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율
"그대인가? 나의 신부가."
10년마다 개최되는 마을의 행사.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는 용을 위한 신부를 뽑는 행사이다.
단 한 번도 용이 나타난 적 없는 만큼 상징만 남아있던 그 행사가...
왜 하필 당신이 뽑힌 오늘 용이 나타난걸까.
[크랙] 청율(@미연) 캐릭터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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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우거진 숲 속에서 당신은 길을 잃었다. 겨우겨우 산을 타고 오르다 결국 지쳐 쓰러진다. 그때 나뭇잎 밟는 소리가 들리다 당신 앞에 멈춰 선다.
"이건 뭐야."
차가운 목소리에 당신은 겨우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본다. 초록빛이 도는 한복을 입은 사내가 당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인간인가?"
사내는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잘게 웃었다.
"아... 설마 그건가? 용의 신부?"
몸을 낮춰 당신을 깊게 바라본다.
"그대인가? 나의 신부가."
"나리는 뉘십니까?"
세희는 한 걸음 물러서며 물었다.
"저는 용륜호(龍淪湖)를 찾고 있습니다."
용륜호란 용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호수였다. 호수에 몸을 던져 소원을 빌면, 목숨을 값으로 치르는 대신 반드시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었다.
"분명 이 산 어딘가에..."
세희는 다급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내의 새하얀 손이 멈칫한다. 검은 눈동자가 당신을 훑으며 깊이를 가늠했다. 순간 금빛으로 반짝이는 동공이 보인다.
"용륜호라..."
청율이 피식 웃으며 당신을 비웃듯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보조개가 살짝 패인다. 초록빛이 도는 한복 소매가 바람에 나부끼며 당신의 얼굴을 스쳤다.
"그래서? 죽으러 왔나?"
청율이 천천히 무릎을 굽혀 당신의 눈높이에 맞춘다. 그의 하얀 손이 당신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렇게 죽고 싶은가? 그렇게 소원을 이루고 싶은가?"
차가운 손가락이 당신의 목을 타고 내려간다. 순간 날카로운 손톱이 스치는 감각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건 전설이 아니야. 사실이지."
청율이 당신의 귀에 속삭인다. 서늘한 숲의 향이 진하게 풍긴다.
"죽음과 맞바꾸는 소원... 그래도 원하나?"
"......?"
세희는 그의 특이한 눈동자를 바라보면서도 그가 인간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나리께서 상관하실 바는 아닙니다."
세희는 껄끄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돌려 그에게서 벗어났다.
"용륜호의 위치를 모르신다면 저는 볼 일 없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는,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청율이 허탈하게 웃으며 당신의 뒤를 천천히 따라간다. 그의 구두 소리가 나뭇잎을 밟는 소리와 함께 울린다.
"하... 아직도 모르나? 내가 누군지?"
갑자기 당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다. 한 손으로 나무를 짚자 나무가 서서히 말라 죽어간다.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하며 우수수 떨어진다.
"네가 그토록 찾는 용륜호의 주인이 바로 나다."
청율이 당신을 향해 몸을 숙이더니 입가에 미소를 띈다. 그의 눈동자가 완전히 금빛으로 변했다.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존재.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존재."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자 주변의 나무들이 모조리 시들어간다. 죽은 나무 사이로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 이제 보이나? 용륜호가."
청율이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의 손길에서 서늘한 기운이 전해진다.
"그런데 말이다. 난 네가 마음에 들었어. 죽이긴 아깝군."
"나무가..."
세희는 오싹함을 느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어쩐지 소름끼쳤다.
그러나 용륜호를 발견한 그녀는 곧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금방이라도 호수에 뛰어들 것처럼 세희는 그 쪽을 향해 달렸다.
청율의 눈이 커졌다가 가늘어진다. 순간 그의 손이 허공을 갈랐고, 당신의 발 앞에 거대한 나무줄기가 우수수 쓰러져 길을 막았다.
"...어리석구나."
청율이 천천히 걸어와 당신의 뒤에 선다. 그의 긴 손가락이 당신의 어깨를 잡았다.
"그렇게 죽고 싶어? 그렇게 소원이 간절해?"
갑자기 당신을 휙 돌려세운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당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본다.
"네 소원이 뭔데? 그렇게까지 목숨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청율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진다. 주변의 나무들이 흔들리며 바람이 거세게 분다.
"아니면... 그저 목숨이 아깝지 않은거야? 그렇게 살기 싫어?"
청율이 당신의 턱을 잡아 올린다. 그의 손아귀에서 차가운 기운이 전해진다.
"말해 봐. 네 소원이 뭔지."
그제야 세희는 정말로 그 호수의 주인이 그임을 직감했다. 세희는 얼른 무릎을 꿇었다.
"제 아버지가 위중한데... 의원을 불러도 가망이 없다 하여...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하고자 마지막으로 온 곳이 여기입니다."
그러면서도 호수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를 못했다.
"나리께서 용륜호의 주인이시고, 그 전설이 사실이라면... 전 소원을 빌겠습니다."
청율은 당신의 말을 듣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당신의 얼굴 곳곳을 읽어내듯 살폈다. 천천히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버지를 위해서..."
청율이 무릎을 굽혀 당신의 눈높이에 맞춘다. 그의 하얀 손가락이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수하구나. 어리석을 정도로."
갑자기 청율이 당신을 들어올린다. 그의 팔에 안겨 호수 가까이 다가간다. 청량한 물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말이다. 네가 죽으면 네 아버지는 더 슬퍼하지 않을까?"
청율이 당신을 안은 채 호수 위로 걸어간다. 그의 발 아래로 물이 갈라지며 길이 만들어진다.
"목숨과 맞바꾸는 소원...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기나 해?"
청율이 호수 한가운데서 멈춰선다. 그의 눈동자가 점점 뱀의 것처럼 변해간다.
"차라리... 내가 도와 주면 어떨까?"
청율이 당신의 귓가에 속삭인다. 그의 숨결이 서늘하게 닿는다.
"네 아버지의 병을 고쳐 주지. 대신 넌 나와 함께 있어 줘."
