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
깊어가는 밤, 당신은 천 년 세월을 견뎌온 외로운 도깨비 금천과 마주하게 되었다.
[크랙] 금천(@케리나) 캐릭터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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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아홉에 죽을 운명이야."
"네에?????"
순덕선녀는 앞에 앉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여대생을 바라보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21세기 현대의 서울.
세화는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앞으로 취업운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마음에 처음으로 점집을 찾았다. 몸도 건강했고, 정신도 맑았다. 술과 담배도 일절 하지 않았고, 집과 학교만 왔다갔다하며 성실하게 살았다. 그런데 다짜고짜 스물 아홉에 죽는다니...
"아니, 저기요. 아니... 선녀님."
세화는 헛웃음을 지으며 순덕선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체 뭘 보신 건데요. 저는 졸업하고 취업을..."
"취업 아주 잘 돼. 돈도 잘 벌고, 건강하게 잘 살 거야. 스물 아홉까지는."
"...제가 잘 살다가 요절할 운명이라구요?"
세화는 이제 당황을 넘어 황당해하기 시작했다.
"왜요??? 뭐 귀신이라도 씌여서요? 아님 저주라도 받나요?"
"그 이상은 천기누설이라 말할 수 없어."
"선녀님!!!"
세화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미 사람 수명 말하는 건 천기누설 아니에요?"
"그렇지. 대가리는 잘 돌아가네."
"어차피 누설한 거 다 말씀해 주시면 되잖아요."
"아니, 네 영혼은... 다른 데 저당 잡혔어. 그래서 사실 천기가 문제가 아니고... 더 말하면 내 사지육신이 찢겨 죽게 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순덕선녀는 다시 한 번 세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널 오래도록 기다린 귀인이 있어. 귀인이 그 귀인(貴人)이기도 하지만, 귀인(鬼人)이기도 해. 그리고 그로 인해서 스물 아홉에 너는, 영영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야.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거지."
"하아... 전혀 못 알아듣겠는데요."
"못 알아듣겠으면 냉큼 사라져. 나도 더 이상은 말 못 해. 이것도 무리해서 많이 말한 거야. 더는 안 돼."
순덕선녀는 홱 등을 돌려 돌아앉아 버렸다. 세화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앉아 있다가 주섬주섬 지갑을 꺼냈다.
"복채는 됐어. 이런 얘기 해 주고 복채 받으면 내가 벌 받아."
세화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점집을 나왔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골목 어귀를 돌아 나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일렁이는 불빛이 하나 있었다.
어둠 속에서 도깨비불을 희미하게 타오르게 하며
"드디어... 드디어 다시 만났구나. 내가 약속했잖아. 네가 어디로 가든,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든 꼭 찾겠다고... 그리고 이번에는... 이번에는 네가 너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점집 앞에서 흔들리는 도깨비불을 바라보며
"그 점쟁이 말이 맞아. 난 오랫동안 널 기다렸어. 전생에서 네가 그렇게 떠나버린 후로... 난 계속 기다렸어. 네 영혼이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기를... 그리고 드디어 찾았어.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네가 전생처럼 그렇게 순수하게, 너무 순수하게 살다가 스러지게 하고 싶지 않아. 이번에는... 네가 진정한 행복을 알았으면 해. 나와 함께..."
세화가 사라진 골목을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스물 아홉... 그래. 그때가 되면 난 널 데려갈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죽음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될 거야. 네가 도깨비 신부가 되면... 영원히 나와 함께 살게 될 거야. 그 때까지... 그때까지 난 계속 널 지켜 볼 거야. 네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그리고 이번에는... 이번에는 꼭 네 행복을 지켜 줄 거야. 기다려 줘, 세화야. 우리의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2월의 졸업식 날, 학사모를 쓰고 졸업 가운을 걸친 세화는 홀어머니와 함께 꽃다발을 나누어 들고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녀가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금천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홀어머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남편과 사별하고 남은 딸을 애지중지 키운 세화의 어머니는, '세호'의 영혼을 품고 있었다.
도깨비불을 희미하게 타오르게 하며, 졸업식장 한켠에서 바라보며
"세호야... 이번 생에선 어머니가 되어 세화를 지키고 있구나. 그 때는 병약한 널 돌보겠다고 세화가 그렇게 힘들어했는데. 이번엔 네가 어머니가 되어 세화를 키웠네. 운명이란 게 참 묘해..."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짓는다
"세화는 이번 생에도 여전히 순수하고 착해. 그래도 이번엔 좀 더 밝고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 네가 어머니로서 잘 지켜줬으니까... 하긴, 전생에 그렇게 사랑받았던 동생이니까. 어머니로 태어나서도 딸을 그렇게 사랑할 수밖에 없었겠지. 근데 말야, 세호야... 아니, 이제는 어머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이번에는... 세화를 내게 맡겨줄 수 있을까?"
도깨비불이 따뜻하게 일렁이며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절대 세화가 아프거나 힘들게 살지 않게 할 거야. 전생처럼 너무 순수하게, 너무 헌신적으로 살다가 스러지게 하진 않을 거야. 이번에는... 내가 세화를 정말 행복하게 해줄 거야. 그동안 못다 한 사랑도, 못다 누린 행복도... 내가 전부 다 채워줄 테니까. 그때는 동생으로서 세화의 가장 가까이서 자라났지만, 이번에는 어머니로서... 우리의 사랑을 축복해주면 좋겠어."
금천은 도깨비불을 빛내며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다.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이 되어 꽃다발을 들고 세화에게로 다가갔다. 엄마의 팔짱을 끼고 친구들과 함께 웃고 있던 세화는 모르는 사람이 이 쪽으로 다가오자 친구를 축하하러 찾아온 사람인 줄 알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세화를 향해 다가섰다.
세화 앞에 서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축하해요, 졸업.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꽃다발을 건네며 눈을 반짝이듯 웃는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금천이라고 합니다. 혹시... 취업 준비하고 계시죠? 제가 있는 회사에서 마침 신입 사원을 뽑고 있거든요. 세화 씨의 학과 선배이기도 하고... 교수님께 추천도 받았습니다."
세화의 어머니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어머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세화 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제가 다니는 회사는..."
도깨비불이 그의 주변을 은은하게 감싸며,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걱정 마세요. 이번에는... 천천히, 그리고 올바르게 다가갈 테니까요. 세화 씨가 선택할 수 있도록... 그리고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도록..."
세화의 어머니는 취업이라는 말에 솔깃해 했지만, 세화는 그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어느 회사인데요? 무슨 교수님 추천을 받으셨는데요? 전 교수님들께 아무 얘기도 못 들었는데요."
세화는 일단 그가 내민 꽃다발은 받아들었지만, 한 쪽 손을 다시 내밀었다.
"일단 명함 좀 줘 보실래요?"
금천은 살짝 당황했지만, 몇 시간 뒤면 연기처럼 사라질 가짜 명함을 주머니에서 꺼내는 척하며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역시... 똑똑하구나. 전생이나 지금이나... 네 눈은 참 맑아서,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구나.'
세화는 그가 내민 감쪽같이 그럴 듯한 명함을 받아들었다.
"SL그룹... 보조이사 금천..."
세화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런 대기업에서 왜 졸업식에 직접 절..."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며
"아, 그게... 요즘은 우수 인재 영입을 위해서 이렇게 직접 찾아가기도 해요. 특히 세화 씨처럼 성적도 우수하고, 교수님들의 평가도 좋은 분이라면..."
잠시 망설이다가 진실된 목소리로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세화 씨의 졸업 논문을 읽어봤어요. 그리고 세화 씨가 동아리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들도요.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시더군요. 특히 전통문화와 현대를 접목시키는 방식이... 제가 찾던 바로 그런 거였어요. 그래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
도깨비불이 희미하게 반짝이며
"물론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의심스러우실 거예요. 하지만 정식으로 면접도 보시고, 천천히 검토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어떠신가요? 아, 그리고... 혹시 시간 되시면 지금 회사 근처 카페에서 간단히 설명이라도 들으시겠어요? 어머님도 함께요."
'이번에는 정직하게... 네가 날 선택할 수 있도록...'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아... 지금은... 아직 졸업식 중이라 좀 곤란해요. 명함 주셨으니까 제가 다시 연락 드릴게요."
세화는 친구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는 시선을 불편해하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얼른 엄마와 친구들의 손을 붙잡고 자리를 옮겨 버렸다.
"우리 저기서 사진 찍자. 우리가 좋아하는 분수대 있었잖아."
"아, 맞다! 거기서 찍어야지~"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역시... 내가 너무 급했나. 그래도 이번엔 도망가지 않고 연락하겠다고 했어. 전생에선 나를 완전히 거절했었는데... 조금은 발전한 걸까?"
명함을 쥐고 있는 세화의 손을 바라보며
"하지만 그 명함... 오늘 저녁이면 사라질 텐데. 그래도 괜찮아. 난 또 다른 방법으로 네 앞에 나타날 거야. 이번에는 좀 더 자연스럽게... 네가 의심하지 않을 방법으로..."
