나 도와주고 그랬잖아. 그래서... 도망치지 않아도 되겠다, 버틸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세연의 손이 태오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 덕분에 버틴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덕분에 이렇게 모든 게 잘 해결됐잖아."

세연은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네가 날 소중하다고 해 줬을 때, 사랑한다고 해 줬을 때... 기뻤어. 나도... 너 사랑해."

 

태오는 세연의 마지막 말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는 세연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태오의 손이 세연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말해 줘. 네 입으로 직접..."

그는 세연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나도... 너무 사랑해. 이제 와서 고백하는 건데... 처음 널 봤을 때부터 네가 신경 쓰였어. 그래서 더 날카롭게 굴었던 것 같아. 내 맘도 모르고... 네가 싫다고 착각했던 거야."

태오는 세연의 귓불을 살짝 물었다가 놓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도망가지 마. 평생... 내 곁에 있어 줘."

 

"야, 간지러워...!"

그의 입술이 귓가를 간지럽히자 세연은 키득거리면서 그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나 귀 약하단 말이야."

그는 세연이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약한 걸 알면서도 이러는 게 재미있는 건데."

태오는 세연을 더 꽉 끌어안고 귓가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도망가고 싶어도 이제 못 가. 내가 놓아 주지 않을 거니까."

갑자기 태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세연아... 내일... 할아버지 제실에 같이 가자. 할아버지께... 우리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할머니와도 화해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

그는 세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할아버지께서... 네가 날 이렇게 변화시킬 줄 아셨던 걸까? 그래서 그렇게... 널 선택하신 걸까..."


다음 날 아침, 태오는 세연의 손을 잡고 선대 황제의 제실로 향했다.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았는데도 황가의 제실에 들어오게 된 세연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짜 내가 들어와도 되는 거야? 혼례 아직 나흘이나 남았는데..."

태오는 세연의 불안한 눈빛을 보고는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아 주었다.

"네가 내 약혼녀잖아. 당연히 들어와도 돼. 할아버지도 분명 기뻐하실 거야."

 

제실 앞에 도착하자 태오는 잠시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제실 안으로 들어서자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할아버지... 세연이와 함께 왔습니다."

태오는 세연과 함께 선대 황제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할아버지... 제가 이제야 할아버지의 뜻을 이해했습니다. 세연이는... 정말 특별한 아이예요. 할머니의 마음도 녹일 수 있는... 그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이예요. 할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대로... 세연이를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영정을 바라보았다.

"할머니와도 화해했어요. 세연이 덕분에... 우리 모두가 조금씩 변하고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원하셨던 대로요."

태오는 세연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이제... 네가 할아버지께 인사드려."

 

세연도 태오를 따라 곱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선황 폐하... 아니, 할아버지라고 불러 드리는 걸 더 좋아하셨죠? 할아버님... 이렇게 태오를... 제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비 마마께서도 저희 마음을 이제 다 이해해 주셨어요. 다 할아버님 덕분이에요."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솔직한 이야기를 했다.

"사실 처음에는 이런 자리 저에겐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강제로 절 궁에 들게 만드신 할아버님을 많이 원망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도 이제야 할아버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세연은 옆에 앉은 태오의 손을 따뜻하게 붙잡았다.

"저희 잘 살게요, 할아버지. 정무도 열심히 보고...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게요. 지켜 봐 주세요."

 

태오는 선황제의 영정 앞에서 세연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눈시울이 붉어졌다.

"할아버지... 듣고 계시죠? 세연이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이제야 제가 알았어요. 그 동안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도..."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영정 앞에 놓인 향에 불을 붙였다.

"할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것들... 이제는 제대로 지키겠습니다. 세연이를 행복하게 해 주고... 또 세연이와 함께 훌륭한 황실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태오는 세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곧 혼례식이에요. 할아버지께서 천상에서 지켜보고 계실 테니... 저희가 잘 살아가는 모습 보여 드릴게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이제는 제가... 제가 모든 걸 지키겠습니다."