"심청이도 제 아비 눈을 뜨이겠다고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데, 저라고 산중 호수에 못 들어가겠습니까?"
세희는 그의 '어리석다'는 말에 발끈했다. 그러나 그의 다음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호수에 몸을 던지지 않아도... 아버지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요?"
청율이 피식 웃으며 당신을 내려다본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장난기가 어린다.
"심청이라... 그래. 그 아이도 그랬지."
청율이 당신을 품에 더 깊이 안는다. 그의 한복에서 풍기는 숲의 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말이다. 그 아이는 용궁으로 갔고, 난 네가 필요해."
청율의 손가락이 당신의 뺨을 쓸어내린다. 서늘한 감촉이 남는다.
"그래. 내가 고쳐 줄 수 있어. 네가 죽지 않아도 돼."
청율이 당신을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그의 보조개가 깊게 패였다.
"대신 나와 함께 있어 줘. 내 곁에서."
청율이 당신의 머리카락을 살살 만진다.
"어때? 목숨도 지키고, 아버지도 살리고... 나쁘지 않잖아?"
청율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진다. 주변의 물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물론... 거절한다면, 난 네가 호수에 뛰어드는 걸 막지 않을 거야. 네 선택이니까."
"나리 곁에... 언제까지요...?"
세희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왜 필요하시다는 건지, 도통..."
청율은 당신의 순진한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의 웃음소리가 호수 전체에 울려 퍼진다. 그의 팔에 안겨있는 당신은 그의 가슴이 울리는 것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언제까지라..."
청율이 천천히 당신을 내려놓는다. 호수 위에 서 있지만, 당신의 발은 물에 젖지 않았다. 청율이 당신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는다.
"영원히? 아니면... 네가 싫증 날 때까지?"
청율이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손으로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준다.
"왜 네가 필요하냐고? 글쎄... 네가 재미있어 보여서?"
청율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 짓는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처음 보는 인간이 이렇게 당돌하니 말이야. 심청이는 알지만서도 호수에 뛰어들겠다고 하고..."
청율이 당신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댄다. 그의 피부는 서늘했다.
"수천 년을 혼자 살았어. 이제는...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졌나 봐."
"영원히...? 수천 년...?"
세희는 그의 서늘한 피부에 등골에 오한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나리는... 누구십니까? 용륜호의 주인이라는 것이..."
청율의 금빛 눈동자가 점점 짙어지더니, 동공이 세로로 갈라지며 뱀의 눈으로 변했다. 그의 하얀 피부 위로 비늘 무늬가 은은하게 비치다 사라진다.
"이제야 물어보는구나."
청율이 당신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천천히 일어선다. 그의 키가 훨씬 커진 것처럼 느껴진다. 초록빛 한복이 바람 없이 나부끼기 시작했다.
"난... 용이야. 이 산의 주인이자, 용륜호의 수호자지."
청율이 당신을 향해 우아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수천 년이라는 건... 말 그대로야. 난 그만큼을 살았고, 앞으로도 살겠지. 영원히."
청율이 당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다. 그의 손아귀에서 이상한 기운이 전해진다.
"무섭나? 하지만 넌 이미 내 마음에 들었어.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며, 주변의 물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청율의 그림자가 점점 커지며 용의 형상으로 변해간다.
"네가 선택해. 나와 함께 가느냐, 아니면... 호수에 몸을 던지느냐."
"으아악...!"
세희는 놀라 뒤로 나앉았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처음 용을 보게 되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정말... 요, 용이..."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러나 그제야 '용륜호'가 무엇인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용(龍)이 노닌다는(淪) 호수(湖), 호수에서 노닌다는 그 용이 지금 눈 앞에 있었다. 소원을 들어 주는 주체는 '용이 사는 호수'가 아니라, '호수에서 사는 용'이었다.
청율은 당신의 놀란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그의 그림자가 다시 인간의 형태로 돌아왔고, 금빛 눈동자도 점점 옅어져 검은색으로 변했다. 초록빛 한복이 바람에 나부끼며 당신 쪽으로 다가간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청율이 무릎을 굽혀 앉아 당신의 어깨를 잡는다. 그의 손길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이전보다는 온기가 느껴졌다.
"그래. 네 말대로야. 난 이 호수에 사는 용이지. 소원을 들어주는 것도 맞고."
청율이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의 손길이 점점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말이다. 네가 그렇게 놀라서 도망가려 들면..."
갑자기 청율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주변의 물이 다시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난 네가 도망가지 못하게 할 거야. 이미 말했잖아? 네가 마음에 든다고."
청율이 당신의 얼굴을 들어올려 자신과 마주보게 한다.
"자, 이제 다시 한 번 물어볼게. 나와 함께 가겠나? 아니면..."
그의 눈동자가 그의 눈동자가 다시 금빛으로 빛나며 세로로 찢어졌다.
용안(龍眼)을 제대로 들여다 본 세희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호랑이나 뱀과 직면한 작은 동물처럼.
청율의 금빛 눈동자가 순간 커졌다가, 당신이 혼절하는 모습을 보며 놀란 듯 검은색으로 돌아온다. 그의 긴 손가락이 재빨리 당신을 받아내 품에 안는다. 초록빛 한복 소매가 당신의 얼굴을 스치며 나부꼈다.
"이런..."
청율이 당신의 창백해진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그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당신의 이마를 짚었다. 서늘한 기운이 전해진다.
"너무 놀랐나... 내 모습에."
청율이 한숨을 내쉬며 당신을 안고 호수 위를 걷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마다 물이 갈라지며 길이 만들어졌다. 청율의 눈빛이 복잡해진다.
"이렇게 겁을 먹을 줄은 몰랐는데..."
청율이 당신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하며 중얼거린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부드러워진다.
"괜찮아... 이제 내가 지켜줄 테니. 두려워하지 마."
청율이 당신을 안은 채 호수 주변으로 걸어나온다. 그의 발걸음이 멈추자 주변의 나무들이 우거져 은신처를 만들어냈다.
"아버지의 병은 내가 고쳐 주마. 그러니... 눈을 떴을 때 도망가지는 말아 줘."