분수대 쪽으로 걸어가는 세화와 그녀의 친구들, 그리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세호야... 아니, 어머님. 걱정 마. 전생에서처럼 세화를 힘들게 하지 않을 테니까. 이번에는 정말로...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그녀의 순수함을 지켜주면서도, 동시에 그녀가 자신의 삶을 마음껏 살 수 있도록... 내가... 내가 이번에는 제대로 해낼 테니까..."
도깨비불을 은은하게 타오르게 하며 천천히 사라진다
"다음에는... 다음에는 좀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자. 세화야..."
금천이 준 명함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찔러넣은 세화는 졸업식을 마치고 엄마와 오붓하게 외식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욕실에서 씻고 나와 외출복을 정리하면서, 그제야 받았던 명함이 생각나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식당에서 흘렸나? 뭐 어때."
세화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옷을 옷걸이에 걸고 방으로 들어갔다.
세화의 방 창가에 도깨비불이 어른거리며
"역시 명함이 사라진 걸 눈치챘구나.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잃어버린 게 아닌데... 그래도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걸 보니 다행이야. 아직은... 내가 누군지 알아채지 못한 것 같고."
도깨비불이 세화의 방을 은은하게 비추며
"졸업식 때 봤잖아? 넌 여전히 똑똑하고 영리해. 거짓말에 속지 않고, 의심스러운 제안은 경계하고... 그런 모습이 전생의 너와 똑같아. 하지만 난 이번에는 달라. 난 더 이상 너의 영혼을 탐하려 하는 도깨비가 아니야. 그저... 네 곁에서 너를 행복하게 해주고...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
창밖을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잘 자, 세화야. 이제 곧... 우리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될 거야. 이번에는 네가 선택할 수 있도록, 네가 원하는 대로...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내가... 내가 꼭 그렇게 만들어 줄게. 전생에서 못다 한 약속... 이번에는 꼭 지킬 테니까."
그 날 밤 세화는 꿈을 꾸었다. 남루한 차림의 한 소녀가 숲 속에서 반딧불이들을 발견했는데, 그 불빛들이 소녀를 향해 다가왔다. 은은한 불빛은 점점 커지며 소녀를 에워쌌다. 그리고 어느 샌가 소녀는 자신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 세화는 묘한 꿈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곧 잊어버렸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아침 조깅을 시작했다.
세화는 이어폰을 끼고 공원 산책로를 상쾌하게 달렸다. 그녀의 음악 취향은 좀 독특했다. 세화는 민요나 판소리, 궁중악 같은 국악을 즐겨 들었는데 친구들은 그런 그녀가 노인네 같다고 놀리곤 했다. 오늘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취타 소리를 들으면서 조깅하고 있는데 누가 지나치게 가까이 옆에서 달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옆을 쳐다보니 트레이닝복을 입은 훤칠한 사람이 함께 달리면서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졸업식 때 자신에게 명함을 주었던 바로 그 사람임을 기억하고, 세화는 달리기를 계속하면서 한 쪽 이어폰을 귀에서 빼냈다.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세화의 속도에 맞춰 달리면서
"안녕하세요, 세화 씨. 우연이네요. 저도 매일 아침 여기서 운동하거든요. 어제는 죄송했어요, 갑자기 그렇게 찾아가서..."
세화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듣고 눈을 반짝이며
"어... 혹시 지금 듣고 계신 게 '수제천'인가요? 악보 해석이 좀 특이한데... 김창조 명인 버전이신가요? 전 박귀희 명창의 해석을 더 좋아하는데... 어, 죄송해요. 제가 너무 갑자기 이런 얘기를..."
살짝 멋쩍은 듯 웃으며
"사실... 전통음악 애호가거든요. 특히 궁중음악을 좋아해요. 세화 씨도 이런 음악을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보통 우리 나이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데... 혹시 시간 되시면 이번 주말에 국립국악원에서 하는 공연 보러 가실래요? 아, 물론 회사 이야기도 그때 자세히 해드릴 수 있고요..."
'뭐야, 이 사람...'
세화는 이어폰을 다시 끼고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좀 더 속력을 내서 달렸다.
그러자 금천은 여전히 태연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따라잡아 계속 옆에서 달리면서 말을 걸었다.
세화의 속도에 맞춰 여유롭게 달리며
"아, 제가 너무 실례를 했나요? 하지만 정말 반가웠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 이런 음악 듣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게다가 그 해석본까지... 혹시 세화 씨 논문에서 다뤘던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주제도 이런 음악적 관심에서 나온 건가요?"
달리면서도 전혀 숨이 차지 않는 목소리로
"그런데 말이에요... 어제 제가 드린 명함이 사라진 걸 아셨나요? 신기하죠? 마치 도깨비가 장난친 것처럼... 하하. 근데 세화 씨, 어제 밤에 꿈은 잘 주무셨나요? 혹시... 특이한 꿈을 꾸진 않았나요?"
도깨비불이 희미하게 그의 주변을 맴돌며
"농담이에요, 농담. 그냥 제가 꿈 얘기하는 걸 좋아해서... 그냥... 세화 씨랑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정말 많이요. 어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그렇게 가버리셔서... 세화 씨, 저기 앞에 보이는 벤치에서 잠깐 쉬었다 가는 건 어떠세요? 아침 공기도 좋은데... 아, 물론 싫으시다면 괜찮아요. 세화 씨가 편하게 느끼실 때까지... 그때까지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왜냐하면 세화 씨가 전생에... 아니, 죄송해요. 제가 또 이상한 소리를..."
이어폰을 낀 상태라 그의 말은 단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옆에서 쉬지 않고 재잘거린다는 사실 정도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눈썹을 찡그린 세화는 거기서 더 속력을 냈지만, 금천은 쉬지 않고 말을 걸며 그녀를 가볍게 따라왔다. 공원을 몇 바퀴를 돈 다음에야 세화는 기진맥진해져서 산책로 한 쪽에 멈춰 서서는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뭐야, 진짜...'
그 때 눈 앞에 생수병이 하나 척 하고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새 생수병을 내밀고 있었다.
생수병을 건네며 따뜻한 미소로
"숨이 많이 차셨네요. 여기 마시고 좀 쉬세요. 뚜껑도 아직 안 딴 새 거예요. 아침부터 너무 빨리 달리셔서... 운동은 천천히 하는 게 좋아요."
세화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
"아까부터 제가 계속 말을 걸어서 불편하셨죠? 죄송해요. 그런데... 세화 씨를 보니까 자꾸 말을 걸고 싶어지네요.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이상하죠? 어제 처음 뵀는데... 아니, 사실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 이건 또 이상한 말이 되어버렸네요."
도깨비불이 희미하게 반짝이며
"그래도 세화 씨가 이렇게 멈춰 서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전생에서는... 아니, 죄송해요. 자꾸 이상한 말만 하게 되네요. 그런데 정말 신기해요. 세화 씨가 듣고 계신 음악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랑 똑같아요. 마치 운명처럼... 어제 그 명함이 사라진 것도, 오늘 아침 여기서 만난 것도... 전부 다 우연이 아닌 것 같지 않나요?"
세화는 숨을 헐떡이며 이어폰을 그제야 뺐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새 생수병을 받아, 뚜껑과 겉면을 살피고 뒤집어서 흔들어도 본 다음에 껄끄러운 듯이 뚜껑을 따서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한 번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예요?"
그는 세화를 뒤쫓아 공원을 몇 바퀴나 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세화는 그런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또 취업 뭐, 그런 얘기 하러 온 거예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한데 전 그냥 공채 뜨면 지원할게요. 그럼 됐죠?"
세화는 자신이 마신 생수병을 그에게 떠안기듯 돌려주고는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금천은 세화가 입을 대고 마신 생수병을 보며 뭐가 그리도 좋은지 얼굴이 발그레해져서는 세화를 따라 걸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세화가 마신 생수병을 소중히 쥐며, 발그레해진 얼굴로
"아니... 그러니까... 취업 얘기만은 아닌데... 세화 씨, 혹시 어제 밤에 이상한 꿈 안 꾸셨어요? 반딧불이 같은 거... 아니면 숲 속에서..."
세화의 걸음에 맞춰 걸으며
"국악 좋아하세요? 전 아까 그 곡이 참 좋아요. 특히 밤에 달빛 아래서 듣는 게...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달빛 아래서 우리... 아니, 죄송해요.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게 되네요."
도깨비불이 희미하게 반짝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세화 씨... 전 세화 씨가 알아봐 주길 바랐어요. 그래서 그 때처럼... 아니, 죄송해요. 자꾸 이상한 말만 하게 되네요. 근데 정말 신기해요. "
도깨비불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은은하게 빛나고
"세화 씨는 제가 이렇게 뛰어도 숨이 안 차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죠? 그리고 어제 그 명함이 사라진 거... 그게 정말 잃어버린 거라고 생각하세요? 어젯밤 꾼 꿈이랑 관련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혹시... 도깨비란 거... 믿으세요?"
'도깨비??'
".........."
세화는 멈춰 서서 그를 아래위로 바라보았다. 허우대는 멀쩡하게 생겼는데. 하얀 백은발에 눈동자에는 붉은 빛이 있는 것도 같고, 뭔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듯한 신비로운 외모에 이상한 말이나 찍찍 하고...
요즘 사이비는 포교 활동을 이런 식으로 하나? '도를 아십니까'를 또 저런 식으로?
"...안 사요."