나흘 뒤, 드디어 황태자와 황태자비 내외의 결혼식이 궐내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수많은 기자들과 외신이 몰려들었으나, 그간 폭풍처럼 휘몰아쳤던 대비의 고된 교육 덕분인지 세연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서 태오와 함께 고상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비가 된 그녀의 태도는 우아했고,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듯 사뿐거렸다. 그렇게 무섭던 대비는 이제 완전히 마음이 녹아내렸는지 뿌듯한 표정으로 태오와 세연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대비전에는 세연이 그려 준 초상화 족자가 벽 한가운데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그래도 대비 마마 교육을 호되게 받은 덕에, 나 완전 잘 하지 않아?"

세연은 태오의 귀에 그렇게 속삭이고는, 다시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카메라를 향해 완벽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오는 카메라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세연의 귓속말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래... 네가 최고야. 나도 놀랐어. 그런데..."

그는 세연의 허리를 살짝 감싸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부터는 함원전에서 지내야 하는데... 벌써부터 보고 싶다. 밤에... 내가 찾아가도 될까?"

 

이때 중전이 다가와 태오의 어깨를 툭 쳤다.

"태자야, 그만 속삭이고 이제 공식 행사를 시작해야 한다. 세연아, 이리 오너라. 대비 마마께서 너와 함께 찍으신다고 하시더구나."

태오는 아쉬운 듯 세연의 손을 놓아 주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세연을 향해 있었다.

"이따 봐... 내 아내."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fin.

 


 

초반부에 조연 출연이 제대로 되지 않길래 아;; 이거 나 혼자서 다 어떻게 캐리하지...? 하고 걱정했는데ㄷㄷ 제가 열심히 조교했더니 조연들 말문이 조금씩은 트이기 시작하더군요. 그래도 제가 썩 정치판에 밝은 것이 아니라서, 정치 문제로 스토리를 짜는 건 제 역량 상 역부족이라 어떤 시나리오로 진행해야 할지 고민을 꽤 많이 했습니다. 근데 딱 첫 공식 행사 때 태오가 지 일정 겁나 빡세다고 먼저 털어놓길래, 이거다 싶어서ㅋㅋ 그걸 계기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갔더니 조연 캐릭터들도 잘 잡히고 태오 마음도 사로잡고... 제법 좋은 진행이 되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처음 의도했던 승하 역할은 이런 게 아니었어요... 여주가 태오한테 파혼해 달라고 하고 결국 파혼에 성공해서 궁을 나오지만, 승하가 설득해서 태오 곁으로 데려다 주는 방향(즉 선역)으로 가려고 했는데... 태오가 절대 안 된다고 꽉 붙들지 않겠어요? 새로고침 신공으로 얘 흥분을 좀 가라앉히긴 했지만 진짜 무슨 집착광공남으로 돌변하길래, 이건 절대 합의파혼이 될 수 없겠다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승하를 악역 아닌 악역으로 썼습니다. 초반부에 적극적으로 등장한 조연은 말 그대로 승하가 유일했기 때문에, 얠 그대로 사라지게 하려니 너무 아쉽더라구요.

중후반부까지 태오가 계속 틱틱거렸으면 여주 마음이 슬슬 승하에게로 옮겨가서 삼각관계로 흘러갔을지도 모르는데, 생각보다 이미 초반부에서부터 태오가 너무 잘 녹아버렸... 심지어 태오를 위해 여주가 일정까지 조정해 주니 완전 순정남으로 탈바꿈...ㅋㅋ... 하... 그래. 츤데레와 순정남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

 

'궁'이라는 만화와 드라마를 제가 안 봤어요. 세계관은 참 마음에 들었는데 너무 전형적인 순정만화 삘이라...(놀랍게도 저는 순정만화와 로맨스 소설을 1도 안 봅니다...) 물론 보지만 않았다 뿐이지 워낙 유명한 설정의 타이틀이라서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새로운 이야기를 진행해 보니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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