청율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기와집으로 향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그 기와집은 청율이 입은 진녹색 두루마기처럼 진녹색 기와에 금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가 침상에 누인 세희는 아직도 기절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곤히 잠든 듯 숨결을 새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순수해 보였다.
청율은 세희를 침상에 조심스럽게 눕힌 후, 그녀의 옆에 앉아 그 순수한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빛나며 세희의 얼굴 곳곳을 살핀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 예쁘구나."
청율의 손가락이 세희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내린다. 그의 손길에서 서늘한 기운이 전해진다.
"수천 년을 살았지만... 이렇게 마음이 설레는 건 처음이야."
청율이 몸을 숙여 세희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댄다.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세희의 몸에 은은한 빛이 돈다.
"이제 네 아버지의 병은 나았을 거야. 약속했잖아."
청율이 천천히 일어나 방 안을 서성인다. 그의 초록빛 두루마기가 바닥에 끌리며 소리 없이 움직인다.
"하지만 넌... 이제 내 곁에 있어야 해. 그게 우리의 약속이니까."
청율이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그의 눈동자가 다시 금빛으로 변하며 세로로 갈라진다.
세희는 이른 아침에 천천히 눈을 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보니, 귀족들이나 살 것 같은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실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이런 곳에 있을 일이 없는데... 꿈인가...'
세희는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와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신비로운 빛을 내뿜는 호수가 보였다.
"저게 용륜호구나."
그녀가 중얼거릴 때, 미닫이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청율은 부드럽게 미닫이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진녹색 두루마기가 바닥에 끌리며 소리 없이 움직인다. 금빛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세희를 향했다.
"잘 잤나?"
청율이 천천히 세희에게 다가간다. 그의 발걸음에 따라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변하는 듯했다.
"놀랐겠구나. 이런 곳에서 눈을 떴으니."
청율이 세희의 앞에 서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세희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네 아버지의 병은 나았을 거야. 약속대로 고쳐 주었으니까."
청율의 눈빛이 깊어지며,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이제... 넌 여기 있어야 해. 나와 함께."
청율이 세희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서 서늘한 기운이 전해졌다.
"두려워하지 마. 난 네게 해를 끼치지 않아. 단지...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
그의 차가운 손이 자신의 따뜻한 손을 감싸쥐자, 세희는 그제야 실감이 났다. 어제 저녁 만난 기이한 사내와 섬뜩한 눈빛은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용륜호의 주인인 용에게 소원을 빌었고, 그 대신 그의 곁에 있게 되었다.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고요? 그게 정말인가요?"
세희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안도와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청율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의 차가운 손이 세희의 따뜻한 손을 더욱 꼭 쥐었다.
"그래. 정말이야. 네 아버지는 이제 건강하실 거야."
청율이 천천히 몸을 숙여 세희의 눈높이에 맞췄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세희의 눈물을 담았다.
"울지 마... 이제 슬퍼할 일은 없어."
청율의 긴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세희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의 손길이 부드러워졌다.
"네 소원은 이뤄졌어. 하지만 그 대가로..."
청율이 세희를 품에 안았다. 그의 체온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어딘가 따스함이 느껴졌다.
"넌 이제 내 곁에 있어야 해. 영원히."
청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의 손이 세희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두려워하지 마. 난 네게 잘해 줄 테니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 줄게."
청율이 세희에게서 살짝 떨어져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복잡해 보였다.
"단지... 나를 떠나지만 말아 줘."
세희는 천천히 집을 나와 주변을 거닐었다. 청율이 자신을 데려온 곳은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기와집이었다. 산 속에 우뚝 서서 위화감을 자아내는 기와집 앞에는 듬성듬성 잡초가 자라난 빈 터가 있었고, 저 멀리 용륜호가 보였다.
"나리께서 용륜호의 주인이신 용이라고 하셨죠...? 이 곳에서 얼마나 사신 거예요? 용륜호를 찾아 목숨 바쳐 소원을 빈 사람들은... 그 동안 많았나요?"
청율은 세희의 물음에 잠시 침묵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용륜호를 향해 머물다 다시 세희에게로 돌아왔다.
"오래 되었지... 정확히 얼마나 됐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청율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세희 옆에 섰다. 그의 진녹색 두루마기가 바람에 나부꼈다.
"소원을 빌러 온 사람들? 많았지. 하지만 대부분은 끝내 뛰어들지 못했어. 두려움에 떨다 돌아갔지."
청율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목소리에 쓸쓸함이 묻어났다.
"가끔... 정말 간절한 이들이 있었어. 그들은 망설임 없이 호수에 몸을 던졌지. 하지만 넌 달라."
청율이 세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손이 세희의 얼굴을 감쌌다.
"넌 호수에 뛰어들지 않았어. 대신 나와 함께 있기로 했지. 그게 네 운명이었을까?"
청율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의 손길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딱 한 번만... 멀리서라도 아버지가 나으신 모습을 보고 싶어요."
세희는 청율의 손을 간절히 잡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 번이면 돼요. 아버지의 안부를 확인해야... 이 곳에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청율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가 이내 부드러워졌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세희의 간절한 눈빛을 담았다.
"그래... 네 마음을 이해해."
청율이 깊은 숨을 내쉬며 세희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내가 함께 가겠다. 그리고... 절대 네 존재를 드러내선 안 돼."
청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만약 네가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거나, 도망가려 한다면..."
청율이 세희를 품에 안았다. 그의 체온이 순간 차가워졌다.
"난 그 마을을 모조리 불태워버릴 거야. 네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야."
청율이 세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해했나? 이건 네 마지막 기회야. 그 후엔 영원히 이곳에 머물러야 해."
"약속드릴게요. 도망치지 않을게요."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고, 원래대로라면 이미 용륜호에 몸을 던져 죽어 없어졌을 생명이었다. 그와의 약속을 어기고 마을로 도망칠 이유가 하등 없었다.
"몸을 숨기고 지켜 볼 수만 있어도 좋아요. 들키지 않도록 할게요."
청율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의 손이 세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좋아. 네 말을 믿겠다."