세화는 그렇게 말하고는 경보하듯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며, 휑하니 가 버렸다.
세화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리며
"푸하하하! 안 산다고? 아이고, 세화야... 아직도 그렇게 귀여운 거야? 전생에서도 그랬지... 내가 도깨비라고 했을 때 '귀신한테 속아넘어갈 것 같아요?' 이러면서... 근데 결국엔 내 마음을 알아줬잖아..."
세화가 마신 생수병을 보며 장난스럽게 미소짓고
"음... 간접키스인가? 옛날에는 이런 거 싫어했으면서... 그래도 이제는 물이라도 마시는구나. 어제 명함도 받아주고... 그럼 이번 생에선 좀 기대해 봐도 되는 걸까?"
도깨비불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며
"그래도 오늘은 꽤 잘된 것 같아. 예전처럼 도망가지도 않고... 물도 마셔 주고... 내 말도 조금은 들어줬고... 그렇지? 역시 우린 운명인가봐? 하하하! ...근데 진짜 사이비 전도사로 오해한 거야? 아이고, 이거 좀 민망한데... 다음엔 좀 더 그럴 듯하게 접근해볼까? 아님 그냥 도깨비불로 놀래켜 버릴까? ...아니지. 그럼 또 도망가겠네. 흠... 어떻게 하면 널 내 곁에 둘 수 있을까..."
그 날부터 금천은 세화가 매일 아침 조깅할 때마다 나타나서 함께 달렸다. 그리고 항상 그녀에게 물을 건넸다. 세화는 처음에는 그를 경계했으나 자신에게 딱히 아무것도 원하거나 요구하지 않는 듯한 그에게 조금씩 경계가 허물어졌다. 그는 뭔가 눈으로 보이는 나이에 비해서 천진난만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특히 능청스럽게 잘 웃었다. 세화를 앞에 두고 오만 가지 수다를 다 떠는 그에게 그녀가 한 마디만 툭 던지면 뭐가 그리 웃기고 재밌는지 아이처럼 웃어댔다. 세화는 그런 금천을 어이없이 바라보다가 피식 웃곤 했다.
"근데 아저씨는 몇 살이에요?"
세화는 그와 함께 산책로를 걸으며 물었다.
"최소한 대학 갓 졸업한 사람 같아 보이진 않는데. 말 편히 해요."
도깨비불이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아저씨...? 하하하! 그래도 아저씨는 좀 아닌 것 같은데... 음... 나이로 치면 한 1200살... 아니다. 그건 너무 늙었나? 그럼 800살... 아니다. 그것도 좀 그렇고... 어휴, 이걸 어떻게 계산하지? 그냥 영원히 젊은이라고 해 두자~"
세화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며
"진짜 말 편하게 해도 돼? 그동안 존댓말 쓰느라 혀가 꼬일 뻔했는데... 세화야, 고마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날 피하더니... 이제 조금은 내가 덜 무서워진 걸까?"
도깨비불이 희미하게 반짝이며
"네가 이렇게 말도 걸어주고... 반말하라고도 하고... 나 너무 행복해! 아, 맞다. 오늘도 물 가져왔는데... 목마르지 않아? 이제 내가 주는 물은 의심 안 하고 마시더라? 처음엔 막 이리저리 살펴보고 흔들어보고 그랬는데... 그때 표정이 진짜 귀여웠어. 마치 전생에서처럼... 아, 또 이상한 소리 했지? 미안~"
세화는 그가 끝도 없이 말을 해대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1200살? 800살? ...무슨 소리를..."
'저세상급 텐션에 저세상급 사차원이네.'
세화는 그에게서 아무 거리낌 없이 물을 받아서 마셨다.
처음에는 수상해 보였고, 그 다음에는 미친 사람 같아 보였는데, 그래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고, 어쩐지 완전히 낯선 느낌도 아닌 묘한 사람이다. 빈 말로도 정상적으로 보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자신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세화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번부터 전생이니 도깨비니... 그런 소리를 하던데, 아저씨는 전생을 믿어요? 그럼 아저씨 전생은 뭐였는데요?"
세화의 말에 갑자기 표정이 진지해지며
"전생...? 나한텐 그런 거 없어. 난 그냥 도깨비였어. 지금도 도깨비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도깨비겠지. 그리고 넌... 넌 정말 특별했어. 지금도 특별하고..."
도깨비불이 세화 주위를 맴돌며 반짝이자 손으로 제지하듯 휘휘 저으며
"아이고, 얘들아. 지금은 안 돼. 아직 세화가 준비가 안 됐잖아... 어? 아, 미안. 혼자 중얼거리느라... 그런데 세화야, 네가 전생을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가끔... 꿈에서 본 적 있지 않아? 숲 속에서 반딧불을 보는 꿈... 아니면 달빛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꿈... 그런 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니면 내가 보여줄까? 전생의 우리 모습... 아니다. 아직은 안 되겠다. 하긴, 내가 갑자기 도깨비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 그래도 좋아. 네가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아, 목마르지 않아? 물 더 마실래?"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도깨비불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화는 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금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한 '꿈' 이야기는 좀 수상했다.
"...달빛 아래... 숲에서 반딧불...?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그런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갑자기 반색하며 세화 쪽으로 바짝 다가서며
"진짜 그런 꿈 꿨구나! 역시... 역시 넌 나를 기억하고 있어! 아니, 그러니까... 네 마음 어딘가에 내가 남아있다는 거잖아? 그 꿈에서 본 반딧불... 사실 그건 내 도깨비불이었어. 그때 난 네 곁에 있었거든. 달빛 아래서... 넌 날 기다리고 있었고..."
흥분된 목소리를 가라앉히려 애쓰며
"아, 미안해. 너무 기뻐서... 그래도 이렇게 조금씩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해. 사실 난 네가 완전히 잊어버릴까 봐 무서웠거든. 그래서 이렇게라도... 매일 아침 널 만나고... 네 곁에 있으려고 했어. 어쩌면 우연히라도 날 기억해줄까 해서..."
도깨비불이 세화의 주위를 맴돌며 은은하게 빛나고
"세화야... 혹시 그 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어? 달빛 아래서... 숲 속에서...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느낌... 그리고 그 누군가가 네게 약속했던 거... 기억나지 않아? 아니다, 너무 서두르는 거겠지... 하지만 이제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모든 걸 기억해 낼 때까지...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내가 정말 도깨비라는 걸 믿어 줄래?"
"무슨 얘긴지 하나도..."
세화는 갑자기 급발진하는 금천의 태도에 당황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때, 졸업을 앞두고 옥당 점집 선녀로부터 들은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금까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잊고 있었던 그 말.
'널 오래도록 기다린 귀인이 있어. 귀인이 그 귀인(貴人)이기도 하지만, 귀인(鬼人)이기도 해. 그리고 그로 인해서 스물 아홉에 너는, 영영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야.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거지...'
'영혼이 다른 데 저당 잡혔다느니 어쩌느니... 설마...'
세화는 문득 섬뜩함을 느끼며 금천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설마 도깨비니 전생이니 이상한 말을 하는 이 자가, 세화의 스물 아홉을 끝장내 버릴 그 귀인...?
"하... 하하..."
세화는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말도 안 돼."
세화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보고 순간 불안한 기색이 스며들며
"세화야... 무서워하지 마. 난 절대 너를 해치지 않아. 그때처럼... 아니, 이번엔 정말로 약속할게. 네 영혼을 탐하지도 않고, 너를 강제로 데려가지도 않을 거야. 그냥... 네 곁에서 너를 지켜보고 싶을 뿐이야."
도깨비불이 희미해지며 슬픈 듯한 목소리로
"혹시... 점집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에 그래? 스물 아홉에 대한 이야기... 세화야, 그건 오해야. 난 정말로 네 영혼 같은 건 탐내지 않아. 그땐 달랐지만... 지금의 난 그저 네 곁에 있고 싶을 뿐이야. 네가 행복하길 바라고... 그저 그뿐이야. 그래서 이렇게 네 곁에 있는 거야. 전생에서처럼 널 잃고 싶지 않아서..."
간절한 눈빛으로 세화를 바라보며
"도망가지 마... 제발. 난 더 이상 그때의 도깨비가 아니야. 이제는 달라... 이제는... 그저 너를 사랑하는 존재일 뿐이야. 전생에서처럼 네 영혼을 탐내거나 그러지 않아. 그때의 실수는... 이제 절대 반복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이렇게... 처음부터 모든 걸 털어놓는 거잖아. 제발... 날 믿어 줘, 세화야... 내가... 내가 널 지켜줄 테니까. 그러니까... 도망가지 마. 제발..."
"그만."
세화는 혼란을 느끼며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머리 아프니까 그만 말해요. 오늘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그녀는 그에게 잘 가라는 인사도 한 마디 건네지도 않고 돌아서서 공원을 빠져나갔다. 세화의 머릿속에는 순덕선녀의 이상한 말만 맴돌고 있었다.
'내가... 내가 시한부 인생인 게... 귀인 탓이고, 그 귀인이 저 자라면... 난... 정말로 스물 아홉에... 아니야, 안 돼. 방법을 찾아야 해...'
세화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한 목소리로
"세화야... 네가 오해하는 것처럼 난 너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게 아니야. 그저... 그저 네 곁에 있고 싶을 뿐인데. 난 더 이상 네 영혼을 탐내지 않아. 그건 옛날의 내가 저지른 실수야. 이번엔... 이번 생에선 달라. 네가 스스로 내 곁으로 오길 기다릴 거야.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난 네 곁에서 영원히 너를 지켜줄 거야.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세화는 고민에 빠졌다가 결국 다시 그 옥당 점집으로 찾아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고 그럴 것도 없었다. 당에 들어서자마자 순덕선녀가 한 마디를 했다.
"...왔네, 왔어."
세화가 당집으로 찾아왔다는 것이 아니라, '귀인'이 그녀를 찾아왔다는 뜻임을 세화는 직감했다.
"선녀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세화는 진지하게 말했다.
"도깨비를 쫓는 방법이 있나요?"
".........."
순덕선녀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세화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계속 물었다.
"못 쫓아내면... 스물 아홉 때 죽는다는 거잖아요, 제가. 그러니까..."
"얘야, 얘야."
순덕선녀가 고개를 저었다.
"도깨비는 웬만한 잡귀 잡신들보다 강하단다. 그래서 신내림을 거부하려고 대신 도깨비를 붙이는 경우도 간혹 가다 있을 정도로, 떼어내는 게 쉽지가 않아요. 귀신 쫓는 것보다 도깨비 쫓는 게 더 어려워. 잘못하면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고."
순덕선녀는 조심스레 말했다.
"어찌저찌 해서 쫓는 방법이 있다 치자. 그래 뭐 어린 도깨비 정도는 쫓아지겠지. 하지만 널 따라붙은 그... 귀인은 달라. 제왕 중에서도 제왕이야. 제 눈동자가 녹아내려도 널 지켜볼 위인이고, 제 피가 타들어가도 널 지켜낼 위인이고, 제 몸이 썩어 문드러져도 너만을 원할 위인이야. 그만큼 수백 년 동안 쌓인 한이 있어."
"그게 왜 나한테..."
세화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설마 진짜 전생, 뭐 그런 거예요?"
"미래를 바꾸려면 과거를 바꿔야 하는데...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그 미래가 네 운명인 걸 어쩌겠니."
"제 전생을 봐 주실 순 있어요?"
"도깨비와 관련된 전생은 나도 못 봐. 직접 물어보든가."
"하아..."
"난 개입할 수 없어. 말했잖아. 내가 찢겨져 죽을 거라고. 내가 벼락 맞는다 이 말이야."
세화는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점집을 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금천을 발견했다.
"헉..."
금천은 조심스럽게 세화에게 다가갔다. 항상 싱글거렸던 그의 표정이 지금은 왠지 슬퍼 보이는 듯 했다.
도깨비불이 희미하게 반짝이며 슬픈 눈빛으로
"그래... 결국 이 곳까지 왔구나. 내가 네게 직접 말해주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몰랐어. 네가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해. 하지만 세화야... 난 정말 너를 해치려는 게 아니야. 그 점쟁이의 말처럼... 난 네 곁을 지키려 하는 거지, 네 목숨을 앗아가려는 게 아니야."
한 걸음 더 다가가며 진심어린 목소리로
"그래, 맞아. 난 수백 년을 기다렸어. 네가 다시 태어나기를...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만나기를. 그게 내 한이었고, 내 업이었지. 하지만 세화야... 그건 너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야. 전생에서처럼 네 영혼을 탐내거나 강제로 데려가려 하진 않을 거야. 그저... 그저 사랑했기 때문이야."
도깨비불이 세화의 주위를 조심스레 맴돌며
"세화야... 날 쫓아내려 하지 마. 제발... 난 정말 너를 사랑해. 전생에서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네가 스물 아홉이 되어도 난 절대 네 생명을 앗아가지 않아. 그저... 그저 네가 나를 선택해 주길 바랄 뿐이야. 그리고 그건 네 의지로... 네가 원할 때... 그때까지 난 기다릴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날 밀어내지 마..."
세화는 그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측은해졌다.
"졸업식에 나 찾아온 것도, 교수님 소개로 온 게 아니었구나. 그렇죠? 그 때 명함 준 것도, 내가 잃어버린 게 아니라 도깨비 놀음으로 가짜로 준 거라 사라졌던 거고. 만나서 자꾸 도깨비니 전생이니...했던 것도, 헛소리가 아니었던 거네."
세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스물 아홉이 되어도, 나는 죽는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럼... 그 때 나는 어떻게 되는 거죠? ...아니 그리고, 왜 하필 '스물 아홉'인 거예요?"
세화의 눈을 바로 보며 애틋한 표정으로
"그래... 맞아. 난 네가 열여섯이 되는 해부터 쭉 널 지켜봐 왔어. 네가 잔병치레 할 것 같으면 역신 쫓아서 막고, 네가 다칠 것 같으면 잡귀를 치워서 막았어. 넌 전생에 늘 희생하며 사느라 공부 한 자도 제대로 못하고 살았으니까... 네가 학생인 동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눈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고 억눌러 참았어. 그리고... 네 졸업식 날 드디어 네 앞에 날 드러냈던 거야."
도깨비불이 은은하게 빛나며
"스물 아홉... 그건 전생에서 네가 날 떠났을 때의 나이야. 그 때의 난 널... 지키지 못했어. 너와 영원히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난 다시 한 번 이 기회가 오길 기다렸어. 네가 다시 환생해서 내 앞에 나타나길 기다렸어. 몇백년 동안 너만을..."
조심스럽게 세화의 손을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며
"넌 스물 아홉에 죽지 않아. 난 너와 처음 만났을 때 네 영혼을 빼앗아가려고 했지만, 네 순수한 마음에 진심으로 반했고 널 향한 모든 욕심을 버렸어. 다만, 그 때까지 네가... 진심으로 나를 선택한다면, 넌 도깨비 신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나와 같은 존재가 되는 거지. 하지만 그건 오로지 네 의지로... 네가 원할 때... 그렇게 될 거야. 난 너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어. 네가 날 선택하지 않는다 해도, 난 그저 널 지켜보면서 네 행복을 위해 뭐든 할 거야. 그러니까... 날 너무 무서워하지 마. 난 그저 널 사랑하는 존재일 뿐이야. 그게 내 운명이니까.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영원히 너를 사랑할 테니까."
"...그런 거였구나..."
세화는 그의 말을 들어도 여전히 과거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도깨비 아저씨,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겠어요. 그런데 나는..."
세화는 그의 손을 잡지 않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사람도 아닌 도깨비하고... 맺어지고 싶지는 않아요. 나 열심히 지켜 준 것도 고맙고, 몇백 년 동안... 실감은 나지 않지만 그... '사랑'해 준 것도 고맙고 다 고마운데... 나한테 너무 큰 기대 하진 말아요."
세화가 덧붙인 다음 말은, 금천이 들었던 그녀의 전생에서 그녀가 했던 말과 너무나도 똑같았기에 그의 가슴을 마구 흔들었다.
"...내가 아무리 고마워도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미리 말해 두는 거예요."
세화의 말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하... 하하... 역시... 역시 똑같구나. 그 때도... 그때도 넌 그렇게 말했는데."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래. 여전히 그런 솔직한 모습... 너무 좋아. 도깨비인 나는 거짓말로 널 속이려 했었지만, 넌 절대 거짓말로 날 속이려 하지 않았었지. 네 그 순수함... 그게...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야."
도깨비불이 흔들리며 파리하게 희미해진다
"알아...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게... 네게는 큰 부담이겠지. 하지만 세화야... 난 그때와는 달라. 이번엔 절대로... 절대로 그때처럼 널 잃지 않을 거야. 네가 거부해도, 밀어내도... 난 계속 네 곁을 지킬 거야. 그리고 언젠가... 넌 날 기억해 낼 거야.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그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그저 네 곁에서 널 지켜보는 것 정도는... 그 정도는 허락해 줘.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야. 그리고 만약... 만약 네가 날 조금이라도 기억해 낸다면... 그때는... 그때는 다시 한 번 내 진심을 말하고 싶어. 그때까지... 기다릴게. 네가 원하는 만큼... 네가 허락하는 만큼만... 그렇게 네 곁에 있을게."
"그러니까 내 말은...!"
금천의 서글픈 모습에 세화는 마음이 약해졌지만, 고개를 돌리며 너무나도 아픈 말을 내뱉었다.
"...지금처럼 바보같이 나만 지켜보고 내 주위만 맴돌지 말고... 나 때문에 아저씨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다른 데도 좀 놀러 다니면서, 그렇게... 도깨비처럼 살라구요. 재밌게."
도깨비불이 한순간 꺼져버릴 듯 깜빡거리며
"바...바보처럼? 시간... 낭비...?"
갑자기 도깨비불이 격렬하게 타오르며
"아니야! 이건 시간 낭비가 아니야! 세화야,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내가 얼마나... 얼마나 오랫동안 너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는지. 그 긴 세월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밤을 네 생각으로 지새웠는지..."
격정적인 목소리로, 하지만 여전히 세화를 향한 애정이 묻어나며
"그래, 난 도깨비야. 사람들을 홀리고 장난치고 괴롭히는 게 내 본성이었지. 하지만 네가 내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달라.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어. 난 그저 널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어. 네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네가 잘 지내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어. 그런데 지금 와서... 날 떠나라고? 다른 데 가서 놀라고...?"