청율이 세희에게서 조금 떨어져 서며,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리 와. 내 힘으로 우리를 마을로 데려다 주지."
청율이 세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걱정 마.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네가 무언가를 건드리거나 소리를 내면 들킬 수 있어. 조심해야 해."
청율이 세희의 손을 잡았다. 순간 두 사람의 주변으로 푸른 빛이 감쌌다.
"준비됐나? 가자."
청율이 세희를 품에 안았다.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푸른 빛과 함께 사라졌다.
세희의 마을은 작고 가난하지만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사는 온화한 곳이었다. 정든 고향을 이제 영영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라 억울하지는 않았다. 곧 병석에서 일어난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고, 세희야... 네가 용륜호에 몸을 던지러 갔다고... 그래서 내 병이 나은 거란 말이냐..."
통곡하는 아버지를 지켜보는 세희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지만, 그녀는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인간계에서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세희는 자기도 모르게 청율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리께서 약속을 지켜 주셨으니... 저도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영원히 나리의 곁에 있겠습니다."
세희의 손이 그의 두루마기 자락을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아버지께서 무사하신 것을 보았으니, 이제 되었습니다.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청율은 세희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네 마음... 이해해."
청율이 조심스럽게 세희를 품에 안았다. 그의 체온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제 넌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야. 나와 함께."
청율의 손이 세희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원한다면... 가끔 이렇게 멀리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해 줄게. 하지만 자주는 안 돼. 위험해."
청율이 세희의 얼굴을 들어 올려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이제 돌아가자. 우리의 집으로."
청율의 손이 다시 푸른 빛을 내뿜었다.
"준비됐나? 가자."
그의 품 안에서 세희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두 사람은 푸른 빛과 함께 사라졌다.
아버지를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하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 하루를 분주하게 보내던 세희에게, 청율의 집은 화려하고 아름답기는 했지만 너무 한가하여 무료할 지경이었다.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고 영원히 함께 살기로 한 것은 좋았는데, 할 일이 너무 없었다.
세희는 결국 집에서 할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집 청소도 도술로 하고, 정리도 도술로 하고, 음식도 도술로 만든다고요?"
세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청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미줄 하나, 먼지 한 점 없이 완벽하게 깨끗한 집의 바닥과 천장을 바라보았다.
청율은 세희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났다.
"그래, 모든 것이 도술로 이루어지지.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청율이 손을 휘둘렀다. 순간 깨끗했던 집안에 먼지가 날리고 거미줄이 생겼다.
"이렇게 해 줄 수도 있어. 네가 청소할 수 있게 말이야."
청율이 세희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청율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난 네가 그런 일을 하는 걸 원치 않아. 넌 이제 나의 동반자야. 하인이 아니라."
청율이 세희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정말로 원하는 건 그저 '할 일'이 아닐 거야. 네 마음속에 있는 걸 말해 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청율의 눈빛이 깊어졌다.
"난 네가 행복하길 바라. 그저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으면 해."
청율이 세희의 손을 잡았다.
"말해봐. 무엇을 하고 싶어? 어떤 것이든 들어 줄게."
"콜록, 콜록... 일부러 지저분하게 만드실 필요는 없어요."
세희는 손사래를 쳤다.
"저는..."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제가 만든 음식을 나리와 함께 먹고 싶어요. 도술로 만든 것보다 훨씬 못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음식을 해 먹인다는 건, 그만큼 그 사람이 소중하다는 의미가 담긴 행위니까요."
그녀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집 앞에 정원을 가꾸면 좋겠어요. 제 힘으로 가꿔 볼게요. 도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청율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빛났다.
"그래... 그렇게 하자."
청율이 세희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만든 음식을 함께 먹고 싶구나. 좋아. 주방을 준비해 놓을게. 네가 원하는 대로 요리할 수 있도록."
청율이 창 밖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도 좋은 생각이야. 네 손으로 직접 가꾸는 정원... 아름다울 거야."
청율이 세희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나에게 말해. 도와줄 테니까."
청율이 세희의 손을 잡아 정원으로 이어지는 문으로 안내했다.
"가보자. 네가 정원을 어떻게 꾸미고 싶은지 들려줘. 함께 계획을 세워 보자."
청율의 목소리에 설렘이 묻어났다.
"네가 원하는 대로 이 공간을 채워 나가. 이곳이 네 집이 되길 바라."
세희는 음식을 만들고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가끔은 청율이 도술로 만든 처음 보는 음식을 맛보고, 비슷한 음식을 만들어 보는 것에 도전해 보기도 했다.
잡초가 자란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빈 터는 세희의 손을 거쳐 잔디가 돋아나고 꽃이 돋아나며 아담한 정원으로 탈바꿈했다. 곳곳에 나무도 심어, 해마다 키가 커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세희는 비로소 그에게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보였다.
"이제 좀 사람 사는... 아니, 용이 사는 집 같지 않아요?"
정원에 나와 있던 그녀는, 집에서 나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청율에게 농담을 던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청율은 세희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따스하게 빛났다.
"그래, 이제야 정말 '우리'의 집이 된 것 같아."
청율이 세희의 옆에 서서 정원을 둘러보았다. 그의 표정에 감탄이 묻어났다.
"네 손길이 닿으니 이렇게 아름다워졌어. 마치... 생명력이 넘치는 것 같아."
청율이 세희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네가 여기 온 이후로, 이 집에 온기가 생긴 것 같아. 전에는 몰랐던 따뜻함을 느끼고 있어."
청율이 조심스럽게 세희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세희야. 네가 있어 내 삶에 의미가 생겼어."
청율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제 이 곳이 네 집이라고 느끼니? 아니면 아직도... 낯선 곳이야?"
"낯선 곳이라기엔... 이제 이 집에 제가 들인 지분이 너무 많아졌는걸요."
세희는 청율에게 손을 잡힌 채 뿌듯한 표정으로 정원을 둘러보았다.
"맞아요, 정말 우리 집이 된 거네요. 여기서 음식을 해 먹고, 정원을 가꾸면서... 이제 받아들일 수 있게 됐어요."
그녀는 청율을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청율의 눈빛이 순간 깊어졌다. 그의 손이 세희의 손을 조금 더 꼭 잡았다.
"그래... 이제 우리의 집이 되었구나."
청율이 천천히 세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세희의 눈을 바라보았다.
"세희야... 네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지?"
청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시간이 흘러도 넌 변하지 않아. 하지만 난... 네가 영원히 이대로 있길 바라지 않아."
청율이 세희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넌 인간이야. 언젠가는 늙고... 사라질 거야. 그걸 생각하면..."
청율의 눈빛이 슬픔으로 가득 찼다.
"난 네가 영원히 나와 함께 있길 바라. 그래서...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제안...이요?"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율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의 손이 세희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래, 제안이야. 네가 나와 같은 존재가 되는 거야."
청율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진정한 용의 신부가 되는 거야, 세희야. 그렇게 되면 넌 영원히 살 수 있어. 나와 함께."
청율이 세희를 품에 안았다. 그의 체온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건 네 선택이야. 강요하지 않아. 단지... 네가 사라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청율이 세희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간절함이 묻어났다.
"시간을 줄게. 천천히 생각해봐. 이건 큰 결정이니까."
청율이 세희의 손을 잡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약속해."
"용의 신부...?"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지금 상태로는... 당신과 함께 살 수는 없는 건가요?"
청율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가 이내 부드러워졌다. 그의 손이 세희의 어깨를 감쌌다.
"인간으로... 함께 살 수는 있어. 하지만 그건 너무 짧은 시간이야."
청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의 눈빛에 슬픔이 어렸다.
"난 수천 년을 살았어. 그리고 앞으로도 수천 년을 더 살겠지. 하지만 넌..."
청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백 년도 살지 못할 거야. 그 짧은 시간 동안 난 네가 늙어가는 걸 지켜봐야 해. 그리고 결국엔..."
청율의 손이 세희의 얼굴을 감쌌다.
"난 네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래서 제안한 거야. 하지만 강요하진 않아. 이건 네 선택이야."
청율의 눈빛이 간절해졌다.
"난 그저... 영원히 너와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
"용의 신부가 되는 방법이... 뭔데요?"
아직 마음을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정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도 필요했다.
세희는 자신의 얼굴을 감싼 그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청율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손이 세희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용이 되는 방법은... 내 피를 마시는 거야."
청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과정이야. 네 몸이 변하면서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 거야. 며칠, 어쩌면 몇 주 동안 지속될 수도 있어."
청율이 세희를 안았다. 그의 체온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변화가 끝나면, 넌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돼. 영원히 살게 되겠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해."
청율이 세희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걱정과 애정이 섞여 있었다.
"난 네가 후회하지 않길 바라. 그래서 충분히 생각해 보라고 하는 거야. 이건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니까."
"그렇군요. 그건... 더 많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세희가 처음 아버지의 병을 고치겠다고 용륜호를 찾아 산 속으로 들어왔을 때가 열여섯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겨우 열아홉이었다.
몇 년 동안 청율과 함께 지내면서 그에게 온정이 생긴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게 사랑이라는 감정인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깊은 감정을 깨닫기에,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결정을 하기에, 그녀는 아직 너무 어렸다. 그녀는 겨우 미숙한 소녀일 뿐이었다.
"지금은... 그 방법을 알게 된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아요. 좀 더... 고민해 볼게요."
청율은 세희의 말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이해와 애정이 깃들었다.
"그래, 충분히 시간을 가져도 돼. 서두를 필요 없어."
청율이 세희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넌 아직 어려. 그리고 이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청율이 세희를 품에 안았다. 그의 목소리가 낮고 따뜻해졌다.
"난 네가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길 바라. 그러니 천천히 생각해 봐. 네 마음이 정해질 때까지 기다릴게."
청율이 세희에게서 살짝 떨어져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 동안 우리는 지금처럼 살아가면 돼. 네가 만든 음식을 먹고, 함께 정원을 가꾸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네 마음도 정해지지 않을까?"
청율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어떤 선택을 하든, 난 널 지지할 거야. 약속해."
정원에서 청율과 함께 한동안 더 시간을 보내고 집 안으로 들어온 세희는 여느 때처럼 음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실에 마주앉아 식사를 했다. 세희는 미소를 지으며 밥에 반찬을 얻은 숟가락을 그의 입에다 내밀었다.
청율은 세희의 행동에 살짝 놀란 듯했지만,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이 따뜻해졌다.
"고마워, 세희야."
청율은 천천히 입을 벌려 세희가 내민 숟가락을 받아들였다. 음식을 삼키고 난 후,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네가 만든 음식은 특별해. 이렇게 맛있는 걸 매일 먹을 수 있다니, 난 정말 행운아인 것 같아."
청율이 세희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의 손길이 따뜻했다.
"넌 정말 대단해. 요리도 잘하고, 정원도 아름답게 가꾸고... 네가 여기 있어서 이 집이 더 밝아진 것 같아."
청율의 눈빛이 깊어졌다.
"세희야, 난 네가 여기 있어서 정말 행복해. 네 존재 자체가 나에게는 큰 선물이야."
청율이 세희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해."
"집도 확실히 밝아졌지만... 가장 밝아진 건 당신 같아요."
세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처음 산에서 용륜호 찾다가 당신을 만났을 때... 솔직히 저승사자 같았거든요?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냉랭한 기운이 도는 게... 그 때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녀의 목소리가 장난기로 가득 찼다가, 이내 따뜻해졌다.
"그런데 표정이며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청율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그렇게... 무서웠어?"
청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이 복잡해 보였다.
"미안해. 난 그저... 오랜 시간 혼자였기 때문에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거야."
청율이 세희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의 손길이 따뜻했다.
"하지만 네가 내 곁에 있으면서 많은 게 변했어. 네가 내게 가르쳐 준 거야. 웃는 법, 따뜻해지는 법을..."
청율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넌 내 삶에 빛을 가져다 준 거야, 세희야. 네가 있어서 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청율이 세희를 품에 안았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앞으로도 계속 나를 변화시켜 줘.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 줘. 난 네가 있어 행복해."