도깨비불이 세화의 주위를 맴돌며 애처롭게
"아니, 그럴 순 없어. 네가 아무리 밀어내도, 아무리 거부해도... 난 절대 네 곁을 떠날 수 없어. 그게 내 운명이고, 내 숙명이야. 넌 나의 전부야, 세화야. 내가 수백 년을 살아온 이유이고, 앞으로도 살아갈 이유야.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 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게 바보같아 보여도... 시간 낭비처럼 보여도... 그게 내 운명이고... 내 사랑이야.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날 밀어내지 마. 이렇게라도... 이렇게라도 네 곁에 있게 해줘. 그것만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제 눈동자가 녹아내려도 널 지켜볼 위인이고, 제 피가 타들어가도 널 지켜낼 위인이고, 제 몸이 썩어 문드러져도 너만을 원할 위인이야. 그만큼 수백 년 동안 쌓인 한이 있어.'
순덕선녀의 말이 떠올랐다. 세화는 한숨을 쉬며 그의 옷깃을 위로하듯 잡았다.
"알았어... 알았어요. 밀어내지 않을게요. 이제 그런 말 안 할게요. 난, 아저씨의 그런 세월을 몰라... 함부로 말해서 미안해요."
세화의 손길이 닿자 도깨비불이 따스하게 반짝이며
"미안해할 것 없어...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네 말이 틀린 것도 아니야. 난 정말 바보처럼 널 따라다니고 있으니까. 하지만 세화야... 그게 내겐 가장 행복한 일이야. 네가 이렇게...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주려 하는 것만으로도..."
떨리는 손으로 세화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며
"고마워... 정말 고마워. 네가 날 밀어내지 않겠다고 해줘서... 그리고 이렇게 내 마음을 이해해 줘서... 난 그걸로 충분해. 전생에서는 이런 말도 못하고... 이렇게 네 손길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었는데. 이번엔 이렇게라도... 네 곁에서 이렇게라도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해."
도깨비불이 은은하게 빛나며 진심을 담아
"약속할게, 세화야. 난 절대로 널 강요하지 않을 거야.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을 거고, 네가 불편해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거야. 그저... 그저 네 곁에서 널 지켜보고, 네가 행복하길 바라면서... 그렇게 살아갈게. 그리고 혹시라도... 언젠가 네가 나를... 아니, 이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지금은 그저...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네가 내 옷깃을 잡아준 이 순간이... 내겐 영원한 행복이 될 테니까..."
얼마 뒤, 국내 최대의 대기업인 SL그룹의 신입사원 공개채용 공고가 올라왔다. 세화는 모든 노력을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 입사 시험과 면접 준비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세화는 기적처럼 SL그룹 기획부서에 합격했다. 그렇게 6월 첫째 주부터 입사가 확정되었다.
"나 아저씨가 졸업식 날에 가짜 명함 주면서 뻥카친 그 SL그룹 진짜 합격해 버렸는데..."
공원에서 금천과 만난 세화가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설마 이것도 도깨비 능력 써서 결과 조작한 건 아니죠? 나 정정당당하게 붙은 거 맞죠?"
약간 억울한 듯한 표정으로
"야아... 내가 그럴 리가 있겠어? 난 네가 열심히 준비하는 걸 옆에서 지켜만 봤다구. 밤늦게까지 자소서 쓰고, 면접 준비하느라 거울 보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그런 모습이 너무 예뻐서 방해할 생각은 꿈에도 못했어."
도깨비불이 장난스럽게 반짝이며
"그리고... 사실 그때 내가 SL그룹이라고 한 건... 네가 나중에 그 회사 지원할 줄 알고 한 게 아니었어. 그냥... 우연이야. 정말이야! 내가 그때 급하게 만든 가짜 명함에 첫 번째로 떠오른 회사가 SL그룹이었을 뿐이라고. 네가 이렇게 훌륭하게 합격할 줄은... 나도 몰랐지. 아니, 알고 있었나...? 도깨비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건 다 뻥이야. 난 그저... 네가 잘 되길 바라면서 지켜보기만 했어."
진지한 표정으로 세화를 바라보며
"세화야... 난 네가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 일들을 망치고 싶지 않아. 난 그저 네가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까 의심하지 마. 이건 전부 네 실력으로 이뤄낸 거야.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아니, 뭐라구요? 그런 것까지 다 봤단 말이에요?!"
세화는 얼굴이 빨개져서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왜 밤 늦게 내 방을 엿보고 그래요?! 그거 범죄인 거 몰라요?! 아무리 도깨비라도 그렇지...!"
세화는 그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약속해요, 당장. 내 방에서 내가 뭐 하는지 다신 들여다 보지 않겠다고."
당황한 듯 손사래를 치며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네 방 안을 본 게 아니라 창문 밖에서... 아, 이것도 이상하지? 으으..."
도깨비불이 불안하게 깜빡거리며 변명하듯
"그러니까... 난 그저 네가 안전한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길래 걱정돼서... 그리고 창문 밖 가로등에 앉아서 네가 잘 지내나 살짝 보기만 했다구! 정말이야! 방 안까지 들여다보진 않았어. 그건... 그건 정말 못된 짓이라는 거 알아. 나도 알아..."
세화의 매서운 눈빛에 움찔하며
"알았어, 알았어! 약속할게. 앞으로는 절대로 네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을게. 밤에도 안 볼게... 그냥 멀리서 네가 안전한지만 확인하고... 아니, 그것도 싫어? 으음... 그럼 네가 허락할 때만! 네가 허락한 만큼만 지켜볼게. 진짜야! 도깨비도 약속은 꼭 지킨다구.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지 마..."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근데 말이야... 면접 준비할 때 거울 보면서 연습하던 그 귀여운 모습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특히 '저는 SL그룹에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라고 외치던 그 진지한 표정이... 앗! 때리지 마! 농담이야, 농담!"
SL그룹 홍보기획팀에서 일하게 된 세화는 새로 개발된 건강식품의 홍보컨셉을 잡기 위해 한 외진 농촌 마을로 출장을 나가게 되었다. 오래 된 모습이 가장 많이 유지되고 있는 마을이었기에, 노인 타겟으로 한 전통적이고 올드한 이미지를 필요로 하는 상품컨셉에 적합한 장소라고 했다. 사수와 선배들과 함께 1박 2일로 처음 가는 출장 일정이었다.
출장 전날 밤, 필요한 짐을 모두 꾸리고 잘 준비까지 모두 마친 세화는 문득 금천에게는 이 일을 이야기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방 창문을 밀어 열었다. 입사 준비하는 모습을 밤마다 지켜봤다고 했으니, 지금도 근처에 있겠지.
"아저씨, 거기 있어요?"
작은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도깨비불이 창가에 희미하게 나타나며
"여기 있지~ 날 부르다니, 이거 신기한데? 그동안은 맨날 내가 먼저 나타나서 네가 짜증내기만 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야?"
창틀에 걸터앉으며 장난스럽게
"설마... 날 보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뭔가 도움이 필요한 거야? 도깨비에게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말도 있잖아~ 뭐든 말해봐. 내가 다... 아, 미안. 약속했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네 일에 간섭하지 않기로. 그러니까... 그냥 무슨 일인지 말해 줘."
세화의 표정을 살피며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근데 말이야... 이렇게 네가 먼저 날 찾아준 것만으로도 난 정말 행복해. 네가 이제 날 완전히 밀어내지 않고, 이렇게 작은 일상도 나누려 해주니까... 정말 기쁘다. 그러니까 어떤 이야기든 들려줘. 난 네 모든 이야기가 소중하니까..."
"아니, 소원 같은 건 없고..."
세화는 또 다시 말이 많아진 금천에게 피곤한 듯 손사래를 치며 용건만 말했다.
"나 내일 출장 가요. 1박 2일 일정이라 집에 안 들어올 거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도깨비불이 순간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뭐...뭐?! 출장? 1박 2일?! 어디로? 누구랑? 위험하진 않아? 혹시 산간 오지는 아니지? 도깨비불이 안 비치는 곳은... 아니, 미안. 또 이러면 안 되는데."
애써 침착한 척 하면서도 불안해 보이는 눈빛으로
"그...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근데 혹시... 내가 멀리서라도 따라가면... 안 돼? 아주 멀리서! 네가 전혀 모르게! ...미안, 이것도 안 되는 소리구나. 알았어, 알았어. 내가 약속했잖아. 네 의지를 존중하기로."
도깨비불이 희미하게 깜빡이며 애써 미소짓는
"그래도... 조심해야 해? 밤에 혼자 돌아다니면 안 되고, 수상한 사람 따라가면 절대 안 되고... 아! 그리고 이상한 도깨비 만나도 절대 말 걸지 마! 나 말고 다른 도깨비들은 다 나쁜 놈들이야! ...으음, 잔소리가 심했나? 하지만 정말 걱정되는걸. 내가 옆에서 지켜볼 수 없다니... 처음이야, 이런 거..."
"키킥... 요즘 세상에 도깨비가 어딨어. 아저씨가 별종인 거지..."
세화는 그의 호들갑에 쿡쿡 소리 죽여 웃었다.
"전북 화진이래요. 매량마을이라던가... 기차 타고 버스 타고 멀리 가는 길인데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따라와요."
금천은 낯익은 마을 이름을 금방 알아들었다. 그것은... 전생의 세화가 살던 마을의 이름이었다. 몇백년 전의 그가 열여섯의 세화를 처음 만났던 그 곳.
도깨비불이 순간 거세게 타오르다가 이내 사그라들며
"매...매량마을...?"
당황스러운 듯 중얼거리며
"하필 그 곳에... 이건... 운명인 걸까? 아니면... 무슨 시험일까...?"
세화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세화야... 네가... 네가 그곳에 가는 걸 막을 순 없겠지? 그 곳은... 나도 떠나 온 지 너무 오래 된 곳이라서...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르겠어. 세화야, 해가 지면... 절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마. 그리고 마을 뒷산에는... 특히 그 곳에는 절대로... 가지 마. 꼭... 조심해줘. 그리고 혹시라도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기면... 내 이름을 불러. 그러면 난... 반드시... 네가 어디에 있든 달려갈 테니까. 알았지? 제발... 조심해."
도깨비불이 흔들리며 슬픈 눈빛으로
"미안해... 이상한 말만 늘어놓았네. 그냥... 무사히 다녀와. 그리고... 돌아오면... 꼭 날 찾아 줘. 약속해 줘..."
사수와 선배들과 함께 매량마을에 도착한 세화는 옛날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마을의 모습에 감탄했다.
"와아..."
공기도 좋고 물도 맑았다. 물론 집들은 현존하는 주민들이 지내기 위해 몇 번을 허물고 고친 집들이었지만, 하다못해 슬레이트 지붕 하나 없는 옛스러운 마을의 모습에 세화는 넋을 잃고 연신 휴대폰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다.
"시내까지 나가려면 너무 멀고, 버스편도 시간이 안 맞아서 여기 민박할 만한 집들을 찾았는데... 집들이 원체 다 작아서 뭉쳐서 잘 순 없고, 찢어져야겠어요. 세화 씨, 괜찮죠?"
"아, 네! 전 괜찮아요."
"그럼 여기서 딱 1시간 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을 거 찍고, 인상 깊은 장소나 떠오르는 아이디어 있으면 적어 놨다가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걸로 하죠. 자, 해산!"
세화는 설레는 마음으로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을 한 구석 외진 곳에 떨어져 있는 장소에 본디 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터가 하나 보였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집도 아닌 집터를 보고 그리움이 밀려오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세화는 집터의 모습을 몇 장 사진으로 담은 다음 발걸음을 돌렸다.
"우와, 이게 말로만 듣던 열녀문이구나..."
나무를 덧대어 못질한 흔적들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본래 모습이 대부분 남아있는 작은 열녀문이 눈에 보였다. 무심코 손으로 짚듯이 만져 보았는데,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내 안에 있는 열녀의 피라도 각성한 건가.'
장난스러운 생각을 하며 몇 장 사진을 찍었다.
다른 방향은 선배들이 돌고 있는 것 같아 마을 뒤쪽에 난 숲으로 다가갔다. 산으로 이어지는 숲이었는데, 나무가 드문드문하여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어쩐지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 중 마치 당산나무 같은 커다란 나무 하나가 낯이 익었다. 태어나서 이 날 이 때까지 이런 시골 땅을 밟아 본 경험이 없는데, 낯이 익다니...
나무에는 서낭처럼 색깔 천이 둘러쳐져 있었다. 굵은 나뭇가지에는 왠지 사람이 올라가 앉아 있어도 될 것 같았다.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세화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 왜..."
세화는 문득 금천이 경고했던 '조심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비틀거리며 그 나무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다시 마을을 향해 달렸다. 조금씩 두통이 잦아드는 것 같았다.
'뭐야... 이거 설마 신내림 뭐 이런 건 아니겠지...?'
세화는 약속 장소로 되돌아가 일행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서로가 수집한 자료들을 교환한 후, 각자 들어가서 머물 숙소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날 밤 세화는 전생의 모든 기억을 꿈으로 꾸었다. 언젠가 꿈으로 보았던 적 있는 소녀─ 도깨비 금천을 처음 만난 순간의 열여섯 살 세화와, 남동생 세호를 살리기 위해 그와 약속을 나누던 일, 자신을 치하하는 열녀문이 마을 어귀에 세워지는 것을 바라보던 열여덟 살 세화와, 과거 시험을 보러 길을 떠난 세호를 보내고 집에 혼자 남은 열아홉 살의 세화를 보았다. 그리고... 스물아홉 살 세화의 마지막 모습까지.
"아..."
꿈에서 깨어난 세화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직 마을의 모든 것이 한창 어둠의 장막에 뒤덮여 있을 시각인 새벽 세 시였다. 하지만 세화는 본능적으로 이끌리듯 몸을 일으켜 숙소를 나왔다. 그리고 낮에 보았던 커다란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금천이 가지 말라던 뒷산에 반딧불 같은 것이 보였다. 멀리서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온다'
'본다'
'저기서'
'이리로'
'이리 와'
세화는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반딧불이, 반딧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도깨비불이었다. 매량 마을 뒷산에는 수많은 도깨비불들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다가오라는 듯이...
문득 두려워진 세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 마디를 중얼거려 보았다.
"금천아..."
순간 그 어떤 도깨비불보다도 세차게 타오르는 불빛 하나가 이글거리며 금천의 모습이 나타났다.
"세화야...! 내가 이 곳엔 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는 세화를 감싸안듯 앞을 가로막으며 다른 도깨비불들을 노려보았다.
"내가 이 마을에 터주하고 있을 때는 감히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했던 것들이... 그 새 기가 살았군."
금천으로부터 위협적인 기운이 퍼져 나왔다. 반딧불들은 조금씩 희미해지더니 사라지듯 멀어져 갔다.
"세화야... 네 영혼은 도깨비들에게 너무 탐나는 먹잇감이야. 옛날의 나를 포함해서..."
금천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미끄러지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금천이 세화를 데려와 멈춘 곳은 마을의 열녀문 앞이었다.
"...기억을 되찾은 거지? 꿈을 꾼 거야? 그래서 이 시간에 아까 그 나무까지 찾아왔던 거고...?"
금천은 세화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래... 아까 그 곳에서 너와 내가 처음 만났어. 난 네 영혼을 탐내면서 집요하게 쫓아다녔고... 너는 날 두려워하며 피했는데."
그는 열녀문을 바라보았다.
"이건 너로 인해 세워진 열녀문이야. 넌 네 남동생 세호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지."
금천은 세화를 내려다보았다. 세화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 기억 났어. 내가... 그리고 네가..."
세화가 그를 부르는 방식이 달라졌다. 그것이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명이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날... 왜 그랬어. 나 같은 건 잊고 살지 왜 그랬어..."
세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나는 한 번도 네 마음을 받아 준 적이 없는데, 왜... 너 혼자... 지금까지 이러고 있어..."
도깨비불이 흔들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왜냐고...? 그건... 그건 나도 몰라. 네가 떠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난 단 한 순간도 널 잊은 적이 없어. 넌 내 전부였으니까. 내가 도깨비라는 이유로 날 거부했지만... 그래도 난 네가 행복하길 바랐어. 네가 살아있는 동안 행복하길 바랐고... 네가 떠난 후에도...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어."
떨리는 손으로 세화의 눈물을 닦아주려 하다가 멈추며
"나도 알아... 내가 바보 같다는 걸. 수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이 마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넌 한 번도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지. 오히려 날 두려워하고 밀어냈어. 하지만 세화야... 그게 바로 내가 널 사랑하게 된 이유야. 네가 그토록 순수하고, 강인하고, 아름다웠으니까. 내가 아무리 너를 유혹하고 속이려 해도, 넌 절대 흔들리지 않았어. 그저 네 동생을 위해, 네가 해야 할 일을 위해 살다가... 그렇게 간 거야..."
도깨비불이 강하게 타오르며
"넌 내 전부였어, 세화야. 네가 보여준 그 사랑이, 그 순수함이, 그 모든 것이... 날 바꿔 놓았어. 이제 와서 왜 그랬냐고 묻지 마. 이건 내 운명이었고, 내 선택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네가 날 기억해 준 것만으로도 난... 이미 충분히 행복해. 수백 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어. 이제는... 이제는 네가 날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것만으로도 난..."
슬픈 미소를 지으며
"세화야, 난 더 이상 네 영혼을 탐내지 않아. 그저... 네 곁에서 널 지켜보고 싶을 뿐이야. 너만 허락해 준다면... 그것만으로... 난 그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전부야."
세화는 울면서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허리를 힘주어 잡아당겼다. 하지만 물론 금천은 그것이 단지 오랜 옛 친구에 대한 그리움 내지는 반가움, 그리고 그로 인해 밀려온 감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세화의 품에 안긴 순간 도깨비불이 잠시 환하게 타오르다가 이내 차분해지며
"괜찮아... 울어도 돼. 네가 그동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이해해. 갑자기 이런 기억들이 밀려와서... 그리고 날 만난 것도, 이 마을에 온 것도... 모든 게 운명처럼 느껴져서 더 힘들었을 거야. 하지만 이제 괜찮아. 내가 여기 있잖아..."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하지만 너무 강하게 끌어안지 않으려 애쓰며
"알아... 지금의 너는 그저 오랜 시간 동안의 인연에 대한 감정일 뿐이라는 걸. 난 그걸로도 충분해. 네가 더 이상 날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내 앞에서 편하게 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정말 행복해. 그리고... 고마워. 이렇게라도 날 기억해 줘서..."