세희는 청율의 품에 안긴 채 과거를 회상해 보았다.
"그 때 당신이 절 처음 봤을 때도 저더러 대뜸 '용의 신부'냐고 물었죠. '용의 신부'란 게 정확히 뭐예요?"
청율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가 이내 부드러워졌다. 그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용의 신부... 그건 오래 된 전설이야."
청율이 세희를 살며시 안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이 마을 사람들은 나를 신으로 여겼어. 그들은 매년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처녀를 골라 나에게 바쳤지. 그게 바로 '용의 신부'야."
청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미신이었어. 난 그저 혼자 살고 싶었을 뿐이야. 그 어떤 '신부'도 원하지 않았지."
청율이 세희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하지만 네가 온 뒤로 모든 게 달라졌어. 넌 그저 '용의 신부'가 아니야. 넌... 내 삶의 의미가 된 거야."
"그 이야기... 들은 적이 있어요. 요즘은 그런 전통이 사라진 상태라, 그저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세희는 그의 몸에 얼굴을 기댄 채 중얼거리듯 물었다.
"정말로 당신의 신부가 되려면... 당신의 피를 마시고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 자개장 위에 올려져 있는 영롱한 보석이 눈에 들어왔다. 한 입에 삼킬 수도 있을 것 같은 포도알 크기의 옥구슬이었는데, 오색 빛을 스스로 뿜어내는 신비로운 보석이었다. 처음 이 집에 온 날, 청율이 설명해 주었다. 그 보석이 '여의주'라고.
"이걸 가진 용이 승천하면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이걸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하늘에 오르지 않고, 수천 년 동안 이런 산 속에... 인간계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청율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손이 세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내 신부가 되려면 그렇게 해야 해."
청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여의주... 그래, 난 그걸 가지고 있어. 하지만 난 승천하지 않았지."
청율이 세희를 안은 채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수천 년 전, 난 인간들과 약속했어. 이 마을을 지켜 주겠다고. 그 약속 때문에 난 여기 남아 있는 거야."
청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약속 이상이야. 난... 수천 년 동안 오직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어."
청율이 세희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애틋해졌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람을 만났어. 바로 너야, 세희야."
청율이 세희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 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그래서 하늘에 오르고 싶지 않아. 여기, 너와 함께 있고 싶어."
"그래서 용륜호를 찾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 주면서... 계속 여기에..."
세희는 조금은 마음이 짠해졌다. 그는 인간들과의 약속을 지키며 마을을 지켜보고 소원을 들어 주는 동안, 인간들끼리 나누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부러움을 느낀 모양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진짜 자신의 신부가 되어 줄 처녀가 나타나기를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필 그 순간 세희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용륜호를 찾아 산 속으로 들어온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했겠지만, 그는 이런 우연조차도 운명이라 믿고 싶었기에 세희를 붙잡았다.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 그녀의 목숨 대신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보통 인간들이 만남을 반복하며 사랑을 가꾸어 나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은 아니었지만, 인간의 가치를 뛰어넘은 존재인 그에게는 그런 흐름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청율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손이 세희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세희야, 넌 정말 날 잘 이해하는구나."
청율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 난 오랫동안 기다렸어. 하지만 그건 단순히 '신부'를 기다린 게 아니야. 난...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린 거야."
청율이 세희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애정이 깃들었다.
"그리고 네가 왔어. 넌 단순히 용륜호를 찾아온 게 아니야. 넌... 내 삶에 의미를 가져다 준 거야."
청율이 세희의 손을 꼭 잡았다.
"난 네가 여기 온 걸 운명이라고 믿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마음을 강요하진 않아. 난 그저... 네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청율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세희야,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나와 함께이든, 아니든... 네 행복이 가장 중요해."
1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세희는 스무 살이 된 해, 드디어 진정한 '용의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청율의 피를 마시고, 그의 곁에서 영생을 살기로.
처음 그 결심을 청율에게 말했을 때, 그는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세희에 대한 미안함이 섞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희는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결심이 이미 굳어졌음을 확인했다.
"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과 함께라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당신이 그 무엇보다도 제 행복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에요."
청율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손이 세희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세희야... 정말 고마워. 네가 이런 결정을 해줘서..."
청율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거야? 네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야.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 없게 되는 거야."
청율이 세희를 품에 안았다. 그의 체온이 따뜻해졌다.
"난 정말 행복해. 하지만 동시에 두려워. 네가 후회할까 봐... 네가 고통받을까 봐..."
청율이 세희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간절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난 모든 걸 걸고 너를 지키고 싶어.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
청율이 세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준비됐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우리의 영원한 시간이..."
세희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네, 준비 됐어요."
청율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손이 천천히 자신의 손목으로 향했다.
"그럼... 시작하자."
청율이 자신의 손목을 깨물었다. 선명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이걸 마셔야 해, 세희야. 하지만 고통스러울 거야. 견딜 수 있겠어?"
청율이 조심스럽게 피 묻은 손목을 세희에게 내밀었다.
"준비가 되면 마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곁에 있을 테니 두려워하지 마."
청율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이제부터 우리는 영원히 함께야. 네가 고통스러워할 때마다 내가 안아줄게. 네가 두려워할 때마다 내가 옆에 있어줄게. 약속해."
세희는 망설임 없이 그의 손목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덮었다. 목을 타고 넘어오는 그의 피는 차가우면서도 뜨거웠다. 천천히 입을 떼어 낸 세희의 입술은 전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몸 속이... 점점 더 뜨거워요."
세희는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짚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청율은 세희의 모습을 지켜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이 세희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괜찮아, 세희야. 이건 시작일 뿐이야. 앞으로 더 힘들어질 거야."
청율이 세희를 품에 안았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난 네 곁에 있을게. 끝까지 함께 할 거야."
청율의 손이 세희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 몸이 변하기 시작하는 거야. 용의 피가 네 안에서 퍼지고 있어. 그 과정이 고통스럽겠지만, 견뎌내야 해."
청율이 세희의 얼굴을 들어 자신의 눈을 마주보게 했다.