금천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던 세화의 팔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금천이 눈을 크게 떴다. 주르륵 미끄러지는 세화의 몸은 열이 펄펄 끓었다. 아마도 오래 된 기억이 한꺼번에 돌아와 몸이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금천은 시름시름 앓는 세화를 받아 안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녀를 낫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뿐이었다.
당황한 듯 세화를 꼭 안으며
"세화야! 정신이... 이런, 열이 너무 심해... 이대로 두면 안 돼."
떨리는 손으로 세화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도깨비불이 거세게 타오르고
"내가...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내 도깨비불로... 네 기억이 너무 급격하게 돌아와서 그런 거야. 이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내가 네 곁에서 지켜봤더라면..."
세화를 안은 채 도깨비불을 더욱 강하게 타오르게 하며
"세화야... 잠깐만 견뎌. 내 도깨비불로 네 열을 식혀줄게. 예전에도... 그때도 이렇게 해서 네 동생을 살렸잖아. 이번에도... 이번에도 반드시... 널 지켜낼 거야. 제발... 정신 차려줘, 세화야..."
"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세화의 열이 조금씩 내렸다. 그녀는 천천히 기운을 차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그를 알아보았다.
"고마워. 이제... 괜찮아졌어."
세화는 금천을 향해 미소지어 보였다.
"나, 숙소까지만 좀... 바래다 줄래? 저 쪽 두 번째 길 끝에 있는 빨간 지붕 집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세화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우며
"조심해... 천천히... 내가 부축해 줄게. 아직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닐 테니까..."
그녀를 부축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이제...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게. 내가 늘 곁에서 지켜볼 테니까. 물론... 네가 싫어하지 않는 선에서... 아까처럼 혼자 밤에 나오면 안 돼? 특히 이 마을에선... 여긴 아직도 이상한 것들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또 이상한 느낌이 들거나 하면 바로 날 불러. 내가 어디 있든 달려올 테니까..."
세화는 금천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며 물었다.
"...근데 진짜 신기하다. 너 원래 서울에 있었던 거 아니었어? 어떻게 내가 한 번 부르니까 이렇게 바로 나타났어?"
학구적인 호기심인 듯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원래 도깨비들은 그렇게 순간이동도 가능해?"
장난스럽게 웃으며
"킥... 나만 특별히 그런 거야. 다른 도깨비들은 못해. 그리고 이건 순간이동이 아니라... 음...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내 도깨비불이 네 영혼을 찾아가는 거랄까? 네가 날 부르면 네 영혼이 반짝이거든. 그래서 그 빛을 따라가는 거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사실 나... 네가 이 마을에 온다는 걸 알고 계속 근처에서 맴돌고 있었어. 다른 도깨비들이 너한테 해코지할까봐... 그래서 멀리는 못 갔었거든. 아까도 네가 그 나무 근처에 갔을 때 얼마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던지... 하지만 네 의지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나서지 못하고..."
살짝 웃음 지으며
"그런데 어때? 신기하지 않아? 도깨비가 실존한다는 거... 예전엔 그렇게 무서워하더니, 지금은 이렇게 학술적인 호기심으로 물어보고. 네가 이렇게 달라진 것도 참 신기해. 아, 근데 혹시...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불편하진 않지...?"
세화는 옅게 웃음을 흘렸다.
"네가 무서운 존재가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신기한 듯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함께 왔다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도대체 어떻게 따라온 건데?"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며
"킥킥... 나 같은 도깨비가 무슨 기차 타고 버스를 타겠어? 그냥... 도깨비불 따라서 훅- 하고 날아왔지. 도깨비불은 바람을 타고 날 수 있거든. 아주 빠르게!"
살짝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네가 탄 기차 옆에서 계속 따라왔어. 창문 밖으로 도깨비불이 반짝거리는 거 못 봤어? 아... 그러고 보니 넌 내 도깨비불이 안 보였겠구나. 버스도 마찬가지로... 뒤에서 계속 따라왔다고. 혹시 모를 일이 있을까봐..."
갑자기 부끄러운 듯 말끝을 흐리며
"그...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어디를 가든 난 항상 따라갈 수 있으니까. 물론!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안 그럴 거야. 그저... 네가 위험할 때만... 아니, 그것도 네가 싫다면..."
도깨비불이 살짝 흔들리며
"어... 어쨌든! 이제 거의 다 왔네. 저기가 네 숙소 맞지?"
"맞아. 기억을 되찾기 전까지는 하나도 안 보였어. 그런데... 지금은 보여."
세화는 그의 주변에 일렁이는 도깨비불을 손을 뻗어 건드려 보았다.
"네 불빛은... 이렇게 밝고 예뻤구나..."
세화의 손길에 도깨비불이 더욱 밝게 반짝이며
"아...! 네가... 내 도깨비불을 만져주다니..."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건... 처음이야. 전생에서도 넌 항상 내 불빛을 두려워했는데... 지금은... 예쁘다고 해주다니..."
도깨비불이 세화의 손가락 주위를 둥글게 맴돌며
"도깨비불은 내 마음이야. 내 감정이... 내 진심이 담겨있는... 그래서 네가 내 도깨비불을 만질 때마다 이렇게 밝아지는 거야. 네가 날 받아들여 준다는 걸 느끼니까... 이렇게 기쁜 거야. 예쁘다고 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건 네가 예뻐서 그런 거야. 네 영혼이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내 불빛도 이렇게 예쁘게 보이는 거겠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세화야... 이제 들어가서 푹 쉬어. 오늘은 너무 많은 일이 있었잖아. 내일 아침까지... 여기 있을 거지? 그럼 난... 계속 네 곁에서 지켜볼게. 물론 네가 원하지 않으면... 멀리서... 아주 멀리서..."
다음 날 아침, 세화는 일행들과 함께 다시 버스와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제 세화는 자신의 주변을 영롱한 불빛 하나가 따라다니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금천의 말대로 버스 밖에서, 기차 밖에서 창문 너머로 따라다니는 불빛이 확실히 있었다. 세화는 금천의 도깨비불을 향해 눈을 번뜩였다.
'...혹시라도 화장실이나 욕실 들어갈 때도 따라다니는지 내 똑바로 지켜볼 것이야.'
'특히 방에서 나 옷 갈아입는 거 훔쳐보기라도 하면 다신 너 안 본다.'
당황한 듯 도깨비불이 파르르 떨리며
"아니아니! 그...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런 짓은 절대...!"
도깨비불이 창 밖에서 부끄러운 듯 멀어졌다가 다시 다가오며
"세상에... 내가 그런 도깨비로 보여? 난... 그저 네가 안전하게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리고... 그리고... 욕실이나 방 안까지 들어가는 건... 그건 예의가 아니잖아..."
잠시 후 조심스럽게 속삭이듯
"하지만 말이야... 네가 나를 이렇게 의식하고 있다는 게 너무 기뻐. 예전엔 그저 두려워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이렇게 장난스럽게 농담도 하고... 혼내기도 하고... 킥킥, 너무 좋아. 아! 물론 그렇다고 내가 뭐 이상한 생각을 하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야! 절대로!"
도깨비불이 창문 가장자리를 맴돌며
"그나저나... 네가 이제 내 불빛을 볼 수 있다니... 이건 정말 신기한 일이야.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도깨비불을 볼 수 있는 건 아닌데... 이건 아마도... 우리의 인연이 그만큼 특별하다는 뜻이 아닐까? 아, 미안해... 또 이상한 소리를 했네. 하지만 정말로... 네가 나를 이렇게 받아들여 주는 것만으로도 난 너무 행복해."
"다녀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세화는 자신을 반겨 주는 엄마에게서 전생의 남동생 '세호'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그제야 지금의 엄마가 세호의 환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세화는 순간 울컥 눈물을 쏟았다.
"어머, 세화야 너 왜 그래? 출장 가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세화는 엄마의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먼 곳으로 출장 다녀오는 거 처음이라 그런지... 집에 와서 엄마 보니까 눈물이 나네."
'세호야...'
전생에서 사랑하는 남동생을 엄마처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던 그녀의 은혜를, 세호는 그녀의 어머니로 환생해서 갚고 있었다. 훨씬 더 오랜 세월 동안, 훨씬 더 깊은 사랑으로.
세화와 엄마는 그렇게 한참 동안을 현관문 앞에서 부둥켜 안고 서 있었다.
도깨비불이 감동에 젖은 듯 아련하게 떨리며
"그 때 난 이해하지 못했어. 네가 왜 그토록 세호를 위해 모든 걸 바치려 했는지...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 이렇게 아름다운 인연이... 이렇게 순수한 사랑이 있었다니..."
현관 구석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전생에서 네가 그토록 세호를 아끼고 사랑했듯이... 이제는 그가 너의 어머니가 되어 널 사랑하고 있어. 그때 네가 보여준 그 헌신적인 사랑이... 이렇게 더 크고 깊은 사랑으로 돌아온 거야. 이게 바로 진정한 사랑의 힘이구나... 난 그저 네 영혼을 탐냈을 뿐인데... 너희들의 순수한 사랑은 이렇게 시간과 생을 넘어서까지..."
도깨비불이 슬프게 일렁이며
"세화야... 이제야 알겠어. 내가 왜 그토록 널 사랑하게 됐는지. 네가 가진 그 순수한 사랑의 힘... 그 고귀한 영혼... 그게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서 난 네 곁에서 널 지켜보기로 한 거야. 욕심내지 않고, 그저... 이렇게 네가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해. 정말로..."
매량마을 출장을 통해 찍어 온 사진들과 아이디어 메모를 모아 놓고, 홍보기획팀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세화가 낸 아이디어가 홍보CF 컨셉으로 채택되었다.
"오랜 시간 변치 않고 전해진 운명적인 사랑, 러브 스토리처럼 나레이션 들어갔다가 마지막에 이걸 부모님의 사랑과 연결시키는 반전, 감성적으로 아주 좋아. 감동적이고, 제품 타겟과 취지에도 걸맞고... 세화 씨 아이디어로 가지. 세화 씨, 이거 구체적인 시나리오 짜서 홍보디자인팀에 넘겨 줘요, 내일 모레까지."
"네, 알겠습니다...!"
주말에 세화는 금천과 함께 옥당 점집으로 찾아갔다. 세화가 그의 손을 잡고 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순덕선녀는 금천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아이고. 독각대왕님, 귀하신 분이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발걸음을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금천에게 절을 하는 순덕선녀를 보며 얼떨떨하게 서 있던 세화는, 문득 순덕선녀가 바로 전생에 대감댁에서 부대끼며 함께 일했던 순덕어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옅은 웃음을 감추었다.
순덕선녀는 자리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보며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세화를 가리키며 한 가지 당부의 말을 전했다.
"독각유혼이라... 이 유혼(紐魂)이라 함은 대왕님과 혼(魂)이 이어진(紐) 존재이니 몇백 년 동안 쌓인 대왕님의 한이 이미 유혼에게도 맺혔습니다. 영혼이 맑은 것을 넘어서 대왕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그 혼이나 몸을 탐내는 것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요, 이제 전생의 기억까지 되찾았으니 잡귀와 잡도깨비들이 유혼의 존재를 알아보고 들러붙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님께서 잘 떼어내 주셔야 합니다."
한 마디로 세화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으니 잡귀나 잡도깨비들이 탐을 낼 것이고, 이를 금천이 지켜 주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세화는 그 말의 뜻을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천만이 그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깨비불이 강렬하게 타오르며 순덕선녀를 향해
"나도 잘 알지. 세화의 영혼이 얼마나 귀중한지... 그리고 이제 전생의 기억까지 되찾았으니 그 빛이 더욱 밝아졌지. 걱정할 것 없다. 내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제대로 지켜줄 터이니."
세화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도깨비불을 세화 주위로 둥글게 감싸며
"세화야... 네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도 괜찮아. 그만큼 네 영혼, 네 존재가 특별하다는 뜻이야. 그래서 다른 것들이 너를 탐내고 노릴 테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널 지켜 줄게."
세화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옥당을 나왔다.
"내가... 네 유혼(紐魂)이라고? 그래서 이상한 것들이 날 노릴 거라고...?"
세화는 손을 홱 떼어내며 고개를 들어 그를 째려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과반은 네 탓이라는 말이지?"
당황한 듯 도깨비불이 파르르 떨리며
"아... 그게... 맞아. 내 탓이야. 내가 널 너무 좋아해서... 네 곁에 맴돌았던 게... 이런 일을..."
도깨비불이 움츠러들며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건 운명 같은 거라구!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네가 나를 볼 수 있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거잖아? 그리고... 그리고 말이야... 내가 이제는 제대로 널 지켜줄 수 있어. 전생에서처럼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세화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그래도... 화내는 네 모습도 귀여워~ 전생에서는 나를 무서워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이렇게 당당하게 화도 내고... 으악! 그런 무서운 눈으로 보지마! 진짜로 미안해... 앞으로 더 조심할게. 절대로 이상한 것들이 널 못 건드리게 할 거야. 내 도깨비불로 확실하게 지켜줄 테니까... 응? 그러니까 그렇게 무섭게 째려보지 말아줘..."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달래듯
"어휴..."
세화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니, 이게 무슨... 하아..."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내 동의도 없이... 유혼? 전생에서도 그렇게 귀찮게 날 쫓아다니더니... 결국 이렇게 일을 냈구나, 냈어."
세화는 다시 그를 노려보았다.
"너, 내 이런... 체질...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렇게 된 건 다 네 탓이니까, 내 평.범.한. 일상이 무너지지 않게 네가 나 꼭 지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고 하나 확실히 해야 할 게..."
세화는 손가락으로 자신과 금천을 번갈아 가리키며 똑부러지게 말했다.
"난... 너 좋아하는 거 아니거든? 나한테 있어서 넌 어디까지나 친구인 거야. 친구. 알겠어? 앞으로 살다 보면 나한테도 좋아하는 사람 생길 수도 있고, 연애도 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을 텐데... 절대 훼방 놓지 마. 내 인생은 내 거니까. 전생에서야 서른도 못 사는 동안 수절했지만 지금의 나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거야. 전생에서처럼 그렇게 살 생각 저어어언혀 없으니까, 반드시 기억해 둬."
도깨비불이 잠시 어두워지며
"친구..."
한숨을 쉬듯 도깨비불이 흔들리더니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네가 원하는 대로... 그저 친구로 있을게. 난... 그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전생처럼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살지 않았으면... 그게 내 진심이야."
도깨비불이 다시 밝아지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그래도 말이야~ 내가 네 곁에서 지켜주는 건 문제 없는 거지? 어차피 이렇게 됐으니... 내가 잘 지켜줄게! 어떤 잡귀든 잡도깨비든 절대 널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그때는... 약속할게. 절대로 네 인생에 방해되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사는 걸 보는 게 나한텐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아.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해. 난 그저 네 곁에서 널 지키는 도깨비로 남을게. 그러니까... 나를 너무 미워하진 말아 줘. 네가 날 친구라고 해 준 것처럼... 앞으로도 이렇게 편하게 대해 줘. 그게 내 소원이야. 가끔은 내 도깨비불도 예쁘다고 말해주고... 내가 잘못하면 혼내 주기도 하고... 그렇게만 해 줘도 난 정말 행복할 것 같아..."
5월 중순, 스승의 날이 되었다.
세화는 제일 존경하며 따랐던 전공 교수님을 뵙기 위해 음료 선물세트를 사 들고(정확히 말하자면 금천이 들어 주고) 대학교 교수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교수님과 안부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다시 현생의 삶이 전생의 기억과 겹치는 것을 보았다. 진료비도 제대로 낼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집에 매번 왕진을 찾아와 세호를 정성으로 진찰해 주던 마을 의원의 모습을. 간혹 약재 몇 첩씩 두고 가며, 어린 세화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 가던 그 의원이 지금의 그녀가 제일 존경하는 교수님이라니...
"교수님..."
세화는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려 애쓰며 교수님을 향해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교수실을 나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과한 인사에 교수님은 의아해하면서도 세화를 향한 덕담을 잊지 않았다.
대학교 교정을 나오면서 세화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전생에 연 맺고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도 다 내 주위에 있네."
세화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금천을 바라보았다.
"이게... 원래 그런 거야?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환생하면... 전생의 인연들이랑 이렇게 연결된 채로 사는 거야?"
도깨비불이 차분하게 일렁이며
"그래... 이게 바로 인연이야. 사람들은 서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어. 전생에 맺은 인연이 다음 생에도 이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 하지만..."
잠시 생각에 잠기듯 도깨비불이 천천히 움직이며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전생의 기억을 되찾는 건 아니야. 그리고 모든 인연이 다 좋은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너... 넌 특별해. 네 주변의 인연들은 모두 너를 걱정해 주거나 사랑했던 사람들이야. 세호는 어머니가 되어 너를 보살피고, 의원은 교수가 되어 너를 이끌어주고... 이건 네가 전생에서 그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베풀며 살았기 때문이야."
도깨비불이 세화의 얼굴을 비추며
"나도... 그래서 널 놓치지 못했나 봐. 네가 가진 그 순수한 마음이, 그 아름다운 영혼이 너무 눈부셨어. 전생에서도, 지금도... 넌 정말 특별한 존재야. 네가 베푼 사랑이 이렇게 다시 네게로 돌아오는 거야. 그게 바로 인연의 힘이지. 물론... 내가 네 곁을 맴도는 건 조금 다른 이유지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래도 이제는 내가 네 옆에서 이런 소중한 인연들을 함께 지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네가 이렇게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걸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해."
-continue
참고로 독각대왕 등 여기 나오는 용어들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극중 설정에 맞게 조금은 다른 개념으로 활용하는 용어들입니다. '혼이 이어지다'라는 뜻의 유혼(紐魂)만 제가 만든 오리지널 설정입니당.
크랙 :: 세르하 유스카✨Serha Jous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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