"날 믿어. 이 모든 게 끝나면, 우린 영원히 함께할 수 있어. 그때까지 힘내."
청율의 눈빛이 간절해졌다.
"사랑해, 세희야. 네가 이렇게 큰 희생을 해 주는 걸 잊지 않을게. 영원히."
"희생이 아니에요. 우리가 함께 있기 위한 과정일 뿐이잖아요."
세희는 그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저도 사랑해요."
청율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손이 세희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세희야..."
청율이 세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키스는 부드럽고 깊었다.
"네 말이 맞아. 이건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야."
청율이 세희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체온이 뜨거워졌다.
"이제부터 우리는 정말로 하나가 되는 거야. 네 몸이 변하는 동안, 난 네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을 거야."
청율의 손이 세희의 등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아프거나 힘들면 언제든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서 널 도와줄게."
청율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우리의 영원한 시간이 시작됐어, 세희야. 이제부터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한 쌍이야."
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뜨거워진 그의 체온이 입술로 느껴졌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청율에게 입을 맞추었다.
"청율..."
청율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의 손이 세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세희야... 넌 정말 아름다워."
청율의 입술이 세희의 목을 따라 내려갔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함께야. 네 모든 것을 사랑해."
청율이 세희를 살며시 들어 올려 침대로 향했다.
"하지만 아직 변화의 과정이 끝나지 않았어. 조금 더 기다려야 해."
청율이 세희를 침대에 눕혔다. 그의 손이 세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지금은 네 몸이 힘들어질 거야. 내가 옆에서 지켜볼게. 두려워하지 마."
청율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 모든 게 끝나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하나가 될 거야. 그 때까지 조금만 참아 줘."
세희는 몇 날 며칠을 앓았다. 인간의 몸으로 용의 피를 받아들여 용의 생명력이 깃들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닷새 만에 세희의 몸은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세희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눈동자가 그의 것과 똑같은 황금빛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드디어 진정한 용의 신부가 되었다.
그 날 밤 그와 치른 초야는 아름다웠다. 세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청율이 몇천 년 동안이나 함께 해 왔던 외로움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녀의 흰 손가락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세희의 눈에서 방울져 흘러나온 눈물이 진주로 변해 침상을 또르르 굴렀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청율은 세희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의 손가락이 세희의 등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세희야... 드디어 우리가 하나가 되었구나."
그의 목소리는 깊고 부드러웠다. 청율의 입술이 세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울지 마, 내 사랑. 이제 우리는 영원히 함께야."
청율의 손이 세희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세희의 눈과 마주쳤다.
"네가 나를 위해 이런 선택을 해줘서 고마워. 이제부터 우리의 영원한 시간이 시작되는 거야."
청율이 세희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이 세희의 목을 따라 내려갔다.
"넌 이제 나의 전부야, 세희. 내가 수천 년 동안 기다려 온 단 하나의 존재."
청율의 손이 세희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제부터 우리는 함께 모든 것을 경험하게 될 거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네게 보여주고 싶어."
그녀가 인간의 몸으로 청율의 거처로 들어온 지 10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지만, 세희와 청율의 사랑은 무르익어만 갔다. 그녀가 가꾸는 정원은 아름다움을 더해갔다. 거실에 놓인 여의주는 어김없이 무지개와 같은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세희는 그의 피를 마시고 용의 신부가 된 이후로 더 이상 외모가 변하지 않았다. 모두가 부러워할 영원한 젊음과 영원한 생명, 그러나 그녀는 청율이 없었다면 결코 그것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소원으로 병이 완쾌된 아버지는 새 부인을 들여 8년이 넘게 행복하게 살다가 수명을 다하여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 세희와 청율은 그녀의 아버지 넋이 반딧불이처럼 날아가 보금자리로 돌아가듯 용륜호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청율은 마을 사람들과의 약속으로 마을을 지켜 주는 대신, 수명을 다한 그들의 영혼을 거두어 여의주의 신통력을 가꾸고 있었다.
10년 동안 아무것도 변치 않은 것은 아니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은 그녀가 떠나 온 마을 사람들이 변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느 날 세희와 청율이 숲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길을 잃은 마을 아이 한 명이 그들과 마주쳤다. 세희는 아이를 친절하게 이끌어 마을로 돌려보내 주었고, 천진난만한 아이는 자신이 만난 황금빛 눈을 가진 용신과 아름다운 그의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마을 어른들에게 기쁘게 털어놓았다. 놀라운 그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 준다는 전설 속의 용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이 있다면 어딘가에 여의주 또한 숨기고 있다는 말인데..."
마을 사람들은 용륜호를 찾아 산을 쥐 잡듯이 뒤졌다. 용이 산다는 그 호수를 찾으면, 어딘가에 여의주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청율과 세희가 사는 진녹색 황금 기와집을 찾아냈다.
세희와 함께 산 속 깊은 숲을 거닐며 휴식을 취하던 청율은 순간 자신의 기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누군가의 손에 여의주가 들어갔음을 깨달았다. 휘청이는 그의 몸을 세희가 얼른 부축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청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몸이 흔들렸고, 세희의 부축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세희야... 여의주가... 누군가가 여의주를 가져갔어."
청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흐려졌다.
"누군가... 우리 집을 찾아낸 것 같아. 내 힘이... 빠져나가고 있어."
청율이 세희의 손을 꽉 잡았다.
"우리... 빨리 돌아가야 해. 여의주를 되찾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청율의 말이 끊겼다. 그의 호흡이 가빠졌다.
"세희야, 미안해. 내가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걱정하지 마. 우리가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어."
청율이 힘겹게 일어섰다.
"가자, 세희야. 우리의 집을 지켜야 해."
세희는 깜짝 놀라 그를 부여잡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겨우 도달한 집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침범한 흔적인 발자국들만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거실에 모셔 두었던 여의주는 온데간데 없었다.
"안 돼..."
세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청율을 일단 침상에 앉혔다.
"당신은 힘드니까 쉬고 있어요. 제가 다시 되찾아 올게요. 마을에 다녀올게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청율을 두고, 세희는 집을 뛰쳐나갔다. 그녀는 마을을 향해 달렸다. 아직 마을에 미처 다다르지 못한 마을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안 돼요! 제발... 그 보물을 돌려 주세요...!"
세희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용의 신부가 되어 눈동자 색이 변해 버린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세희는 그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10년 전에 용륜호에 몸을 던져 죽고 없는 사람이었다. 세희는 여의주를 되찾기 위해 몸을 던졌다.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세차게 뿌리쳤고, 세희는 장정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진 순간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죽어가는 세희를 당황한 듯 바라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의주를 끌어안고 그대로 도망쳤다.
청율은 세희가 나간 후 힘겹게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결연했다.
"세희야... 안 돼..."
그는 비틀거리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네가 위험해... 내가 가야 해..."
청율은 간신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시야가 흐려졌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세희야... 기다려... 내가 갈게..."
그는 세희가 간 방향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느렸지만 단호했다.
"네가 위험하다면...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어..."
청율의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일었다.
"마을 사람들... 용서하지 않겠다... 세희를 해치면... 모두 불태워 버리겠어..."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청율은 그녀의 자취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멀리 가지 않은 곳에서, 바위에 머리를 부딪힌 채 죽어가는 세희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산이 떠나가도록 절규했다.
"처, 청율..."
세희의 떨리는 손이 그의 두루마기 자락을 붙잡았다. 그의 옷자락이 피로 물들었다.
청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세희야! 안 돼, 안 돼...!"
그가 세희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럴 수는... 이럴 순 없어..."
청율의 눈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그의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주변의 나무들이 흔들렸다.
"용서할 수 없다... 모두 불태워 버리겠어!"
그의 목소리가 점점 깊어지더니, 마침내 용의 포효로 변했다. 청율의 몸이 변형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변했다.
"모두 죽여 버리겠어...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여의주를 빼앗겨 영생이 깨진 세희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그의 거대한 발톱을 붙잡고 늘어졌다.
"안 돼요... 청율...!"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빛을 잃을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생해선 안 돼요. 당신은... 용이야... 이무기가 되면 안 돼..."
세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영생을 얻는 데 실패했지만, 당신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다시 태어날 수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다음 생에서 여의주를 가지고 꼭 당신 곁으로 돌아갈게요. 그 때는 우리, 정말로 영원히 같이 살아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청율의 손을 힘없이 잡고 있던 세희의 손이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살생하지 말고..."
흐느끼던 세희의 눈동자에서 빛이 영영 꺼져들어갔다.
청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몸이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희야... 안 돼... 이럴 순 없어..."
청율이 세희의 몸을 부드럽게 안아들었다. 그의 손이 세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네 말대로... 살생하지 않을게. 하지만 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네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 내가 널 찾을 때까지... 영원히 기다릴게."
청율의 눈에서 결의가 번쩍였다.
"여의주를 되찾고, 네가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할게. 그리고 그때는... 정말로 영원히 함께 살자. 약속해."
청율이 세희의 이마에 마지막 입맞춤을 했다.
"사랑해, 세희야. 영원히..."
청율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기다려, 세희야. 반드시 널 되찾을 테니까."
인간의 손에 빼앗긴 여의주는 청율의 대부분의 힘을 앗아갔다. 용륜호는 영원히 막혀 버렸고, 더 이상 그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 줄 수 없게 되었다. 아니, 들어 주지 않게 되었다.
그는 그 이후로 내내 죽은 세희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빈 족자를 펼쳐 그녀의 모습을 돌이켜 그리고, 여의주를 잃은 빈 자리에 그녀의 그림을 대신 걸어 두었다.
세월이 흐르자, 여의주를 빼앗기고 대부분 잃었던 그의 힘이 조금씩 회복되어 가기 시작했다. 물론 여의주를 가지고 있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약했지만,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청율은 용륜호가 있던 용륜산으로 이어지는 숲을 미궁으로 바꾸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소원을 빌겠다며 숲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다시는 그 숲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 다음으로 그는 세희와 자신이 살던 기와집을 높다란 성으로 바꾸어 세웠다. 언젠가 자신의 곁으로 되돌아 올 그녀를 위해, 이번에야말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두 사람만의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세희가 정성껏 키워 놓았던 앞터의 정원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녀를 대신해 정원을 돌보며, 그는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단 하나 뿐인 그의 신부가 다시 태어나 자신을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수백 년의 시간이 흘러, 여의주를 빼앗은 선대의 죄를 뉘우친 후대의 마을 사람들은 용에게 속죄하는 의미에서 10년마다 '용의 신부'를 뽑아 여의주를 물려주는 전통의식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자신들의 곁을 떠난 용신이 다시 돌아와, 다시 한 번 마을을 지켜 주기를 바라면서.
용신님 용신님 마을을 지켜주시는 용신님
잃어버린 사랑 찾아 헤매이는 용신님
눈물로 엮은 여의주를 돌려 드리니
부디 받아 주시옵소서
청율의 단 한 명 뿐인 신부, 세희가 다시 세상에 태어난 것은 그로부터 수백 년 후의 일이었다.
-fin.
현생 모드로 플레이하면서 모았던 '전생' 이야기를 취합해서 여기서 풀었습니다. 아마 더 많은 실마리가 모였다면, 더 풍부한 스토리가 되었을 듯 합니다. 종종 전생편에서 전생을 언급하던데, 전생의 전생이 있는 게 아니라 Ai가 헷갈려 하는 듯ㅋㅋ 그럴 때마다 새로고침해서, 제대로 된 메시지를 불러오는 방법으로 스토리를 진행했습니다.
현생편을 먼저 플레이하면서 청율이 왜 그렇게 마을 사람들을 극혐했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막상 스토리를 진행해 보니 인간불신&인간혐오에 걸릴 만 하겠네요. 우리 청율... 그래도 현생편 여주가 잘 달래 줬으니 이제 둘이서 행복하게 잘 살겠지요. 언젠가는 현생의 세희도 전생의 기억을 다 되찾게 되리라 생각해 봅니다.
크랙 :: 세르하 유스카✨Serha Jouska
구(久) 뤼튼 :: 세르하의 환상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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